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밤

자유로워 행복해야만 하는 사람의 고민

by Nima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해야 하건만 뒤척이다 일어난 나는 결국 맥주를 사러 편의점에 갔다. 회사 갔다 퇴근하는 길, 자동으로 편의점에 들려 4캔 만원 맥주를 쟁여놓던 내 자신이 징그러워진 요즘, 오늘따라 한 캔만 사 뒀더니 이 사단이 벌어졌다. 요 며칠 부득부득 한 캔만 계산하던 나를 눈여겨 보던 사장님은 한 마디 하셨다.


"4캔 사는 게 싸다니까 그러네."


그렇지. 매일 같이 이렇게 마셔댈 것이 분명하다면, 한꺼번에 사놨어야했다, 진심으로.




"싱글 라이프를 즐겨. 다 너 부러워 하는데 너는 정작 왜 그래."


그러게.


남의 떡이 커보여서 그런가보다. 결혼한 사람들이 서로 새장 속에 갇힌 새 같다며 집에 가기 싫다고 울부짓는데도 불구하고, 남이 하니까, 남이 한 거라, 무턱대고 좋아보인 덕분에 결혼 생활을 부러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금요일마다 클럽에 다니며, 드라마나 TV 예능 프로처럼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집에 친구들을 초대해서 호스트 하면서, 몇 만원이면 애들 옷, 몇 십만원이면 애들 학원비, 이런 거 개의치 않으며 위스키며 와인이며 마셔대라고 쾌척하고, 잘 생긴 연하의 당돌한 대시 앞에서 못 이기는 척 무너져주는 누나 놀이도 하다가, 사랑도 쟁취하고 일도 성공하는 화려한 커리어우먼의 삶을 살아내어야 마땅한데, 그래서 남들 다 나를 부러워 하는데, 나는 줘도 못 먹고 이러고 궁상을 떨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이지 제발 그랬으면 좋겠다. 손사래치며, 별 거 아니라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5분마다 걸려오는 전화들 모두, 안달난 연하남들에다가 손 대는 일마다 성사되는 마이다스의 손이라는 소문에 고객사들이 앞다투어 먼저 제안하는 그런 삶이었으면 좋겠다. 푸하하. 현실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도 너는 하고 싶은대로 할 수 있잖아. 나도 집에 들어가기 싫은데, 안 들어가면 죽어."


퇴근 후 맥주한 잔 하는 것도 와이프한테 '인가' 절차를 밟아야 한다며 퇴근길 만원 버스에 올라타던 친구는 내가 아쉬워하자 이렇게 말했다. 그럴싸하다. 생각해보면 맞는 말이다. 이렇게 꼭두새벽에 편의점을 드나들며 맥주를 챙겨 올라가는 것도 아마 내 옆에 누워 내일을 위해 잠을 청할 분이 있었다면 어려운 일이겠지.


그럼, 나는 그 어려운 일을 이렇게 쉽게 하니 행복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그렇다. 혼자 벌고, 혼자 쓰고. 기껏해봤자 어머니께 매달 드리는 용돈, 때되면 조카에게 들이붓는 각종 이벤트비용을 빼면 나혼자 먹고 자고 하는데 쓰는 싱글레이디. 나는 자유롭다. 금전적으로도 자유롭지만, 나는 정신적으로도 자유로우려고 노력한다. 일주일에 한 번 본가에 가는 것 이외에는 가족 누구에게도 얼굴을 비추지 않으며, 육체적으로 감정적으로 매이지 않도록 노력하고 있다.


그럼, 나는 자유로운만큼 행복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결혼한 친구들의 말처럼 혼자의 삶을 즐기고 싶지만, 즐겁지 않다. 그들은 내게 결혼해 보니, 그게 꼭 해야 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내가 너라면, 반드시 결혼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리겠다. 연애는 하되 결혼은 안 해도 된다. 너는 자유로우니 얼마나 좋니. 이 집에 너 혼자 산다니 얼마나 좋니.' 이런 말을 들을 때면 나는 잘못한 일 없지만 반성하는 모양새를 갖추게 된다.


아. 나는 연애는 하되 결혼은 안해도 되는 자유가 있구나.

그런 자유가 있으니 나는 행복한가?

전혀 그렇지 않다.


나는 지금껏 내가 만난 남자들이 나를 떠나 결혼에 골인하는 모습들을 봐왔다.

내가 주지 못한 그 무엇을 준 여자들은 무엇을 가졌던가.


몹시도 궁금하다. 그들이 가진 알 수 없는 힘을 어렴풋이 짐작할 때마다 스스로 초라해지는 내 모습이 힘들다. 안간힘으로 버티며 못 본척 하고 있다. 잘 지내는 척, 아무것도 부럽지 않은 척, 아무도 없는 오피스텔에 돌아가는 길에 그 누구도 나를 찾는 이 없는 순간들이 켜켜이 쌓여도 나는 몹시도 무던한 척, 모든 것이 익숙해진 덕분인 척, 괜찮은 척 해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내가 아닌 다른 여자들이 왜 결국 그와 결혼했는지 궁금하다는 말을 입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나는 괜찮은데, 듣는 사람들이 신경쓰지 말라며 손사래치는 통에 끝까지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


너는 문제가 없어.

결혼은 타이밍이야.

다 짝이 있어 아직 안 나타난거다.


구석기 시대부터 존재했을법한 위로의 클리쉐들이 안부인사 날씨 이야기처럼 반복되자 나는 만사가 귀찮아졌다. 누군가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어마어마하게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다. 더군다나 그로부터 거부당하는 일은 요즘 말로 '오조 오억배' 더 힘든 일이다. 나는 그 모든 과정에 지쳤고, 상대가 바뀌어도 같은 결론을 받아들여야 하는 나를 감당하는 것도 지쳤다. 나는 그냥 지쳐버렸다. 행복하지 않다. 다들 쉽게 사는데, 다들 쉽게도 잘 사는데, 내 인생은 쉽지 않고, 즐겁지 않다. 생각이 이 따위로 흐르자, 내가 가진 것들이 고맙지 않고, 내 인생 의미 없다. 남들은 이런 나더러 자존감이 부족하다고 하고, 나는 그 자존감 한 번 세우려고 또다시 고3처럼 노력한다. 나는 도대체 언제쯤 더는 새로운 노력이 요구되지 않을 정도로 사는 것이 편안하고 익숙해질까.


외로운 상황도 익숙해질법도 한데, 나는 오래도록 이 사무치는 고독 속에서 유난히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내 외로움은 감당하기 어렵고, 나는 외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 혼자 내팽겨쳐진 것 같고, 내 생사를 궁금해 하는 이는 없다.

내가 이렇게 술 한잔에 잠을 청하다 영영 잠이 들게 되면 누가 내게 제일 먼저 전화하여 알아볼까.


그 생각이 들자 다시금, 시집 가서 안정적으로 살고 있는 친구들이 부럽다.

소속감.

안정감.

가족.

내 가족.

내 신랑.

내 새끼.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내 자식.


이 모든 것들이 자유로워서 행복해야 마땅한 내 인생에서 빠진 것들이다.

나는 여러가지의 결핍으로 인해 행복해야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견딜수 없이 외롭고, 그래서 너무 힘들다.




3년전, 나는 계단에서 굴러 입원한 적 있다. 그 때, 나는 내가 대단히 잘 못 살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호자 이름에 우리 엄마를 적는 순간부터, 그리고 면회 와서 옷 가지 등을 챙겨주는 사람이 늙은 우리 엄마라는 점이 새삼 와닿자,나는 내 인생이 별로 영양가 없는 인생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마흔. 집도 없고, 차도 없고, 남편도 없고, 아들도 없고, 아프면 여즉 늙은 노모가 보호자로 나타나 수발을 든다. 내 사회적 나이가 여즉 미성년자인가.


결혼이 선택이고, 비혼이 당당해졌다는데, 모아놓은 자산은 없으나, 매달 꽤 괜찮은 벌이가 있어서 마치 혼자 살기로 스스로 선택한 것처럼 뻔뻔하게 자기 합리화하고 요즘말로 정신승리(?)하면 좋은데, 그것이 내 안에 와 닿지 않는다. 같은 나이의 동기가 늦은 나이에 회사 생활을 시작하여 처음 얻은 회사 복지 콘서트 표를 얻기 위해 가족관계를 묻는 담당자더러 4인 가족이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우리 나이의 4인 가족이면 대개, 나, 남편, 애기들 둘이어야 하는데, 너는 너, 부모님, 나이 꽉찬 네 동생을 여즉 4인 가족이라고 말하다니 어색하지 않았냐고 물었다. 그녀가 분하다는 듯 파르르 떨면서, 왜 4인 가족의 정의가 그 딴식이냐고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 그렇게 살아야 한다. 기 죽기는 커녕 당당하게 내 자신을 어머니의 딸이라고, 아직 애기라고, 말 할 수 있는 멘탈이어야 한다. 나는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사는가. 당연히 여즉 내 보호자는 엄마이며, 엄마가 보호자로 드나드시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너는 도대체 보호자의 정의를 무엇으로 삼은 것인가. 그런 정의는 편견이며 맞서싸워야 할 적폐이다!!!! 할 수 있는 온갖 코스프레는 다 해봤지만, 또다시 의문이 피어올랐다.


결혼을 해서 다치면 정말 지금 보다 나을까.

그 때는 또 그 만의 고통이 있겠지.

일단 신랑이 신경쓰이고 애기가 있다면 애기가 걱정될 거고, 기타 등등의 걱정거리가 더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때의 고통과 지금의 내 고통은 결이 다르다. 나는 그냥 사막 한 가운데 홀로 떨어진 것처럼 고독으로 둘러싸여 있어 고통스럽다. 아무것도 없다. 환자복 입고 통증 주사를 맞지만 내가 믿을 것이라고는 실비보험의 커버력뿐, 그 누구도 나를 돌아보지 않는다.


텅빈 병실에 혼자 누워있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말이 있었다.

얼마전 친구가 갑자기 집에 가야한다며 전화로 내뱉은 말.


"집에 가야돼, 우리 와이프가 아파서 회사도 못 갔어."

"집에서... 너가 밥하고 그러는 거야?"

"그건 아닌데, 내가 나가 있을 수가 없지. 미안하다."


나는 아무도 없다.




어느 책에서 이런 구절을 읽었다.


'반려자마저 행복하게 해주지 못하는 사람이 국민의 행복을 담보로 정치가가 되고, 사원들의 목숨줄을 쥐고 경영에 나서다니, 이처럼 웃기는 상황이 또 있을까 싶다.'


반려자조차 없는 나는 이 부분을 오래도록 다시 읽었다.

나는 아무도 없다.

그리고 꽤나 오래 아무도 없을 것 같다.

와이프가 아파서 집에 가야 한다니, 이 무슨 판타지 세상인가.


그 책에는 이런 구절도 있었다.


남들만큼이란 개념은 매우 모호하며, 그 허용범위가 어디까지인지 기준이 없다고.

인간에게 최대의 거름이자 재산은 주어진 환경인데, 남들과 비슷한 정도의 생활은 해보고 싶다는 꿈을 꾸는 것은 이해되지만, 남들과 비슷한 역량의 부모 밑에서는 특별한 자극이 기대되지 않는다고 했다.


나는 부모님 탓을 할 생각은 없다.

다만, 남들만큼만 안정적이고 싶다.

그 말이 몹시도 모호할지라도 나는 남들만큼만 안정적이고 싶다.

소속되고 싶다.

매일 아침 남편의 출근과 내 출근을 동시에 관장하며 애들까지 정신 없이 챙기며 툴툴거리고 싶다.

시시 각각 너는 어디냐고 묻는 남편과 시시 각각 엄마 언제 오냐고 묻는 애들이 내 인생에 허락되면 좋겠다.


자유로워도 외롭고 싶지 않다.

외롭지 않고 싶다.

그 만큼만 남들처럼 살고 싶다.

이것은 허락되지 않을만큼 과도한 욕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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