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검은 성모 마리아의 몬세라트

by Nima

우리는 몬세라트로 가는 기차를 타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준비했다. 여자친구로서의 첫 여행을 준비하는 길은 지금까지의 그 어떤 준비보다도 부산했다. 우선 온 하루를 바쳐 다녀와야 하는 길이기 때문이라 챙길 것이 많았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오빠와 두 번 잤다는 자칭 ‘ex-girl friend' 나 여사와 함께 다니게 될 거기 때문에 나는 여행 와서 최초로 ’여자‘로서의 행장에 엄청나게 신경이 쓰였다. 바쁘게 바르셀로나를 오면서 내가 제대로 챙긴 거라고는 선 블럭이 전부였는데.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달려 온 것인가. 몸만 오면 끝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짧은 생각을 마구 비난했다. 전전긍긍하던 어제, 오빠와 비상구호품을 사러 나선 쇼핑길이 떠오른다. 잠시 웃음이 번졌다.


“오빠, 나 쇼핑 좀 해야겠어.”

“뭐 필요해? 필요한 걸 말해봐.”

“음, 뭐 먹는 게 아니구.”

“뭔데? 뭐 사지마, 나한테 있는 거 써.”


음. 오빠한테 내가 필요로 하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은 비극의 시작일거야. 나는 쇼핑 중독, 워너비 패리스 힐튼같은 얼빠진 여자처럼 보이지 않게 하면서도 순순히 나와 함께 쇼핑몰을 누벼달라고 유혹할 수 있는 말이 뭐가 있을까 고민해보았다. 이마트에서 였던가. 생리대를 함께 고르는 어린 커플들을 보면서, 나 자신은 어디까지 과감해질 수 있는지 궁금한 적 있었다. 해본 사람이 잘한다. 나는 너무 연애를 쉬었다. 도대체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오빠는 정말 창고를 다 뒤져줄 것 같았다.


“편하게 말하라니까.”

“음, 여자한테 뭐가 필요한지 자꾸 묻지 말아 줄래? 나한테 필요한 건 이 집에 없는 게 더 많을 걸.”


그 말을 듣는 순간의 오빠의 얼굴이란. ‘사진기가 있어야 하는 순간’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오빠는 정말 사춘기 소년처럼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는 호들갑을 떨었다.


“아아아아아아, 미안. 나 진짜 미안해. 하하하하. 쇼핑가야겠구나. 그러면 나 같이 가면 안 되는 거지?”

“그건 아니야. 이제 쇼핑에 끌려 다녀줘야 하는 남자친구의 운명을 몸소 겪어 보아야지. 어때?”

“네네, 겪어보게 해 주세요.”


우리는 정말 신이 나서 온 바르셀로나를 돌아다녔다. 할 일을 쇼핑으로 정하자, 여행지 바르셀로나의 묘한 매력은 반으로 줄었다. 바르셀로나보다는 쇼핑의 천국, 내고향 서울이 그리웠다. 생각해보면 서울은 ‘돈 있는 여자’들을 위한 파라다이스였다. 손 뻗으면 뭐든 살 수 있고, 자다가도 인터넷으로 뭐든 시킬 수 있다. 다음날 아침 택배 아저씨가 조금만 늦으면 배송이 늦었다며 생떼를 쓸 수도 있고 말이지.


“이런 거 물어봐도 돼?”

“뭔데? 헤헤”

“지금 제일 필요한 게 뭐니?”

“하하하하하. 이제 집에 쟁여 두게? 하하하하하하하하. 안 가르쳐 줄래.”

“아니. 그래. 하하하하 미안해서 그랬어. 뭐가 제일 불편했을까.”

“음, 오빠네 집에서 제일 아쉬웠던 것은 달콤한 과일향 나는 바디 클렌저. 온 몸이 부드러워지는 바디 크림. 그리고 탱글탱글한 컬을 살려주는 헤어 에센스.”

“외우기도 어려울 것 같아.”

“하하하하. 그런데 사실 난, 내일 몬세라트 가는 데 살 게 필요해.”

“몬세라트 가는데 특별히 살 게 있어?”

“음, 예뻐 보여야 되니까, 파운데이션 하고, 내가 입고 걸어 나오기만 해도 오빠가 코피를 확 쏟아버릴 예쁜 브이넥 니트, 그리고 다른 건 비밀이야.”


아름다운 브이넥이 필요하다고 노래를 부르긴 했지만, 몬세라트는 경건한 여행지였다. 성당으로 유명한 여행지. 몬세라트는 험한 암석들로 이루어진 높은 산위에 기절할 정도로 아름다운 성당을 지었다는 사실로 유명하다. 단지 그 돌 산위의 성당만으로 유명한 것은 아니다. 몬세라트의 아름다운 성당에는 검은 성모 마리아상 때문에 유명하다.


상상할 수 있겠는가. 성모 마리아가 검다니. 동정녀의 몸으로 결혼도 않은 처녀가 하느님의 아들을 낳았다는 초과학적 이야기를 지니신 성스러운 마리아. 마리아는 늘 백옥 같은 피부와 파란눈, 그리고 길게 늘어뜨린 금발의 모습으로 존재해왔다. 그것이 언제부터 그렇게 ‘아름다운 금발미녀’로 조각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서양인들이 ‘St. Mary' (성모 마리아)를 기리는 예의바른 방법으로 굳어졌다. 그런데, 어느 안전에서 검은 돌로 만든 성모 마리아란 말인가. 흙빛 암석으로 이루어진 마리아의 얼굴과 상반신을 보면 과연 그 중세시대에 어떤 조각가가 이렇게 심장이 오그라들게 파격적인 마리아를 만들었을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검은 마리아는 모든 유색인종 관광객들에게 없던 신심도 마구 불러일으키는,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마리아 중의 하나였다. 다만, 몬세라트는 하루 일정을 다 잡아먹는 코스라 빠듯하게 ‘찍고 빠지는’ 일정으로 여행을 오는 사람들에게는 버거운 장소였다. 나 역시 오빠의 ex- girl friend 나영운님께서 제안해주지 않으셨다면, 바르셀로나의 거리를 배회하다 집으로 돌아갔을지 모른다.


기차역에서 만난 ‘자기야’ 커플은 우리를 정말 반갑게 맞이해주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다시 마주보는 지대범의 ‘자기’는 내게 새삼 위대해보이기도 했다. 어제 오빠가 메일을 보내자 바로 전화를 걸었던 나영운, 나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대단한 커플 여행을 정말 추진해버렸다. 피가 다른 종족이었다. 다음 생에는 그렇게 강한 캐릭터로 살아볼 수 있을까. 여튼, 나 여사는 우리를 보자마자 너무나도 활짝 웃어줬다. 하지만, 신 새벽 같던 그 아침에 제일 들떠 보이는 것은 ‘지대범’이었다. 어제, 구엘 공원에서 나를 맞닥뜨렸을 때, 4등신 만화인간처럼 땀을 흘리던 모습은 이미 어디론가 증발해버렸고, 그는 소풍가기 전 버스에 올라타던 조카의 모습처럼 들떠 있었다.


“제가 종교인이기 때문에 사실 이번 여행이 굉장히 기대가 큽니다.”

“대범씨 카톨릭이세요?”

“아니요, 교회를 다닙니다.”

“아. 네.”


지대범은 신나게 교회와 마리아 숭배의 연관관계에 대해서 일장 연설을 했다. 놀라운 것은 지대범의 자기, ‘나영운’이었다. 그 지루한 연설을 중간 중간 추임새를 넣어가며 정말 맛있게 들어줬다. 오빠는 아주 평온한 척 미소를 지으며 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좀 경직되어 있었다. 나는 지대범의 강의 중간에 집중력을 잃어버렸다. 갑자기 몬세라트에도 케이블카가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아, 맞다. 몬세라트에도 케이블카가 있댔어요.”

“네? 갑자기 무슨 말씀.”

“아. 죄송해요. 근데, 몬세라트의 그 바위 성당에 올라가려면 아주 무서운 케이블카를 타야 된데요. 우리는 몬주익에서 케이블카를 못 탔거든요.”


나는 오빠의 어깨를 흔들었다. 오빠는 내게 걱정 말라는 것처럼 웃어줬다. 하지만 오빠의 얼굴은 얼어붙어 있었다. 나는 오빠를 응원하고 싶었다.


“몬주익 정말 재미있었어, 오빠.”

“케이블카도 못 탔다면서 뭐했어요?”

“택시 타고 올라가서 걸어 내려왔어요. 거기 너무 예뻐요. 고양이들하고 우리 밖에 없었는데, 그치?”

“어. 어…….”


오빠는 얼어 있었다. 무릎이 닿는 거리에 앉은 나 여사는 아직도 오빠에게 메두사일까. 오빠를 어서 해동시키고 싶었다. 나는 오빠의 손을 더 흔들었다. 그 때, 나 여사가 물었다.


“지원씨. 바르셀로나에 언제 오셨다고 했죠?”

“이번 주 월요일이요.”

“어머, 학교 다니는 중 아니에요? 주말에 놀려고 온 게 아니네요?”

“네. 오빠가 토요일에 마드리드로 왔는데, 저랑 엇갈렸거든요. 저는 일요일 밤차를 타고 여기로 왔어요.”

“이상호가 서프라이즈로 마드리드를 갔다고요? 여기서?”

“네. 그 때 얘기했잖아요.”

“왜? 왜 갔어요?”


아하, 나 이제 좀 뻐겨도 되는 거지. 나 이제 아줌마한테 잘난 척 좀 해도 되는 거지. 나는 신이 나버렸다.


“오빠가 이 겨울에 핑크 장미꽃 한 다발하고 뭘 가지고 온지 아세요? 세레나데를 불러주겠다고 기타를 메고 왔어요.”

“요즘 한창 배운 곡이 있어서 그랬어. 그만 놀려.”


오빠는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나는 놀리려는 게 아니었다. 오빠를 응원하며 저 나쁜 기집애를 할퀴고 싶어서 그랬어. 내 맘을 모르는 건 아니지. 오빠 왜 이렇게 해동이 안 될까.


“놀리는 거 아닌데.”

“하하하하. 왜 부끄러워해. 상호한테 그런 면이 다 있었어? 여자한테 빨개져서 말도 못하는 사람 아니었나?”

“절대 아니에요. 완전 로맨틱한 사람이에요, 대범씨랑 바르셀로나 해변 가봤어요?”

“해변? 하하하, 정말? 해변을 갔어요? 이 겨울에?”

“콜론 동상에서 가까워요. 해변을 안 가고 램브라스 거리에서 시간을 다 보내는 것은 정말 수박 겉핥기예요.”

“월요일에 온 거라고요?”

“네, 월요일에 와서 간 거예요, 바닷가 레스토랑 끝내줘요. 와인 한 잔 하고, 해변에서 맨발로 걸어 보세요.”

“그만해, 지원아.”


이번에도 나의 주책을 말린 것은 오빠였다. 오빠는 여전히 이 아름다운 기집애한테 흔들리는 거야? 어제는 나보고 이제 나타나준 것이 너무 고맙다며. 그거 거짓말이야?


“어머, 나랑 사귈 때는 눈도 못 마주치던 남자였잖아. 응? 그건 내숭이었어? 둘이 찍은 사진 같은 거 없어? 보자, 보자.”

“오빠, 전화기.”

“그만해, 정말. 내 얘기는 이제 여기까지만.”


오빠는 내게 조금 정색을 하며 ‘그만하자’고 했다. 손사래를 치기까지 했다. 나는 서러웠다. ‘내숭’이라는 말을 듣고도 여기서 그만하고 싶어? 우리는 잠시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가까스로 중단되었던 지대범의 강의가 시작되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우리는 그렇게 넷 다 할 말 없는 사람들처럼 서로를 쳐다보며 가기 시작했다.


**


말문이 닫힌 것을 처음 연 것은 지대범이었다. 모두들 어색한 얼굴로 어색하게 내린 몬세라트 역에서부터 성모 마리아의 돌산 성당에 이르는 길에서, 지대범은 우리에게 따뜻한 커피와 케잌이 먹고 싶다고 했다. 몬세라트가 좀 춥긴 추웠다. 지대범은 우리의 묘한 분위기를 특별히 풀어주려고 한 것이라기보다는 본인이 정말 달달한 것이 먹고 싶어서였지만, 나는 그것이 너무 고마웠다.


몬세라트 어귀의 파리 날리는 비스트로에서 안 그래도 그 동네의 희귀 인종, 동양인 4명이 서로 또 어색하게 마주보고 앉아 냠냠 먹을 생각을 하니 머리가 아팠다. 지대범은 ‘스타벅스 케익’ 같은 것은 먹고 싶다고 했다. 오빠는 그런 것은 여기서 구하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그럼, 지대범은 어떤 빵이 있는지 보러 가자고 했다. 결국 나는 또 무서운 나영운과 둘이 마주보게 되었다. 나는 무슨 이야기를 꺼낼까 곰곰이 생각했다. 그 때, 나영운이 또 웃으며 나를 긁기 시작했다.


“그래도 왔네?”

“못 보면 아쉬운 성당이라고 하더라구요.”

“성당만 아쉬운가, 우리가 또 언제 이렇게 같이 다니겠어.”


오빠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 모두가 말을 안 하는 상태가 더 편하다. 나는 바보처럼 입을 다물었다. 뭐든 이야기를 시작했다가 본전도 못 찾을 것 같았다.


“부모님 뭐하신다고?”

“그건 왜요?”

“되게 좋은 데 산다던데.”

“누가 그래요?”

“하하하. 남자친구가.”


지대범? 지대범과 나는 주소지 교환 같은 것은 한 적 없는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사는 데를 어떻게 알까요?”

“왜 그러세요, 여권 보면 다 나오는데.”


나는 아무리 기억해도, 지대범에게 내 여권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뭘까. 언제일까. 내가 취했을 때? 지대범과 그 놈의 와인 한 병으로 40여 시간 가사상태로 걸어온 내 육신을 한 방에 보냈을 때? 음,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런데 나 여사는 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상호가 좋아? 상호가 세레나데를 불러줬다는 건 진짜 의외지만, 그쪽은 진짜인가?”

“왜요?”

“그냥. 철없는 아가씨 속마음이 궁금해서요.”

“저기요. 그 쪽은 왜 지대범씨랑 다니죠? 좋아서 다니죠? 그쵸?”

“지원씨는 왜 대범씨 변호사인걸 알고도 연락처 교환 안 했어? 키가 좀 작아? 얼굴이 좀 별로야? 애들처럼 얼굴 따져? 아가씨한테 남자는 뭐가 제일 중요해?”

“지대범씨는 아직 예비 변호사인데.”

“묻는 말에는 대답 안 하네?”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나영운씨는 대범씨가 변호사가 아니면 안 만나겠네요.”

“하하하하. 그냥 그렇잖아. 이것도 인연인데 대범씨랑은 연락처도 모르고 헤어져놓고, 그렇게 기차에서 만났다는 상호는 어디를 봐서 이렇게 따라 다녀? 상호가 반반하긴 해. 그런데, 여기서 살아달래? 오빠 믿고 영국에 있으래? 자기가 먹여 살려준다고 여기 있으래? 너 대학은 어디 나왔댔지?”

“무슨 상관이에요. 진짜.”

“지원이 성격 있구나. 하하하하. 미안해, 난 착한 줄 알고.”


또, 또, 또.

내가 제일 싫어하는 뉘앙스의 ‘너 착하지’가 나오는구나. 너는 그 비누를 빌리던 얌체와 전생에 절친이었나보지? 나는 이가 갈려 한 마디를 쏘아 붙여주고 싶었지만, 안타깝게도 마침 지대범씨와 오빠가 계란냄새 폴폴 나는 두꺼운 푸딩 같은 걸 가지고 왔다. 지대범이 원하는 스타벅스 모닝 세트와는 조금 느낌이 달라 보이는, 대단한 계란빵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서울의 스타벅스와는 다르게 버터와 계란이 제대로 섞인 두툼한 빵으로 ‘지대범 표 모닝세트’를 먹었다.


“자기야, 이거 되게 부드럽다.”


나영운은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나는 처음보는 계란빵의 맛을 음미하기에는 내 속이 너무 엉망이었다. 지대범이 변호사라는 사실과, 내가 ‘도곡동’산다는 사실과, 기차에서부터 오빠가 나영운을 묘하게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 모든 게 내 속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몬세라트에 감돈다는 성스러운 기운은 어디 있는가. 내 속이 이렇게 부글부글 끓는데, 어디서 성모 마리아를 찬미할 여유를 찾아야 하는가. 나는 또 혼자 감정의 롤러코스터를 타느라 혼자 바빴건만, 우리는 커플 여행의 목적지, 몬세라트 성당에 다다랐다.


몬세라트는 돌산이었다. 돌산에는 안개가 끝도 없이 퍼져 있어 성령이 진짜 있을 것만 같은 영험한 기운이 입구를 감싸고 있었다. 겨울이라 그런 것인지, 날씨가 흐려 그런 것인지, 지금껏 햇살이 쏟아지던 바르셀로나에서 이 계절이 겨울인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나는 드디어 햇빛이 보이지 않는 곳에 들어선 것이었다. 오빠는 내게 케이블카를 가리켰다. 높아 보이는 케이블카 스테이션을 가리키며 ‘자기야 커플’은 너무 신나했다. 박수를 치며 좋아하던 나영운씨가 재빨리 줄을 섰다. 지대범이 그 뒤에 선 순간, 안내원이 우리 앞에서 대기선을 그었다. 커플 여행의 커플 둘은 반 동강이 났다. 먼저 케이블카를 탄 두 사람은 오빠와 나를 향해 계속 손을 흔들며 산으로 올라갔다. 그제야 오빠는 내게 말을 걸었다.


“지원아, 너 잃어버렸다는 지갑, 무슨 색이니?”

“그건 왜.”


나는 오빠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했다. 뚱딴지같기는. 너는 기껏 용기 낸 내 이야기를 부끄러워해놓고 갑자기 왜 내 지갑 타령이니. 나는 웃어 줄 수가 없었다.


“남자도 핑크색 프라다 지갑을 쓰나?”

“미쳤어? 게이라면 몰라. 이렇게 궁금한 걸 아까는 어떻게 참았어?”

“어? 뭘?”

“됐어.”


여전히 혼자만의 화가 덜 풀려있었고, 그 덕분에 나는 눈치 없는 여자가 되었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 말이 왜 나왔는지 알아들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오빠가 하는 말도, 오빠도 미웠다. 나는 다음 케이블카가 우리를 성당으로 올려 보내 줄 때까지 바보가 되어 땅만 쳐다보았다. 오빠도 곰곰이 생각에 잠긴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깁니다.”


케이블카를 타고 내리자, 사람들이 늘어서 있는 긴 줄이 우리를 반겼다. 물론, 자기 커플도 우리를 반겼다. 지대범은 또 가이드가 되기를 자처했다.


“성모상을 보러 온 사람들이 여기서부터 줄을 서서 성모가 있는 데까지 가 가지고는 또 밀려 내려오나 봐요. 10초나 제대로 보면 많이 보겠는데요.”

“그러게요. 여긴 다들 검은 성모상을 보러 오니까 밀려 올라가서 밀려 내려오겠네요.”


나는 여전히 부은 입으로 퉁명스럽게 말했다. 나영운도 한 입 거들었다.


“애써 왔는데, 실망이네. 나는 크리스찬도 아닌데.”

“성당에서 내려가면 나무로 된 예수님 조각이 있는데, 그것도 볼거리에요.”


오빠는 나영운을 보지 않고 말했다. 하지만, 나영운이 물었다.


“어머, 뭐가 또 있는데? 예수님 얘기는 책에 없던데?”

“예수 조각은 성모마리아처럼 오래된 것은 아니에요. 그런데, 그 예수 앞에서 자리를 어디로 옮겨가더라도 예수님의 시선이 나를 따라오게 조각되어있어요. 언제나 너를 지켜보고 있다는 의미로.”

“상호씨는 여기 와 본 적 있나요?”

“아니요.”

“하하. 그럼 어떻게 아셨죠?”


어떻게 그걸 아느냐고 묻는 지대범을 보고 오빠가 빙긋이 웃었다.


“저희 가족 중의 한 분이 스페인에서 아주 오래 사셨죠.”

“어머니?”

“아버지요.”

“뭐하시는 분인데요?”

“학교에 계십니다.”

“교수신가요?”

“예.”

“어디서요?”

“독일이요.”

“무슨 과목?”

“칸트, 칸트를 전공하셨어요.”

“이야, 이거 글로벌하시네요. 하하하. 부러운데요?”


지대범은 서울에 돌아가면 반드시 ‘검사’가 되어야 될 것 같았다. 간단한 단서를 잡아도 놓치지 않다니, 가족의 하는 일을 완전히 알게 되기 전까지는 허투루 찬양하는 일도 없다. 나는 오빠가 혹여 스페인 사셨던 아버지가 정말 스페인 사람이라는 말을 할까봐 조바심이 났지만, 한 마디도 돕지 않았다. 복잡한 가정사를 이렇게 쉽게 털어 놓을 리는 없으리라고 믿었다. 조마조마했지만 난 돕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돕겠다고 나섰다가 무안해지는 것은 한 번이면 충분하니까. 나는 계속 아침의 기차에서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봐도, 내가 유달리 과민반응했다. 오빠에게 쿨한 척 해 놓고는 정작 오빠가 나영운을 신경 쓰는 모습을 보자 무너진 것이었다. 쿨한 척 하기엔 내 그릇이 작았다. 오빠의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는 것, ‘찌질하고 쪼잔한 여자’의 좋은 예, 부인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는 없었다. 아름다운 저 여자를 모질게 떨쳐내지 못한 것 같은 오빠의 태도는 나 홀로 계속 기차에 남아있게 했다.


그런데, 일이 생겨버렸다. 긴 줄의 어느 지점에서부터인가, 커플 여행의 멤버들은 이상한 형태로 줄을 따라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문득, 카메라를 다부지게 부여잡고 앞서가는 지대범과 말없이 발걸음 속도를 맞추던 나, 이렇게 줄에서 우리 둘 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때는 이미 성모마리아를 알현하기 위해 계단에 올라서서였다.


“대범씨. 영운씨 어디 있어요?”

“네? 뒤에 오지 않아요? 오죠?”

“없잖아요!!”


나는 내 뒤에 서 있는 금발의 노부부가 놀라서 움찔 거릴 정도로 온 몸을 흔들며 뒷줄을 보았다. 계단 뒤 길게 늘어선 사람들의 어디를 보아도 오빠가 보이지 않았다. 말이 안 된다. 나의 불길함은 현실이 되는 것일까. 도대체 왜 없어지는가. 하필 당신 둘은 이 줄에서 왜 없어지는가. 나는 이미 성모마리아는 안중에도 없어졌다.


“아이고, 오겠죠.”

“어떻게 여자친구가 사라졌는데 걱정을 안 해요?”

“어린애도 아니고 여기 보세요. 여기서 누굴 잃어버려요. 이거 다 보고 가서 내려가서 찾아도 되요.”

“사귀는 거 맞아요? 자기 옛날 남자친구랑 뒤에 쳐졌는데 괜찮아요? 언제부터 사귄 건데요? 네? 또 한 달만 사귀자고 계약했어요? 사귀어보고 좋으면 진짜 프로포즈 하래요? 그래서 아직은 걱정도 안 돼요? 지금 이 여자가 어디 있는지 궁금하지도 않아요?”

“지원씨, 우리 계약한 것은 어떻게 알았어요? 아까 영운이가 알려줬어요?”


하하. 지대범은 나더러 웃으라고 한 말이 아니었는데, 나는 왜 웃고 싶은가.


“아무튼 안 보이잖아요. 난 내려가서 찾아볼래요.”

“여기서 어떻게 내려가요, 저 밑에 우리 엉덩이만 쳐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세요. 우리가 여기서 내려가는 건 말이 안 돼요.”

“아아, 정말 마리아가 검든 파랗든 난 이제 관심이 없어.”

“지원씨야 말로 사귀는 거 맞아요? 뭐가 불안해요? 여기서 뭐 할 것 같은데요?”


너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아? 넌 정말 나영운이 미더워서 이렇게 편하니? 아니면 공부하다 처음 나온 유럽에서는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은 네 욕심이 여자친구 간수를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는 건 아니고? 두 사람은 영국에서 사귀던 사이래. 너도 그 얘기는 들었지? 나는 어서 내려가고 싶었다.


“뒤에서 새치기 당한 거겠죠. 여기 온 사람들 봐요. 다들 이거 보러 이 줄을 서잖아요. 앞으로 오세요. 근데, 저거 보호 유리창인가요? 못 만져보게 하나보네?”


나는 지대범이 가리키는 손가락의 끝을 무심코 쳐다보았다. 멀리서 보이는 그 것. 머리통 몸통이 모두 새까만, 검은 마리아였다. 나는 잠시 넋을 잃었다. 정말 충격은 충격이었다.


“아. 정말 검은 색 돌이야.”

“볼만할 것 같은데. 아, 못 만져보는 게 한이네.”


지대범은 계속 카메라를 들고 만지작거렸다. 플래시를 터트리지 못하게 하는 이 영역은 지대범에게 승부욕을 불태우게 할 만했다. 나는 지대범을 따라 정상에 올랐다. 성모마리아와 얼굴을 대면한 나는 놀라 까무러쳤다. 눈이 안 보였다. 온화한 미소와 발그레한 입술이 고혹적이던 내 방 화장대 위의 고상이 생각났다. 나의 마리아와 당신은 정말 뼛속부터 달랐다. 나는 잠시 마리아의 검은 얼굴에 압도당했다. 그리고 내려가는 무리에 합류하지 못하고 유리관 근처를 배회하며 사진 찍을 기회를 노리느라 여념이 없는 지대범에게 내가 먼저 내려간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나는 눈 코 입 안 보이는 검은 마리아로부터 쫓기듯 내려갔다.


**


마드리드에서 바로셀로나로 떠나는 밤 버스를 타고 오는 그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현실적인 장벽 같은 것, 많이 생각했다. 이렇게 두근거리며 '달려가 만나고 싶은 너'이지만, 이미 우리의 테마곡은 송대관 아저씨의 ‘너는 상행선 나는 하행선’인데 어떻게 하나. 걱정이 넘쳤지만, 나는 ‘이 순간에 충실하자’고 결론 내렸다. 이런 감정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을 일깨워준 오빠에게 충실하자, 나를 위해 달려온 오빠만 생각해보자, 그러다보면 어떻게 되겠지. 딱 거기까지 고민했다.


하지만, 이것은 아니다. 롱 디스턴스를 극복 못해 헤어지는 게 아니라 못 잊은 여자가 나타나는 상황은 고민 못했다. 이런 변수가 나타나 틀어지다니. 아무래도 '사랑' 같은 것은 내게 일어나면 안 되는 일 아닌가.


그나저나 너는 왜 없어졌나.

나 얼마나 마음을 크게 먹고 여기에 왔는데, 그걸 알면서 흔들리는 본능을 주체 못해? 그러고도 나한테 너를 믿으라고 한 거야? 아까부터 불안했다. 도대체 그렇게 얼어붙어버리다니. 나 다 물러버릴 것이다. 내 한계는 여기야. 나는 마음속으로 이미 전쟁 중이었다. ‘부부클리닉’에서나 봄직한 ‘조강지처’마냥 내 마음속은 이미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중이었다.


사람들을 밀치며 얼마나 걸어 내려간 걸까. 조용하고 경건하게 성당을 구경하는 모든 사람들을 있는 힘껏 밀치며 내려간 곳은 계단의 끝이었다. 어디로 가야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이미 일행 3명으로부터 떨어져 나 홀로 서 있었다, 두리번거렸다. 거기는 ‘마리아’ 인파가 오는 곳이 아니었다. 유럽의 성당들이 대개 그러하듯, 유명한 사람들의 관 뚜껑들이 성당을 둘러싸고 있었다. 관뚜껑이 즐비한 무덤에서 나는 갈 곳을 잃었다. 다시 인파 속으로 찾아 드는가. 저 줄의 어디에 오빠가 있는가. 내 마음은 타들어갔다.


그 때, 계단 뒤에서 한국말이 들렸다. 안 쓰는 파이프 오르간과 이름 모를 성자의 관이 숨어 있는 구석에서 분명히 한국말이 들렸다. 나는 얼른 다시 성당의 왼쪽 날개에 몸을 숨겼다. 관 뚜껑을 사이에 둔 두 그림자는 익숙한 목소리였다.


“누구 탓을 하는 거야?”

“눈물을 뚝뚝 흘리며 나 때문에 마음이 아프다고 하던 남자가 맞는지 물어본 것일 뿐이야.”

“……이제 와서 왜 묻는데.”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났다고 저 계집애한테 세레나데? 난 안 믿어, 나한테는 거짓말할 필요 없잖아. 같이 찍은 사진이 고작 이거야? 바르셀로나 몬주익이 전부야? 너 갑자기 왜 그래?”


사진? 오빠의 아이폰을 다 본 것일까. 저 여자는 오빠 아이폰의 비밀번호도 아는 여자인지 모른다. 나는 숨소리가 새어 나갈까봐 온 몸을 움츠렸다.


“왜 지원이와 내가 거짓말로 사귀는 거라고 생각해? 내가 지원이를 왜 속이는 것 같니.”

“나한테 솔직히 말해봐. 쟤네 집 잘 사는 거 알고 그랬지? 너 나를 비웃을 자격이 없어. 나보고 돈만 안다고 했던가? 그건 내가 할 소리네.”

“무슨 소리야?”

“왜 내숭이야? 대범씨는 알던데 네가 왜 몰라? 남자친구라면서 니가 걔 어디 사는지를 모르는 게 말이 되나?”

“내가 서울 사람이야? 그런 거 몰라. 서울이면 서울이지 서울 어디 사는 지를 왜 물어, 여기는 스페인인데.”

“거짓말. 여권 보면 나오는 걸 너가 왜 몰라. 쟤네 집이 한국에서 제일 부자들만 산다는 아파트라던데. ‘타워 팰리스’, 들어는 봤지? 넌 한국 사람들에게 관심 많잖아. 니가 여권을 왜 안 봤겠어. 뭐 해다 준다, 뭐 사다준다, 뭐 체크해준다, 이유는 많지. 기회도 많았을 거고.”


내 얘기였다. 도곡동의 우리 집, 내 얘기였다. 나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지대범은 내 여권을 언제 보았으며, 오빠는 내 여권을 언제 보았단 말인가. 두 사람 다 내 주소를 확인하고서 잘 해준단 말인가. 나는 엄마의 집주소가 없으면 도대체 어떤 대접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말 조심해. 그런 거 몰라. 난 여기 오기 싫었어. 그런데 지원이가, 지원이가 오자고 했어.”

“너의 대단한 사랑을 진짜인줄 알고 하는 소리지. 그걸 핑계로 넌 운 좋게 온 거고.”

“지원이는 나더러 너에게서 자유로워지라면서 오자더라.”

“그래서, 좀 편해? 그러니까 말해봐.”

“착각하지마. 난 너로부터 자유로워진지 오래야. 그래도 보고 싶지 않았는데 지원이 말 듣고 나도 여기 따라 온 것일 뿐이야. 마음이 고마워서. 또 우리는 저금할 추억이 더 필요하니까. 어쩌다보니, 너의 새로운 남자친구까지 지원이가 아는 사람이니까, 어색하지도 않겠다고 생각했지. 큰 실수였지만.”

“기회를 줄게. 솔직하게만 말해.”


나는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릴까봐 숨도 쉬지 못했다. 기둥이 되라면 기둥이 될 수도 있는 상황, 오빠는 잠시 침묵하다가 낮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내가 솔직하게 말하면 뭐가 달라지니?”

“너는 진심이 중요하신 분이잖아. 넌 내가 진짜 좋았어? 내 flat까지 매일같이 찾아와서 눈물을 그렁거리던 니가 어떻게 이래?”

“왜? 이제서야 질투가 나는 것인가? 내가 다른 사람하고 사랑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한 거야?”

“알고 싶어, 돈 말고 쟤한테 뭐가 있기에 니가 나를 잊어? 그렇게 울며불며 매달릴 때는 언제고, 니가 그렇게 나를 갈아타?”

“진심을 알고 싶어? 그래서 이렇게 집요하게 물어?”

“그래.”


숨소리라도 새어 나갈까봐, 나는 내가 숨 쉬는 게 싫었다. 내가 여기에 계속 서 있어도 될까. 나는 사라져버려도 되지 않을까. 마음은 들쭉날쭉 엉망진창이었지만, 내 몸은 그 구석에 뿌리라도 내린 것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나는 완전히 기둥이 되어버렸다.


“너에게 마음을 빼앗겼던 것은 사실이야.”

“…….”

“하지만, 난 그걸 후회해.”

“후회?”


오빠의 목소리는 또 잠시 끊어졌다. 나는 귀에 안테나라도 꼽고 싶었다.


“그래. 아름다운 너, 너를 좋아했어. 네가 웃어주면 죽어도 좋을 것 같았어. 하지만, 후회해. 너를 좋아하는 동안 끔찍하게 아팠고 그 기억을 다시 떠올리는 것은 불쾌해.”

“그런데, 이 여자는 다르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지원이는 달라. 지원이는 사랑스럽고, 나를 아프게 하지도 않아. 지원이 만난 걸 감사해. 이건 행운이야.”

“하하하하. 놀고 있네. 지원이는 성녀야? 걔 몇 살인지 알지?"

"몰라."

"몰라? 넌 필요할 때는 진짜 외국 사람이 다 되는구나. 나이 같은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아?“

“무슨 소리야?“

“너 내가 여권 봤다고 넘겨 짚으니까 안 들키려고 알리바이 만들려고 그러지? 걔 너보다 한 살 많아. 그런데도 너보고 '오빠'라고 껌뻑 죽는 거 보면, 걔도 보통 아니야. 모르겠어?“

“몰랐어. 그런데, 넌 어떻게 알았어?“

“대범씨는 안다니까. 여권 딱 보면 제일 먼저 보는 거 나이랑 주소 아니야?“

“나이? SSN (주민등록번호 같은 제도)같은 것을 어떻게 봤어?“

“내숭 그만 떨어. 그분이 너보다 한 살 많대. 그걸 알고도 오빠 소리가 계속 듣고 싶었어? 니가 그렇게 죽고 못 사는 지원이 누나는 다음 주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부자야. 지금 지원이 누나는 순진한지 덜 떨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저는 돌아가면 끝이니까 여기서만 진심인 척, ‘오빠, 오빠 우리 오빠 최고’그러는 거야. 그것도 구별을 못하니?”


난간을 잡고 겨우 서 있었다. 나는 강심장에 나올 에피소드를 준비하는 자세로 온 힘을 다해 소리를 참고 있었다. 오빠의 다음 말을 내가 조용히 듣고 넘길 수 있으려면 오늘의 강심장이 될 정도의 배포가 있어야 했다. 후들거리는 다리에 바짝 힘을 주고 죽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잠시 침묵하던 오빠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상관없어. 처음 봤을 때, 내가 저보다 나이가 많은 줄 알았겠지.”

“걔를 언제 봤다고 이래, 너 끽해야 한 달 봤어? 너네 정말 너무 웃겨. 너네 서로 이름 말고 아는 게 뭐니? 뭘 아는데 그렇게 믿고 자시고야? 뭐가 진심인지 뭐가 가짜인지 뭘 믿고 잘난 척이야?”

“그건, 너니까 알 수 없는 거야.”


오빠는 냉정한 목소리로 나영운의 말을 끊었다.


“넌 늘 계산을 하지. 내가 아깝다, 내가 모자란다. 내가 더 준다, 내가 덜 준다. 남는 장사가 되는 패만 골라 갖고 싶어 해. 그러니까 너는 누구도 믿을 수 없어. 그래서 너는 누구에게도 진짜 기회를 주지 않아. 너가 옮길 이유가 생기면 더 좋은 곳으로 옮기는 것뿐이야. 너의 아름다운 얼굴을 가지고 골라잡을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는 믿음이 있으니까.”


아름다운 나영운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만 속물 취급 하지 마. 너는 아니라고 하고, 나는 계산한다고 하고, 그래놓고 병원장 딸 만나니까 행운이라고 한다?”

“순서가 바뀐거 아니니? 행운의 여자를 만났는데, 그 어머니가 병원을 하시는 걸 나중에 아는 거지. 몰랐어.”

“둘러대지마.”

“둘러대는 것은 너야. 나를 버릴 때, 내가 계약을 갱신하지 않았다느니, 그런 변명은 또 지대범씨한테도 쓰겠지. 언젠가 더 나은 조건이 나타나면.”

“다른 남자가 너보다 더 매력적일 수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어? 나도 마음이 변할 수 있잖아. 모두가 마음은 달라져.”

“그렇게 말 하는 게 너 마음을 편하게 하면 그렇게 말해. 난 상관없어.”


오빠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나영운은 소리를 질렀다. 나영운은 약이 올라 죽으려고 하는 것 같았다. 나영운, 이해할 수 없는 여자, 너 갖기는 별로지만 남 주기는 아까워? 너는 도대체 왜 오빠를 들들 볶니. 나영운은 하이톤의 목소리로 정말 소리를 질렀다.


“어쩜 이래? 너 어떻게 이래? 니가 뭔데 나한테 이래? 좋아? 나 좋아했던 만큼 저 못생긴 게 좋아? 저 누나도 나처럼 한국으로 가버릴 건데? 나한테 쏟은 것만큼 저 여자가 좋아? 돈 생각 그런 거 안하고도 저 못난이를 좋아할 수 있어?”

“애초에, 내가 지원이에게 끌린 것은 주소가 적힌 여권을 봐서가 아니야.”

“그럼.”

“그건 설명하기 어려워.”

“놀고 있네.”

“잘 모르겠지만, 난 지원이 자체를 좋아하는 것 같아.”


오빠가 그냥 내가 좋다고 한다. 내 다리가 후들거린다.


“그냥 턱 만나보니 좋아서 그 밤에 달려가서 세레나데를 불러준 거라고?”

“그래. 이제 속이 시원하니?”

“……안 믿어.”

“니가 믿고 말고 할 일 아니야. 넌 결국, 너가 원하는 걸 다 가지고도 내 마음은 변함없다는 확인을 받고 싶어 하고 있어. 그래서 이렇게 대담하게도 나와 함께 커플 여행을 하자고 했겠지. 하지만, 분명히 알아둬. 나는 너에게 이제 전혀 흔들리지 않아. 지원이도 서울로 가겠지, 그래도 상관없어. 난 지원이가 좋아. 너는 아니야. 너 때문에 바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난 그 다음의 대화는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 들을 필요가 없었다. 일희일비하던 내 찌질함, 혼자 타던 롤러코스터에서 나는 진짜 내릴 때가 되었다. 이 모든 대화는 하나의 은총이었다. 전전긍긍해오던 내 못난 속은 부끄러움에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창피한데 황홀한 어떤 기운 때문에 온 얼굴이 터져나갈 것 처럼 붉어졌다. 내가 몬세라트의 검은 성모마리아를 죽는 순간까지 잊을 수 있을까. 나는 천천히 성당의 입구로 걸어갔다.



이전 13화13. 어쩐지 너무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