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 에드바르 뭉크
아내가 둘째 아들을 출산하게 되면서, 우리 부부가 가장 크게 신경 쓴 부분은 첫째 딸의 반응이었다. 듣기론 첫째가 처음으로 동생을 맞을 때 받는 스트레스가 상당하다고 한다. 그래서, 둘째를 갖게 되면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첫째의 마음이라고 한다. 그동안 부모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했고 그 사랑은 한치의 의심 없이 앞으로도 영원할 것이라 믿었건만, 이 믿음에 균열을 일으키는 새로운 존재의 출현이 아직 이성이 발달하지 못한 이 아이에게 줄 정신적 붕괴는 상상 이상이라는 것이다.
남편이 어느 날 아내에게 모르는 여자를 한 명 소개하며, "우리와 함께 살 여자니 앞으로 둘이 잘 지내"라고 한다면 아내는 어이없을 것이다. 병원을 퇴원한 엄마가 둘째를 안고 처음으로 집에 들어올 때, 첫째가 받는 심리적 타격은 이 정도라고 한다. 누군가에게 들은 우스갯소리였지만, 정신적 충격이 그 정도라니 이것은 농담 수준이 아니다.
우리 부부는 그래서 가능한 일찍부터 첫째 아이에게 동생의 존재를 알려주려 노력했다. 엄마의 불러오는 배를 보면서 몇 달 뒤면 동생을 만날 것이라고 자주 말해주고, 출산 후에는 첫째를 직접 병원에 데려가 신생아였던 동생을 만나게도 해 주었다. 상황을 잘 설명해주며 동생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말이다.
적어도 이러한 노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아내가 퇴원 후 둘째와 함께 집에 온 뒤에도 첫째 아이는 새로운 가족과 잘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심지어 동생을 안아주고 이뻐해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첫째는 이제 27개월 밖에 안된 아이였다. 아이에게 이러한 상황을 다스릴 성숙함을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첫째는 조금씩 다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에 대한 집착이 늘어갔다. 엄마품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딸아이를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안아달라고, 안아달라고 전보다 더 많이 보채기 시작했다. 한순간도 발을 땅에 데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끊임없이 울었다. 산후조리도 끝나지 않은 엄마는 딸의 스트레스를 받아주고 마음도 어루만지느라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극에 달했다. 아빠품엔 관심 없는 딸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란 그저 가사를 도와주는 것뿐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급기야 딸아이는 퇴행 행동을 보이기 시작했다. 첫째가 썼던 침대, 요람, 의자, 유모차를 둘째를 위해 다시 꺼내자, 첫째는 갑자기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리고, 본인이 지금 당장 쓰겠다고 떼를 썼다. 둘째를 요람에 뉘이려면 자신도 눕겠다고 고집 피우고, 신생아 유모차에 타겠다고 또 고집 피웠다. 심지어 진작에 졸업한 인공 젖꼭지도 다시 물기 시작했다.
첫째는 둘째를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다투어야 할 연적’으로 생각했다. 퇴행 행동은 둘째와 엄마와의 삼각관계에서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리고 오늘도 이러한 삼각관계는 현재 진행형이다.
연적을 두고 질투를 불사르는 딸아이를 보며 이 그림 속 남자가 생각났다. 이 창백한 남자의 얼굴을 보라. 초점을 잃은 듯한 눈동자와 굳게 다문 입술, 움푹 파인 볼로 광대뼈가 드러나 보이는 이 남자의 표정은 무척이나 불안해 보인다.
그 이유는 뒷 배경의 두 남녀와 무관하지 않다. 선홍빛 드레스를 입은 관능적 여인과 그녀에게 열정의 빨간 꽃을 바치며 사랑을 속삭이는 남자. 공교롭게도 두 남녀가 서 있는 곳은 선악과가 생각나는 붉은 사과나무 아래다. 그래서인지 왠지 온전한 사랑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커플의 사랑을 바라보며 나무에 숨어서 분노심을 드러내고 있는 이 남성의 지질함도 보는 이로 하여금 혀를 차게 만든다.
이 그림은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거장인 에드바르 뭉크가 그린 <질투>라는 작품이다. 뭉크는 이 그림 속 관능적 여인, 당니 유엘(Dagny Juel)을 한때 진심으로 사랑했다. 아니, 비단 뭉크뿐 아니라 당시 그림, 건축, 문학을 한다는 예술가들은 그녀를 모두 흠모했다. 그러나 유엘은 뭉크의 절친이었던 스타니스와프 프시비셰프스키(Stanisław Przybyszewski)와 결혼해버리고 뭉크를 비롯한 뭇 남성들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다.
둘의 결혼후 2년 뒤 이 그림이 세상에 나온다. 이 그림 속 질투의 화신은 뭉크 자신인지, 뭉크의 친구인지 의견이 분분한데 바로 뭉크의 친구인 프시비셰프스키라는 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유엘과 사랑을 속삭이는 남자는 바로 뭉크 본인이다 [1][3].
자신의 친구가 자신과 유엘에게 배신당하고 질투를 폭발시키는 불행한 상황이 되기를 뭉크는 바랬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에서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작품 속에라도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이 변변찮은 감정을 적나라하게 새겨 넣은 것이다. 하지만, 그림 속 남자는 프시비셰프스키가 아니라 정작 이 그림을 그린 뭉크가 아닐까 생각한다. 질투의 화신은 다름아닌 본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저리 실감 난 질투의 표정을 표현할 수 있었을까.
뭉크의 작품들이 샌프란시스코에 왔을 때 작품전에 들린 적이 있다. 여러 작품을 통해 관통하는 그의 사랑, 불안감, 절망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고스란히 알게 해 주었다. 노르웨이의 핏빛 하늘 아래에서 <절규>하는 누군가를 화폭에 담은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유년기의 불행한 가족사, 이뤄지지 못한 사랑, 이별, 배신. 순탄치 못했던 그의 인생이 고스란히 그의 작품 곳곳에 투영된 것이었다.
뭉크의 이 그림은 동생에게 느끼는 첫째 아이의 질투에 적절치 못할 비유일지 모르겠다. 결과적으로 둘째를 동생으로써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해피엔딩이 될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당시 딸아이를 힘들게 했던 불안과 스트레스는 뭉크가 느꼈을 자괴감에 못지않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딸아이의 마음을 잘 살펴준 아이 엄마와 이를 슬기롭게 잘 이겨내고 있는 딸아이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첫째와 둘째 아이가 부디 건강하게 잘 자라주길 바랄 뿐. 오늘도 서로가 서로에게 으르렁대는 육아현장에서 말이다.
- 예나빠
참고문헌
[1] "Jealousy" by Edvard Munch, Alex Faura, 2011, http://betrayalart.blogspot.com/2011/05/jealousy-by-edvard-munch.html
[2] 에드바르 뭉크를 통해 본 질투라는 지옥, 손한석, 2016, https://hssn2710.blog.me/220608280403
[3] "질투", 피터 투이, 니케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