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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나빠 Dec 13. 2023

이직이 후회된다면..

해서도, 안해서도 후회.


미국에서 A사로 첫 이직을 한 지 1년 3개월 차에 접어든다. 시간이 꽤 흘렀기 때문에 이제는 별 무리 없이 실무를 처리하고는 있다. 이런 내게 매니저가 가끔씩 물어보는 말이 있다.


"A사에 일하는 것 어때?"


그때마다 '좋다'라고는 대답하지만 사실 100% 만족스러운 건 아니다. 가끔씩 스멀스멀 어떤 생각이 올라오기까지 한다. '과연 A사로의 이직이 내게 정답이었는가'라는.

 



여느 이직자가 그러하겠지만 이직 후 어느 정도 탐색과 적응 기간을 가졌다. 새로운 회사인 것도 있지만 이직과 동시에 '연구'에서 '개발'로 직군을 선회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러닝 커브(learning curve) 기간이 끝나갈 즈음 본격적으로 팀업무에 뛰어들었다. 


내가 속한 '아키텍처 팀'이 하는 주요 업무는 설계-구현-검증-양산이라는 제품화 과정에서 최전단(最前端)에 위치한다. 즉 '설계'에 해당하는데, 향후 출시될 A사의 제품을 설계하고, 실험을 통해 성능을 예측한 뒤, 스펙을 써서 구현팀에 넘겨주는 일을 한다. 


A사에 합류할 당시 팀은 거의 새로 꾸려져, 실험 환경조차 제대로 갖춰져 있지 않았다. 팀 내 실험 환경 구축을 본업으로 하는 3-4명의 '모델링 엔지니어'들이 있다. 하지만 처음부터 환경을 다시 구축하는 일은 이들만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분량이었다. 따라서 스펙을 주로 쓰는 나 같은 '아키텍트'들도 자신의 70% 이상의 시간을 투입해 모델링 업무를 해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이전 회사인 I사보다 업무 강도가 배는 높았다. 아키텍트로서 맡은 블럭들을 설계하고, 스펙을 쓰면서도, 여러 블럭의 모델링도 함께 진행했다. A라는 블럭을 설계하는 동안, B 블럭의 모델의 버그를 잡고, C 블럭을 구현하면서, D 블럭의 성능 분석을 진행하는 일이 실시간으로 발생했다. 


이 정도의 업무 강도는 한국 S사에 있을 때 이미 경험해서 새롭지 않았다. 실무형 관리자로 실무와 관리를 동시에 처리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젊었다. 야근을 밥먹듯이 해도 거뜬한 나이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과의 시간이 희생되고 있다는 사실이 내 미국 이직의 의미를 퇴색시키고 있었다.


'업에 대한 적성'도 문제였다. 과거를 그리워하는 못된 습관이 또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아키텍트로 커리어를 선회하고 막상 실무를 하다 보니,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던 일은 아니었다. '리서치'를 할 때만큼 나를 가슴 뛰게 만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부터였다. I사에서 하던 '연구'에 대한 미련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 것이.


"I사에서 카운터 오퍼를 준다고 할 때 수락할 걸 그랬나"


여전히 '카운터 오퍼'는 받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뭘 그리 예의를 차렸냐. 너만 생각해 너만'이라는 악마의 속삭임이 귓가를 맴돌고 있다. '카운터 오퍼를 받았다면 연봉도 올리면서 하고 싶은 일을 계속하는 이상적인 상황이 아니었을까' 하는 후회가 몰려오기도 한다.


이럴 때마다 내 마음을 다잡게 만드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A사의 주식차트였다. 꾸준히 오르고 있는 A사의 주가 덕분에, 입사와 동시에 부여받은 내 주식 자산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있었다. 그래, 이걸로 위안을 삼자. I사에 계속 있었으면 택도 없는 숫자였잖아.




'후회'는 살다 보면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심리 현상이다. 어떤 행동을 했을 때 (또는 하지 않았을 때) 그 결과가 예상과 다를 경우 '하지 말걸(해보기나 할걸)'이라는 마음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젊은 날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걸, 그녀에게 고백이나 해볼 걸, 이 주식을 그때 살 걸(팔 걸), 이 집을 사지 말걸 (미국에서는 이를 Buyer's Remorse라 한다). 미국에서 Quitter's Remorse라 부르는 이직 후회도 그중 하나인 것이다. 


연봉, 갈등, 적성, 커리어, 복지, 워라밸 등의 이유로 이직을 감행했지만, 새로운 회사가 기대한 것과 다르다면 이들에게 현타가 온다. 그 허탈함은 이직을 위해 쏟아부은 에너지만큼이나 강렬하다. 심지어 '옛날이 나았어...'라며 전 직장을 그리워하기도 한다. 이전 직장의 장점이 자꾸 눈에 밟힌다. 


이직자들은 어떤 이유로 후회를 하는 걸까. 잡코리아가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지난달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이직 후 결국 그 회사가 그 회사라는 걸 느꼈을 때 (37.8%)'와 '이직 후 급여, 직급 등의 처우가 직전보다 오히려 나빠졌을 때 (33.5%)', '이직한 회사의 워라밸, 업무강도가 너무 극심할 때 (24.8%)의 순으로 후회한다고 한다 [1].


미국은 사정이 더 심하다. 코로나 이후 2021년 4월 경부터 많은 이들이 이직을 시도하는 '대퇴사 (Great Resignation)' 시대가 도래했다. 그런데 당시의 선택을 뒤늦게 후회하는 이들이 최근 급증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의 구직 사이트인 Joblist에서 지난 2월에 실시했던 설문조사에 따르면, 무려 42%의 이직자가 이직을 후회하고 있다고 한다 [2]. 


후회의 감정이 몰아칠 때 억지로 일해야 하는 것만큼 고역은 없다. 그렇다면 마음을 다스려야 할까? 우선 이직 당시의 이유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볼 필요가 있다. 더 많은 연봉을 받기 위해서, 인간관계에 문제가 있어서, 워라밸이 중요해서, 경력 향상을 위해서 등 각자만의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곰곰이 생각해 보자. 내 이직 후회가 1) 이직의 이유는 충족되었지만, 생각지 못한 새로운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2) 새 직장에서도 여전히 애초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인지


1)의 경우라면 잠시 시간을 두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최소한 이직의 이유는 충족되었다. 새로운 문제 때문에 후회를 하게 된 경우인데, 100% 만족하는 회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돈도 많이 주면서 일은 널널한 꿈의 직장 따위는 없다). 


그렇다면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들을 우선순위에 따라 다시 한번 나열해 보자. 그리고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요인을 포기할 수 있는지, 후회를 불러일으켰던 새로운 문제들을 감당할 수 있는지 잘 따져봐야 한다. 


예를 들어 경력 향상을 위해 이직했고, 새 일이 도전적이라 마음에 들었는데 워라밸이 너무 안 좋다고 해보자. 커리어 향상을 위해 워라밸 희생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연봉이 적어서 이직했는데 새 직장에 나를 괴롭히는 빌런이 있다면, 파격적으로 오른 연봉이 빌런을 상대할 마음고생을 상쇄시켜 주는가? 


새 직장에서 직면한 문제가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수 있는지, 내 통제권 안에 있는 변수인지도 생각해 볼 문제다. 회사마다, 업종마다 바쁜 시기가 있기 때문에 워라밸은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다. 사람과의 관계는 개인의 성향에 따라 개선의 여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내 노력과 상관없이 제어가 불가능하다면, 그리고 그것이 이미 충족된 이직의 이유를 불식시킨다면 또다시 이직을 심각하게 고려해 봐야 한다. 


2)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애초 기대한 이직의 이유조차 충족되지 않았다면 '결국 그 회사가 그 회사'라는 생각에 더 견디기 힘들 것이다. 이때 또 다른 이직이 선택지가 될 수 있다. 다만 짧은 시간에 잦은 이직은 결코 커리어에 유리하지 않다. 고용 유연성이 높은 미국 조차도 한 회사에서 최소 2년은 근무하는 것이 일반화되어 있다 (통상 입사 후 2년 내에 또 이직을 하면 입사 시 받은 사이닝 보너스를 모두 토해내야 한다). 


이직에 대한 후회는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직 후 후회하지 않는 경우가 더 적을지 모른다. 사람은 본래 장점보다 단점을 더 눈에 새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만일 당신이 이전 직장에 계속 남았다면 더 후회했을 것이다. 이직 생각은 굴뚝같지만 때를 놓쳤거나, 딱히 갈 수 있는 곳이 없다는 이유로, 개선될 여지없는 현재의 문제를 끌어안고 살고 있다면 반드시 후회하는 날이 온다. 


그래서 비록 후회할지언정 할 수만 있다면 이직을 하고 후회하는 것이 낫다. 새 직장에서 맞게 되는 그 후회가 기회가 되는 것은 당신이 하기 나름일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시도조차 하지 않으면 그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이직 후 후회가 심각하다면, 적당한 시기에 또 다른 기회를 찾아 나서는 것도 방법이다. 중요한 것은 행동을 취한 뒤 찾아오는 후회보다, 하지 않고 뒤늦게 찾아오는 후회가 상실감이 더 크다는 것이다.




I사에 대한 미련은 다시 접어두기로 했다. 지금 돌아간다 해도 내가 알던 I사가 아닐지 모른다. 올초 그곳에 레이오프가 한차례 몰아친 뒤, 조직은 개편되었고 많은 이들이 회사를 떠났다. 남겨진 일들은 남은 이들의 몫이 되었다. 남은 이들에게 워라밸은 이전보다 더 안 좋아졌을 것이다. 내게 남은 선택지는 현직장에서 커리어를 더 강화해서 새로운 도전의 기회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것이 또 다른 후회를 불러올지라도 말이다.



- 예나빠



표지 이미지 출처: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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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s://www.jobkorea.co.kr/goodjob/Tip/View?News_No=22060&schCtgr=0&Page=1

[2] https://financebuzz.com/job-quitting-regr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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