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Pandabadger Nov 09. 2020

자립하는 퇴사준비 2
칭찬하는 일

실패 없는 프리랜서가 되기 위해 회사에서 챙겨 나온 것들 2


인사평가서와 인사반성문 사이


여러 회사를 거쳤지만, 스스로 서면 인사평가를 작성해야 하는 회사는 처음이었다. 연말에 인사팀에서 인사평가와 관련된 서류 몇 개가 첨부된 메일을 보내왔는데, 빈칸만 덩그러니 있는 서류를 받고 당황했던 기억이 난다. 그 빈 공간에 자기가 했던 일을 스스로 평가하고 반성하는 내용을 어떻게 채워 넣어야 하는지 몰라 머리를 쥐어짰다. 하루하루를 열심히 일했다고 생각했는데 적을 만한 내용은 왜 생각나지 않을까? 억지로 몇 줄을 채워 넣는 것을 끝으로 적을 만한 내용은 금방 동이 났다. 서너 줄 밖에 되지 않는 글 때문인지 인사평가서는 빈 종이 일 때보다 더 휑해 보였다. 내가 잘한 일을 몇 자 더 적어야 할 것만 같은데, 내 자랑만 줄줄이 늘어놓는 것처럼 여겨질까 눈치가 보였다. 그렇다고 몇 줄짜리 글을 그냥 내려니, 글 속의 나는 너무 무능한 직원 같아 보였다. 


고민을 하다가 그동안 친해진 동갑내기 선배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선배는 몇 줄 없는 나의 인사평가서를 금방 읽고는 “다 틀렸네! 인사평가서를 인사반성문으로 만들어놨네. 이렇게 부정적으로 적으면 안 되지. 무조건 잘한 일을 적어야지, 이리 줘봐” 하고 말했다. 그녀는 아예 내 인사평가서를 가져가서는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빽빽하게 채워진 서류를 내 메일로 돌려보냈다. 그녀는 내 인사평가서를 돌려주면서 너무 겸손하면 회사에서는  좋게 보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작성한 것보다 더 과장되게 적어도 괜찮다고 했다. 웹 디자이너로서 당연히 했던 일이기도 했거니와 숫자나 통계로 나타낼만한 구체적인 성과가 없었던 까닭에 적어내지 않았던 그간의 업무들이 참 꼼꼼하게 적혀있었다. 선배가 적어준 것들 중에 심하게 과장된 내용은 없었고, 오히려 그녀가 나보다 내 일을 더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손볼 것도 없이 나는 그녀가 써준 것을 그대로 제출했다. 이 일이 있고서야 나는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고 있었을 뿐이지 생각보다 더 많은 일을 하고 많은 성과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연차를 거듭하면서 인사평가서를 손수 가득 채워 써내는 데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었다. 다만 스스로 써낸 인사 평가서가 인사고과 반영의 참고 자료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는 연말에 으레 하는 서류 작업 중 하나로 보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었다.



적고보니 굶어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별 감정 없이 상투적으로 써내려가던 인사 평가서가 이전과는 다르게 보인 것은 퇴사에 대한 결정을 굳히면서부터였다. 회사는 내가 계획한 퇴사 일정과는 상관없이 연말 즈음에 텅 빈 인사평가서를 보내왔다. 퇴사 예정자에게 인사평가서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귀찮은 일밖에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습관처럼 성과에 대해 잔뜩 부풀려서 인사평가서를 적어내려 갔다.  심지어 적은 내용을 검수까지 했다. 엄청난 성과를 내고 있는 것처럼 적혀있어서 피식 웃음이 났지만, 글 속의 내가 지난 한 해 동안 회사를 위해 했던 노력들은 과장이 아니었다. 연차가 쌓이면 주어진 일만 하게 된다지만, 인사평가서를 읽어보니 나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업무를 만들어서 한적도 꽤 많기도 했고, 맡았던 일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책임감을 가지고 해내기도 했다. 그동안에는 회사를 나가면 굶어 죽지는 않을까 고민했었는데 한편으로 나는 먹고살만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좀 과장된 글이긴 했지만 나를 꽤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아 보이게 만들어서 이전에 하던 걱정들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일처럼 칭찬하기


퇴사 이후의 나를 위해서도 성과를 잔뜩 부풀려서 종이를 채워보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스스로를 칭찬하는데 능숙하지 못해서 스스로에게 다른 사람에게는 감히 하지 못할 원망 섞인 말들을 자주 했다. 그래서 한동안 일러스트레이터가 될 준비를 하며, 그림을 팔지 못하는 그림쟁이로만 지내야 할 때, 내가 얼마나 작아질지, 그리고 스스로를 얼마나 몰아붙일지는 겪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혼자 모든 일을 해내려면, 나를 다그치기도 해야 하지만 나를 칭찬할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이전까진 상사를 위해 썼지만 이제는 오로지 내가 나를 뿌듯하게 생각하기 위해서 1년에 한 번쯤은 종이 가득 나에 대한 장점과 내가 이루어낸 성과에 대해 써야겠다고 결심했다. 


프리랜서 선언을 하고 8개월이 넘어가고 있는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1년에 한 번 나를 칭찬하는 일의 횟수를 늘리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루하루를 알차게 보내고 있지만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내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새삼 깨닫곤 한다. 스스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칭찬하는 일은 프리랜서에게는 필수적인 것 같다.

작가의 이전글 자립하는 퇴사 준비 1 나의 든든한 리차드 파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