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기 하나가 이를 갈고 서 있었다. 성적이 발표 난 날이라, 누구나 표정이 밝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도드라지게 화나 보였다. 눈에 띄는 사람마다 붙잡고 본인이 00에게 '설계'당했다며 울분을 삮이는 중이었다.
"무슨 소린데?"
"그 년(00)이 나한테 이 과목을 추천했었거든. 알고 보니, 지는 이 교수한테 엿 먹고 다른 교수한테 재수강하러갔어. 그래놓고 나를 보고는 이걸 꼭 들으라고 추천했어."
성에 안 차는 성적의 원인을 강의 수강 신청부터 거슬러올라가 되짚어보다니. 그녀의 어프로치는 참으로 참신했지만, 일견 이해가 가는 구석도 있었다. 둘 사이의 관계가 가지는 특수성 때문에.
요약하자면, 얌통머리 없는 친구의 조언을 빙자한 함정이 이 사람의 울화통을 치밀게 한 것이다. 본인이 먼저 '이 과목 괜찮니?' 라고 조언을 구했음이 명백하긴 하지만, 그 년(?)의 조언에는 독이 들어 있었고, 그것을 순진하게 덥썩 받아 결국 당했다는 이야기. 나는 동기가 가여워 웃지도 못했다.
사실, 이런 류의 조언, 그러니까 웃는 얼굴의 가면을 쓴 채, 당신을 엿먹이는 조언은 당신 주변에도 발에 채이고 널렸을 것이다. 물론, 나 역시 얼마전까지 그 직장 상사덕분에 유경험자이다.
겨울이 되어 'Deep'한 색상의 립스틱을 산 적 있는데, 주변에서는 반응들이 좋았다. 잘 어울린다는 말들이 이어지자, 그녀는 손수 립글로스를 하나 들고 와서 내 입에 바르기 시작했다. 이유는 내 입술이 '지나치게 건조해보여서.' 세상 호들갑 다 떨며 립글로스를 들이대는 것을 미처 말리지 못하니, 그녀는 결국 나를 삼겹살을 혼자 포식한 사람처럼 만들었다. 그 덕에 칭찬이 자자하던 내 'Deep'한 컬러는 볼품없이 흐려지게 되었다. 나는 그 뒤, 그 립스틱을 회사에 하고 가지 않았다.
한 번은 입 주변에 뾰루지가 난 것이 곪아 점점 커졌는데, 본인이 극구 짜주겠다는 것이었다. 저 정도 곪으면 흉진다면서. 나는 이미 그녀에게 진저리가 난 상태였던지라, 반복적으로 극구 사양했는데, 대단한 집녑으로 오래도록 손 대고 싶어하던 그녀가 마지막에 한 말이 유난히 오래 기억에 남는다.
'아, 저기 매직으로 콕 찍어야 재미 있는데.'
호의를 가장한, 그래서 더 응큼한 조언들은 내 인생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당신은 그 정도로 무방비하게 살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런 조언 필요없다.
대학원에 다니던 동안, 인턴 과정에서 알게 되었던 연하가 있었다. 그는 말수가 적고 얌전해 보였는데, 알고 보니 고등학교 후배였다. 이런 저런 에피소드 끝에 아무 이유없이 '밥이나 먹자, 영화나 보자' 부질없이 함께하던 시간이 무색하게 우린 결국 아무도 아닌 사이가 되었다. 서운하고 아쉬워 울적해하던 내게, 친구가 조언했다.
"걔 맥아리도 없어보이는 데 뭐가 그렇게 아깝니."
"맥아리 없어 보이는 것 뿐이지 내면이 단단한 사람이야. 매력 있었는데... 잘 해보고 싶었는데..."
"너 마음 충분히 이해해."
그녀는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내가 인턴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거랑, 너가 걔랑 헤어진 거랑 비슷한거야. 어차피 안 될 사람은 안 되는 거니까, 마음을 비워. 내려놓는거야."
"면접?"
"그래, 집착해도 소용없어. 난 정말 될 줄 알았거든, 그런데 아니면 아닌거야."
"그, 그래. 고마워."
나를 위한답시고 측은해하는 표정을 짓는 그녀에게 되묻지는 못했지만, 나는 계속 의문이 생겼다.
인턴 뽑는 최종 면접에서 떨어진 것과 좋아하는 남자와 '안녕'한 것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남자와 헤어진 뒤 아쉬워하는 이유는 그와 더 이상 교감할 수 없기 때문인데, 친구도 그 면접관과 교감이 깊었나. 공감봇이 되고려고 노력하던 그녀에게 잠시 오류가 난걸까. 아니지, 아니야. 집착하지 말라고 한 걸보니 꽤나 유사하게 생각하고 말한 것 같은데, 나만 이해를 못하는 걸까. 남자와의 이별에 관하여 보통의 친구들이 말하는 '다른 남자 만나'와 같은 조언과 너무 달랐던 그 조언은 참으로 오래도록 머리에 남았다. 아마 좋은 곳 인턴 면접 봤었다는 얘기가 하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고.
나를 위한다는 표정으로 사실 제 얘기만 늘어놓는 사람들이야 얼마든지 있다.
금리가 낮은 대출을 더 받네 마네 하던 중, 개인회생을 신청한 친구를 앞에 두고도, '이 빚은 회생신청하기에 금리가 낮아 영양가가 없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를 위해 회생신청의 가능성을 논했을까. 직장의 유부남 동료에게 마음이 흔들렸다는 취중 진담을 듣고, 그 동료의 와이프 쪽 변호사가 되어 사건을 수임하고 싶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를 위해 사건을 수임하고 싶을까.
공감인 듯 공감 아닌 공감같은 너.
모두의 인생에서 두 어번은 들었을 말들. 그것들은 사실 당신 인생에 있어 금과옥조가 아니다.
우리는 30년 넘는 시간을 살아온 방식 살아온 환경이 모두 다르니 살아갈 방법도 다를 수 밖에 없다. 각자가 다른 방법으로 살아내고 버텨야 하는 이 인생의 모든 조각들은 혼자 살아내기에 고통스럽지만 어쩔 수 없다. 당신더러 조언해주는 사람은, 당신이 왜 고통스러운지 사실 잘 모른다. 아니, 관심 없다. 그냥 그는 자기 이야기를 할 확률이 크다.
다만, 그 역시 진심으로 다른 이에게 '조언'해주고 싶었을 수는 있다. 지나가는 초딩들이 다 귀여워보이듯, 누군가는 본인이 겪은 일을 이야기해주면서 다른이에게 도움이 되고 싶을 수 있다. 그 마음은 진짜 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조언은 나한테 안 맞을 수도 있다.
내 살아온 방식대로 너희들도 참으며 살아라, '아프니까 청춘이다'라고 조언한다면, 조언자의 진의와는 달리, 그는 '꼰대'인 것이다. 그가 좋은 마음으로 조언했다는 사실 하나 때문에, 그가 꼰대같이 느껴지는데도 불구하고, 꼰대가 안꼰대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 꼰대에게 미안해하지 말길. 그는 그 정도로 당신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한 소리다.
여성 잡지에 '배운 여자, 인생 선배'의 조언이 붐이었던 무렵, '행복전도사'라는 이름의 조언자가 있었다. 그 옛날 '이대 나온 여자'였던 그 분은 '좋아하면 고백하세요!'와 같은 신여성 멘트로 조언하는 칼럼을 연재하셨는데, 자살했다. 행복을 전도하시던 분의 자살을 보고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떤 외국 배우가 그랬다.
테일러 스위프트(미국 가수)가 '여러분, 꿈을 좇으세요'라고 말했다고 그걸 조언으로 받아 들이지 마라.
그렇게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이 하는 조언은 나한테 안 맞다고.
조언에 굶주려, 이것 저것 찾아다니는 당신을 위로하고 싶다. 누구도 당신만큼 당신을 잘 알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