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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여행과 임신테스트

임신을 깨달은 순간의 이야기

by 로란


7월의 어느 토요일에

친구와 강릉 여행을 떠나기로 하고

푹푹 찌는 서울의 평일을 버티던 중이었다.


몇 해 전만 하더라도 시간만 내면

일본이든 강릉이든 훌쩍 떠날 수 있던 우리였지만,

이제는 단 하루만 빼려고 해도

놀러 갈 날짜를 맞추는 게 쉽지가 않다.


나는 결혼을 해서 주말에

크고 작은 할 일들이 가득하고

친구 또한 한 회사의 팀장이 되며

주말 출근 하랴, 야근을 하랴, 책임이 커져서 그렇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친구와의 가벼운 여행이라는 게,

삶의 우선순위에서 멀어진다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런데 그렇게 어렵게 여행 일정을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에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아랫배가 무거운 느낌이 들더니

순간순간 찌릿찌릿한 감각이 돌았다.


아이폰의 건강앱을 보고 상황 파악이 됐다.

여행 날이랑 생리 예정일이 딱 겹칠 줄이야.


얼마 만에 떠나는 강릉이냐며,

성수기에 KTX 티켓을 구해서 운이 좋다며,

그토록 호들갑을 떠는 동안에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전개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조금은 불편해도 노는 데에는 지장 없으니까.

대신 부디 하루만 늦게 생리가 시작되길 바라며

하루하루 여행을 기다렸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날수록

새롭게 찜찜한 마음이 피어났다.


불현듯 이게 생리 때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생리통을 겪게 되면

대부분 그와 동시에 생리가 시작되는 편이다.


생리 전증후군 성격의 통증은

살면서 크게 있었던 적이 드물다.

어쩌다 있다고 해도 하루 정도 아프고 말지

이렇게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생리를 처음 겪은 지도 15년이 넘은 인생인데

내 몸의 패턴을 내가 모를 리 없지 않겠나.


그런데 여행을 가기 바로 전날까지

무려 사흘 째 생리통을 느끼고 있으니

찜찜한 마음이 계속되는 거다.


약간의 스트레스를 느끼던 나는,

퇴근길에 용기를 내 다이소로 향했다.


그런데 세상에.

정말이잖아?


의심 없이 두 줄이 선명했다.


아니 왜 임신의 실패와 임신의 성공은

증상이 이토록 비슷하단 말인가.


실감이 나질 않았다.


물론 너무나 감사하고 기뻤다.

하지만 솔직히 처음엔 어리둥절했고,

잠시 뒤 설레는 마음이 차오르다가

또 이내 당황스러워졌다.


자리를 털고 일단 여행 가방을 찾으러 갔다.


당장 내일 강릉에 가기는 가야 하니

가방에 수영복과 스노클링 마스크부터

챙기기로 했다.


그러는 사이 나의 아이폰 속 Chat GPT 앱에는

’ 임산부 바다 수영 가능‘ 단문 아래로,

아주 담백한 답변들이 길게 달리고 있었다.


처음엔 이 상태로 바다에 가도 괜찮은지

진지하게 고민도 해보았는데,

바다 여행도 일상생활과 다를 것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음날, 나는 KTX에 앉아

설레면서도 얼떨떨한 마음을 안고

새파란 하늘 아래 초록빛 산등성이를 쉼 없이 달렸다.


그날 아침에도 일찍이 임신 테스트기로

선명한 두 줄을 한 번 더 확인한 참이었다.


빠르게 달라지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면서,

인생이 180도 달라지는 문턱에 들어선 것을 느낀다.


이 고속 열차가 다다르게 될 그곳에

얼마나 황홀한 여정이 기다리고 있을까?


그러고 보니 친구와 여름에 강릉으로 놀러 가는 게

이번으로 꼭 세 번째였다.

하지만 화이트 와인이 없는 여행으로는

아마 첫 번째 여행으로 기록될 테지.



사실 같이 여행을 간 친구와는 종종 여행을 다녔다.


처음 알고 지낼 때는 벌써 내가 27살이고

그녀가 29살일 적이었으니

그때도 벌써 이제는 내 인생에서 대단한 젊음이

다 지나갔다고 없다고 생각할 무렵이었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둘 다 여행과 수영을 좋아해

틈틈이 강릉이나 제주, 일본을 종종 오갔고

특히 둘이 여행할 때 만들어지는

특유의 활기와 털털한 낭만주의 덕분에,

무려 30대 중반이 되도록,

용케도 청춘을 연장해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날 볼륨감이 드러나는 하얀색 슬림핏 티셔츠와

화이트 부츠컷 팬츠를 입고 있던 친구는,

전날 밤에 비키니를 두 개 세 개 입어 봤지만

살이 쪄서 뭐 하나 입을 게 없다고 재잘거리며

조용한 열차의 낮은 소음을 책임졌다.


이런 강릉 여행도

이제는 정말 마지막일 수도 있겠구나.


summer_art.jpg


기차가 강릉에 가까워질수록

나는 아주 빠른 속도로, 그리고 갑작스럽게,

나의 어떤 시절과 이별하고 있는 중인 듯했다.


이번 이별은 설레고, 감격스럽고,

또 그 끝에는 엄청나게 아름다운 만남이

예정되어 있다는 것도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 전의 내가 지나온 시간들도

눈부시게 아름다웠다는 것을 잊을 수 없다.


그러니 나는 이 이별 앞에서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뜨겁고 짧았던 여행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아이폰을 열어 이날의 사진들을 들여다봤다.


거기에는 시원한 수영복을 입고서,

뜨거운 태양 아래 까만 윤기를 뽐내는

나의 젊음이 있다.


어떤 사진은 이별도 만남도

참 소리 없이 기록한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잘 알던 나는

벌써 옛날이야기처럼 멀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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