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팔이 아프다고 했다. 돌 지난 남자 조카를 매일 안아올리다보니 팔은 아프고도 남는다. 나는 조심하라고 했다. 엄마는 나더러 훈계조로 말하지 말라고 화를 냈다. 내가 무슨 훈계를 하냐고 물었다.
"어이구, 이러다 내가 아파 누으면 돈 든다고 혼내겠다."
"하, 팔 아파 누우면 내 탓인가."
"어이구, 팔 아픈 걸 누구 탓을 하나. 너는 그런 식으로 재수없게 말 하지마."
자기 아들 노모에게 맡겨두고 회사 다니는 동생탓을 하라고 맞받아칠 뻔 했다. 꾹꾹 눌러 참았다. 그나마 옹졸함을 들키지 않아야 내 마지막 자존심을 지키는 것 같았다.
동생은 직장을 자주 옮겼고, 좋은 능력에 비해 연봉을 좋게 받지는 못했다. 그 덕에 엄마 용돈은 늘 들쭉날쭉이었으나, 그것은 늘 용서가 되었다. 나는 내 벌이의 1/3이 용돈으로 준비되던 순간부터 용돈이 벌이의 1/6이 되어준 지금까지 상납(?)을 하루도 늦춘 적 없지만, 고맙다는 말을 들은 적은 없다. 일단 그것은 당연했다. 다만, 늘 좋은 싸움거리는 되어 준 것 같다.
언제였던가, 무심코 부업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하자 엄마는 발끈하셨다.
"왜 회사에서 벌잖아."
"돈은 늘 부족하지, 여유가 있으면 좋잖아."
"너는 나한테 돈 주는 게 그렇게 아깝냐?"
"무슨 소리야."
"나한테 달달이 주는 돈이 그렇게 아까워서 '돈돈돈돈' 그러냐고."
무슨 말을 해야할까 고민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이 지겨웠다. 주중에 조카 대신 키우느라 동생 집에 가서 지내시다 금요일에 돌아오는 엄마더러 이 기회에 동생 부부에게 용돈 좀 두둑히 받으라고 한 적은 있다. 다른 집 사정을 들으니 이모님 부르는데 '얼마 얼마'던데 그래도 24시간 옆에 붙어 봐주는 엄마더러 그간 없었던 용돈 준답시고 생색만 내기 좋게 돈 몇십으로 쥐어준다고 덜렁 받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애들한테 받을 필요 없다고 하셨다. 내가 곧 더 돈을 잘 벌면 그 때 많이 달라고 하셨다. 나는 이번 생에 돈을 더 벌기는 쉽지 않다고 대답하면서 가슴이 철렁 내려 앉았다. 나는 왜 계속 최선을 다해야하는가. 되묻고 싶었지만, 자존심상 참았다.
나는 뒤돌아서며 말했다.
"너무 오래있었네. 저녁 안 먹고 갈게."
지하철 역으로 30-40분정도 걸리는 곳으로 도망치듯 독립해 나와 살기로 마음 먹은 것은 몇년 전이다. 나는 멀쩡한 본가 놔두고 오피스텔로 도망치듯 독립했다. 이유는 엄마때문이었다. 스물한살, 아버지가 허망하게 돌아가시고, 복 많은 전업주부였던 엄마는 나름대로 고생하셨는데, 늘상 이렇게 주문을 외우셨다.
"나중에 돈 많이 벌어줘야된다."
그때는 정말 온 우주를 걸고 대단히 비장하게 맹세를 해가며 엄마를 안심시켰다. 나는 항상 엄마에게 최선이었다. 아침에 한 번, 점심에 한 번, 저녁에 한 번. 전화하고 돌아와서 애교를 떨다 잤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던가, 동생이 시집가고도 한참이 지나서까지, 나 혼자 엄마와 지내다보니 영원할 것 같던 '착한 딸 업무'에 관하여 파업을 선언하고 싶어졌다. 철부지 어린시절의 맹세는 마치 깊이를 알 수 없는 늪과 같이 끝도 없이 나를 지치게 했다. 회사 다녀오면 회사 이야기를 보고하고, 전화 오면 누가 전화왔는지를 보고하고, 주말이면 밥 먹고, 함께 산책하고, 시장가고, 청소하고, 동생 집에 안부를 묻고하는 것만이 내 인생이 되었다. 그 이외의 범위는 이례적이므로 보고가 선행되어야 했고, 후속 조치도 엄격했다. 회사에서 힘이 들면, 왜 힘이 드는지 소상히 알고 싶어하셨다. 소상하진 않아도 이야기를 시작한 적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하기에도 괴롭고, 들으시고 괴로워하시는 걸 보기도 괴로웠다. 집에 가는 것이 편하지 않았다. 집에 가는 것이 괴로웠다. 집이 나를 편하게 하지 못하고, 얼굴에는 점점 웃음이 사라졌다. 엄마는 그 찰나를 못 본척해주지 않으셨다.
"나랑 이야기하는 게 그렇게 재미 없나."
"항상 재미있을 수는 없잖아."
"내가 남편없다고 날 무시하나."
"내가 엄마를 왜 무시해."
"내가 웃기나."
"..."
이 대화의 근원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내게는 엄마의 소중한 딸이자, 아빠를 대신하는 듬직한 딸이자, 세상을 함께 헤쳐나갈 친구라는 멀티 롤이 요구되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역할은 참 지긋지긋했다. 나는 그 많은 역할에서 한 번도 어긋날 수가 없었다. 잘해봤자 본전이고 삐긋하는 순간, 욕지꺼리가 날아왔다. '멀티'한 착한 딸 노릇. 정말이지 한 치라도 벗어나기만 하면 저렇게 나를 쥐잡듯 잡는 엄마 덕분에 나는 정말 고독했다. 나에게만 바짝 날을 세우고 나를 빌미로 겪는 당신의 감정에만 충실했을 뿐, 내가 어떤 감정일지, 나는 어떤 기분일지 관심 없으셨다. 나는 중요하지 않으셨다. 나는 그저 엄마가 답에 정해둔대로 잘 해내야 하는 인생이었던 것이다.
쉰 살에도 이렇게 살 생각을 해봤다. 일흔 조금 넘은 엄마와 둘. 처연한 여자 둘, 가끔 들이닥치는 조카 정도가 생동적인 그림이 될 모양인 미래, 끔찍했다. 윤여정 선생님이 그러셨던가, 일흔이 다된 딸이랑 아흔이 다된 엄마랑 둘이 사는게 뭐 볼 거있냐시던 인터뷰. 갑자기 내 미래가 끔찍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윤 선생님처럼 두 노인이 서로를 의지하면 좋겠지만, 나는 불가능할 것 같다. 나는 그저 계속 엄마의 기분을 살피고, 행여나 내 행동이 '신랑 없다고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까지 챙겨가며 내 감정을 숨기며 살아야하는데, 계속 상처받을 것 같았다. 눈물이 뚝뚝 흘렀다. 그리고. 대학 내내 두 세번 갈아타며 굽이 굽이 돌아가는 통학길을 선택했던 나는, 그 길로 독립하겠다고 말했다. 엄마는 불같이 화를 냈다.
"니가 나를 버리려고 작정했구나."
"누가 누굴 버려."
"니가 나를 돌보는 거에서 도망가려고."
"지금 엄마는 누군가 돌보아야 하는 사람이 아니 잖아. 환갑 지난 사람을 누가 돌본다고 그래."
"그래, 정 떼고 도망가라."
세상 누구한테도 독한 말 안하면서, 나한테만 모든 독을 쏟아붇는 엄마를 두고 나는 나름 모질게 돌아섰다. 그래봤자, 지하철로 1시간도 안 걸리는 곳, 그리고 금요일이면 돌아가 숙제처럼 자고 나오는 주말 부부 생활을 할 것이지만, 나는 제 발로 용감한 척 뛰쳐나왔다. 나만의 감정에 충실하게 숨어도 되는 곳으로 내 몸을 피신했다. 혼자 있자,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평온해졌다. 주중에만 평온한 생활을 한지 거의 5년이 되어간다.
"니는 왜 동생이 사진 보내는데 반응이 없냐."
"예쁘다고 했잖아."
"자주 반응해줘야지. 얼마나 이쁘니."
실시간으로 올리는 조카 사진에 대해서 예쁘다는 반응이 적다는 코멘트가 밤 늦게 카톡으로 왔다.
그래. 나는 남들에게 해 줄 일은 많고, 누가 나를 위해주지는 않는 팔자구나. 마흔도 넘어가서 마흔하나가 된 요즘, 내 팔자에 대해서 받아들이려고 노력 중이다. 가열차게 노력은 하지만, 여기서 20년을 더 살아내는 바람에 내 머리가 반백이 되었을 때에도 내 옆에는 아무도 없을 생각을 하니 무섭고 두렵다. 엄마는 나라도 있어 이것 저것 나무라며 이것 저것 요청하고 이것 저것 적잖이 만족할 수 있었지만 나는 누가 있나. 이렇게 가족의 이름으로 해줄일만 많을 뿐, 내 인생을 위로받기는 어려운 팔자에게 20년을 더 살아낼 일은 생각만으로도 숨통이 조여지는 것 같다.
뼛 속까지 사무치는 고독을 씹어 먹지만, 결국 넷플릭스로 하루 하루를 때우는 주제에, 산 송장 되기는 두렵다. 그렇게 송장 되어가길 적극적으로 거부도 못하며 돌처럼 굳어 늙어져버릴 나. 외로움이 사무친다고 말하고 싶어도, 이 외로움은 그 외로움이 아니라고 설명할 에너지가 없다. 고독과 외로움의 종류가 이렇게 넓고 입체적일 줄은 몰랐다. 인생 참 어렵고 쓸쓸하며 별 볼일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