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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백검 Mar 15. 2023

재미있는 연변말 4탄-오솝소리

앞에서 제법 쎈 연변말 들을 위주로 글을 쓰다 보니 연변말을 처음 접해보는 사람들한테 연변말에 대한 편견이 생길 수도 있다고 판단되어  이번에는 조용한 단어를 선택하여 글을 써본다.


오솝소리는 함경도와 연변에서 많이 쓰는 단어로 "조용히"의 방언으로 알려져 있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오솝소리는 오솝+소리의 조합으로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오솝은 "오솔"에서 소리는 접미사"스레"에서 변화해 온 것으로 추정됨.


네이버 어학사전을 검색하면

오솔하다: 사방이 무서울 만큼 고요하고 쓸쓸하다.

스레: 접미사로 일부 어근 뒤에 붙어 "그러한 성질이나 느낌이 있는 상태로"의 뜻을 더하여 부사를 만드는 말.


"오솝소리"를 보면 말보다도 얼굴이 떠오른다. 곧 우리 부모님 세대 그리고 조부모님 세대다. 조부모님은 일제식민지시기 조선반도에서 태여 나서 후에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 이곳에 정착하셨다.  나라를 잃은 슬픔에 잠기기도 전에 함께 온 대가족의 의식주를 해결하셔야 했기에 엄청 부지런히 일해야 만 했다.


참고로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 두 분 다 집안의 장자이시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명절날이나 집안 어르신들의 생신이나 제삿날이면 온 집안 식구들이 바글바글하게 모였던 기억이 난다.  할아버지는 한자도 많이 알고 계셨고 글도 잘 쓸 정도로 유식하였으나 그 아래 많은 집안 동생들 그리고 자식들을 위해서 자아희생적으로 배움을 포기하고 농사에만 전념하셨다.


그 덕분에 동생들 중 대학생도 두 분인가 나왔다.  한 분은 해방 전 경성제국대학을 다녔다고 들었고 다른 한분은 해방 후 무한에서 대학을 다니셨다. 경성제국대학을 다니셨던 분은 아쉽게도 해방 후 그 시대 외국유학을 했던 분들이 그러하듯이 상당한 고초를 겪으셨고 결국 평범하게 살으셨다는......


여하튼 이러저러한 이유로 오솝소리 살다 저 세상 가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다.


아버지도 장자이셨지만 할아버지와는 많이 다른 삶을 살았다. 1949년에 태어나셔서 어찌 보면 공화국 세대이시다. 갈팡질팡하는 개구쟁이시절을 신생공화국와 함께 하셨으니 그 고충은 미리 짐작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로 인한 각종 투쟁과 충돌이 끝낼 틈이 없었으니, 소년기를 보낼 어린 나이에  625 전쟁과 3년 곤난시기를 거치면서 나무껍질도 벗겨 먹는 그 험난한 시기를 보냈고, 그것이 또 가시기 전인 청년시기에 10년 문화 대혁명을 겪으셨다.

배고픔과 사상투쟁의 연속된 반복 속에서, 아버지는 순전한 묵묵함보다도 묵묵함속에서 모험을 즐기셨다.

후에 우리가 철이 들었을 때, 우리 앞에서 그 시대의 비참함과 간고함을 얘기할 때 항상 눈물 글썽이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라서 "모험"이란 단어를 쓰기에 망설여지지만 말이다.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 중에 그 시절과 맞물려 가장 자주 하던 말씀이 생각난다. "신분이 부농만 아니었더라면......"  증조부님 그리고 조부님 세대가 두만강을 건너와 터를 열심히 일구고 마을의 기초를 닦아 놓은 터에 상대적으로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생활을 즐길 수 있었던 탓에 부농으로 판정되어 성장하는데 많은 애로사항들이 있었다고 한다.


시대의 제한 때문에 그리고 신분 때문에 많이 힘들어지셨으니 오솝소리 지내셨을 뻔도 했지만은 항상 굶고 있을 가족 성원들을 생각하면서, 안정보다는 좀 힘든 그리고 일정한 리스크가 있는 일들을 선택하셨다. 덕분에 소학교 다닐 때 만원호(万元户, 개혁개방초기 구차하던 시절 년수입이 만 위안 이상인 가정, 참고로 1위안이면 냉면 10 그룻 정도를 살 수 있었던 듯. )라는 얘기도 들었었다.


오솝소리한 삶 속에서 가끔 돌파를 시도하셨지만, 자식들한테는 안정적인 삶을 추천하셨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철밥통이라는 공무원 길을 선택하기를 기대하셨고 실제 귀 아프게 말씀하셨다.


하지만 어찌하겠는가

"뜻대로 안 되는 것이 자식농사" 란 말이 있듯이 일찍 대학 2학년 때부터 끝이 보이는 공무원길을 포기한 나인데 말이다. 그리고 아버지 세대보다 더욱 오솝소리한 삶을 싫어하는 나였으니  말이다. 오직 자기의 귀와 눈을 그리고 자기의 판단만을 믿는 그 한 성깔 하는 고집 때문에 결국 부모님의 의사를 어기고 말았다.


지금은 그 벌을 받고 있는 것일까?

천방지축으로 나갈 조짐이 보이는 딸내미를 바라보면서 "오솝소리"란 단어가 이젠 점점 더 멀어지고 있고나 생각 든다.


물론 또 그래야 할 것이다. 이미 굳혀진 표준답안보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답안을 자기 절로 풀고 찾아가는 것, 이것이 그들의 인생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길쭉한 자주색 가지만을 먹고 살아왔지만, 후에 오색찬란한 가지 그리고 모양도 다양한 가지를 보고 놀랐던 것처럼 항상 오픈된 마인드로 자기만의 인생을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한번 살고 죽는 인생, 한번 제대로 살아보기를 항상 옆에서 응원해 주고 싶다.


물론 생각과 현실차이에는 언제나 괴리감이 있을 수 있다. 마치 요 며칠 학교 정문에서 딸내미 기다릴 때 학부모들은 연변말, 대문을 나오는 애들은 대부분 한어로 얘기나누는 것을 보고 이것이 연변인지 관내인지 그리고 또 여기가 조선족 학교인지 한족 학교인지 헛갈릴 정도로 말이다.

그래보니 세상일도 가끔은 자식농사처럼 뜻대로 되지 않은 듯하다.


이상, 재미있는 연변말 4탄 오솝소리입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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