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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임신을 알릴까 말까

임신으로 내가 멀어지는 것들

by 로란


회사는 임신 중의 여성 근로자에게

야근을 권유하거나 강요할 수 없다.


임신을 하고 나서

새롭게 알게 된 근로기준법 제74 조의 내용이다.


이번 주 초에 회사 인사팀에 임신 확인서를 제출하고

한 시간 채 지나지 않아 바로 이메일이

하나 날아왔었다.


이름하여 [임산부 단축 근무 가이드]라는

낯선 제목의 공지 메일이었다.


우리 회사는 근로기준법에 따라

임신한 여성 근로자가 임신 초기와

임신 후반기에 2시간 단축 근무가 가능하다는 내용과,

어떤 프로세스로 단축 근무를 신청하면

되는지에 대한 안내가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었다.


다행히 일찍이 팀장님께서는

나의 임신 소식을 알고 진심으로 기뻐해 주시고

몸이 안 좋으면 언제든 퇴근을 했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해주신 터라 마음이 아주 편안한 상태였다.


사실 나는 조기 유산이 발생하기 쉬운

임신기 12주 까지는 단축 근무를 신청해 놓고,

필요하면 평소와 같이 근무를 할 요량이었으므로

단축 근무 신청은 보험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다 인사팀에서 추가 인사 가이드를 발송했다.


[ HR팀 ] 임신 근로자

연장근무(야근) 불가 안내드립니다.


메일의 수신인은 이제 내가 아니라

팀장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거기에는 절대로 임산부에게 야근이 있는 업무 환경을

조성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 적혀있었고

임산부가 단축 근무 종료 시간 이후 야근 신청 시

부득이 반려하라는 내용이 덧붙여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무리 원하는 날이라 해도

나는 야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었다.


메일 본문은 우리 회사는 모성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회사라는 점을 볼드체로 강조했다.


“사용자는 임신 중의 여성 근로자에게

시간외근로를 하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라는

근로기준법 제74 조 [임산부의 보호] 제5항은


노란색 음영에 붉은 글씨로 표기되어 있는

야근을 시키는 팀장은 징계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경각심을 주고 있었다.


"와 이제 나는 야근도 안 하고

일찍 퇴근하겠구나!? 신난다"


이 메일을 읽고 내 마음이 과연 그랬을까?


나는 근로자로의 생명력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낙천적으로 바라볼 만큼

순진한 연차가 아니다.


패션 브랜드 마케팅팀이란 본래 업무 특성상

빠르게 변화하는 날씨나 트렌드,

그리고 경쟁사 활동에 기민하게 대응해야 한다.


사실상 우리에게 1,2시간쯤 야근이란,

상사의 눈치를 보느라 안 해도 되는 일을

붙들고 있는 시간이 아니라

정해진 기한에 따라 밀어닥친 일들을 해결해야 하는

중요한 문제 해결 시간인 경우도 많았다.


그래서 야근을 하지 못한다는 것은

누군가에게는 부당한 근로 문화와

악습의 굴레에서 구제받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무 현실을 고려하면,

몇 가지 중요한 프로젝트의 기획 과정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과도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인사팀 메일이 전달된 지

정말 3분도 되지 않은 시간에

팀장님은 나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과장님 업무를 조정해야 할 것 같아요.

광고 촬영 출장은 제외하겠습니다.”


야근 가능성이 있는 업무에서 제외하여

배려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팀장님은 나를 생각해 주셔서 하는 말씀인데,

이상하게 마냥 반갑지 않았다.

일과 내가 점점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그다음 날에는

팀장님이 이런 메시지를 보내셨다.


"지금부터 다른 직원들 인수인계에 들어가고

하반기에 한 명 더 뽑아야 할 것 같아요.

과장님이 3 사람 몫은 해주었으니

안 그러면 업무 공백이 크게 느껴질 겁니다."


나의 임신 소식과 함께

팀장님은 팀장님대로

나름의 생존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아니 팀장님, 저 3월까지는 다닐 건데요?"


하지만 지금은 너무 이르다.

벌써 나갈 사람처럼 여겨지고 싶지는 않다.


“출산 일주일 전까지 일하는 산모도 많아요, 팀장님!”


나의 왼쪽 대각선 앞에 앉은 팀장님의

모니터 앞에서 큰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그동안 이 회사에서

내가 잘 쌓아오고 있었고,

그래서 내게 더 많이 열려있던 기회들이 생각이 났다.


맹세코 그들을 해내기 위해

머리를 쥐어뜯었던 시간들과,

더 나은 기획안을 정리하고 싶어서

자정을 바라보며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느라

법인 카드 결제 내역이 한 달 동안

80만 원을 웃돌던 시간들은, 남들은 모르지만

나만 아는 몰입의 기쁨으로 넘쳐나는 시간이었다.


나 스스로 그렇게 일에

나를 투자하는 게 싫지 않았다.


해내고 나면 기회가 왔고,

기회가 오면 성장과 성취의

단맛을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그것들을

누군가에게 맡겨야 한다니.


'돌아오면 내가 그걸 돌려받을 수 있을까?'

'그때 우리 팀은 지금과 같을까?'


내가 없다는 이유로

같은 월급을 받고 내 몫까지 감당해야 할

동료들의 어려움을 헤아려 본다면,

나의 빈자리를 대신할 다른 직원이

뽑히는 것은 꼭 필요해 보인다.


그리고 인정해야 했다.

솔직히 임신 초기에 느끼고 있는,

나도 이기지 못할 육체적 피로와 두통 그리고

아랫배에서 느끼는 묵직한 불편감은

이미 평소와 다른 체력과 집중력을 만들고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나 내가 맨땅에 헤딩하듯

부딪치며 해결했던 수많은 일들을,

그 일의 시작과 개선에 참여하지 않았던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양보하려니

섭섭한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얼마 전 들었던 황당한 이야기도 생각이 났다.


어느 규모 있는 광고 회사에 다니던 지인이

카피라이터 직무를 하다가 6개월을 쉬고 돌아왔더니,

기존에 하던 일과는 영 상관이 없는

방송 영업 직무로 발령이 났다고 했다.


비슷한 일이 내게 일어나지 말란 법도 없었다.


비단 야근 금지 규정 때문에 하는

걱정들이 아니다.


임신산부라 체력이 좋지 못해서,

혹은 출산을 해서 자리를 비우는 것을 계기로,

나는 당분간 내가 사랑했던 일과 기회의

삶에서 멀어진다는 건 내가 대비해야 할 현실이었다.


한창 나처럼 사회생활로 바쁜

또래 친구들에게 이런 상황에

마음이 쓸쓸하다는 문자를 보냈다.


그 말에 친구 한 명이 답장을 보냈다.

"그런데 너가 단축 근무 신청한 거 아냐?"


업무량이 줄어드는 게 싫었으면, 임산부 단축 근무를

신청하지 말았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어찌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일터에서의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서

6개월 지나 배가 불러올 때까지

임신을 숨기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애초에 그게 전략적이었을까?


"단축 근무는 유산 위험 높은 12주까지 만 이야.

임신 확인한 이후로 겨우 두 달뿐인데!"


많은 여성들이 출산과 커리어 사이에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다.


출산과 육아를 선택하면 경쟁력이 줄어들고,

경쟁력을 지키면 출산과 육아를 포기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자기 자신을 몰아붙이거나

육아와 병행할 수 있는 다른 일들을 모색한다.


복잡한 마음을 안고 조기 퇴근을 했다.

집 앞에는 5시라는 아주 이른 시간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7시 30분 즈음의 기울어진 해와는 또 다른,

부드럽게 태양빛을 머금은 동네가 눈에 들어왔다.


시원한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고

머리 위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게 해 주었다.


서늘했던 마음이 산뜻한 바람을 만나

이제는 정말로 다른 시간을 다른 방법으로

걸어야 할 때라고 속삭여 주는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 그것은

회사나 팀장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믿어야 해낼 수 있는 일인 것 같았다.


내가 정말 대체 불가능한 사람이라면,

나는 내가 갖고 있던 권한과 기회를 모두

양보하고도 다시 내 것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잘 생각해 보자.


내가 지켜야 할 자리가 언제나 항상

회사가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정말 임신과 출산이 나의 성장을 가로막을까?


축하와 배려를 사양하는 전략이 아니라

축하와 배려도 유지하면서도

나의 사회적 성취도 유지하고 싶다.


그 둘을 다 해내는 것은 너무 어렵겠지만

해내고 나면 더 즐겁고 기쁜 일이 되어줄 것이다.


임신이 내 성장을 가로막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진짜 엄청난 성장이

내 앞에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단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알겠다.


단축 근무는 겨우 두 달 남짓.

그 이후는 정규 근무 시간으로 돌아간다.

주어진 근무 시간에 최선의 결과를 내볼 참이다.

나는 이미 그 방법에 대해서라면 자신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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