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바닥이 드러나는 순간은 언제올지 몰라

by Nima

나는 성당의 입구에 서 있었다. 그냥 시끌벅적한 곳을 따라 걷다보니 성당의 입구였고, 밝게 쏟아지는 햇살을 보자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벅차올라 어딘가 밝은 곳에서 심호흡이라도 하고 싶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그 말은 그 전에도 들은 적 있다. 오빠가 세레나데를 불러주러 온 밤, 오빠는 우리 엄마를 모르면서도 내가 좋다고 했다. 이번에도 아름다운 저 여자를 앞에 두고도, 또 한번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눈물이 났다.


나는 왜 그렇게 못났던가. 얼마 남지도 않은 시간, 사랑한다고 이야기할 시간도 부족한 이 안타까운 찰나에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그렇게 까탈을 떨었단 말인가. 미안하고 고마웠다. 집 주소, 엄마의 직업, 이런 모든 조건은 그에게서 나를 사랑하기 위한 전제조건이 되지 않았다. 그는 완전히 나만을 두고도 저 예쁜 나영운보다 ‘훨씬’좋다고 했다. 나를 만난 것이 행운이라고 했다. 무려 ‘나 자체’를 좋다고 했다. "I like you as you are." 잊고 있었던 그의 고백, 그 때부터 지금까지 오빠는 변함이 없었다. 나는 급기야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지원아. 아……, 정말. 너 어디 있었어?”


성당 입구의 요란한 관광객들 틈 사이로 눈에 익은 검은 코트의 남자가 다가왔다. 오빠. 우리 오빠였다.


“지대범하고 엇갈린 거야? 너 어디 갔는지 모른다고 그러더라.”

“오빠아아아.”

“혼자 오래 있었어?”


오빠가 가까이 다가오자, 나는 며칠 만에 엄마를 처음 본 초등학생처럼 오빠에게 와락 안겨버렸다. '흑흑.' 이 눈물은 슬퍼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다. 이것은 좋아서 흘리는 눈물이다. 이것은 미안해서 흘리는 눈물이다. 내가 한 살 많다니. 내가 한 살 많다니. 나이 이야기가 자꾸 생각났다. 하지만, 이제 와서 '상호야'라고 제대로 불러질까. 나는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미안해. 흑흑.”

“아니야. 이제라도 너를 찾았으니까 괜찮아.”

“흑흑. 오빠, 고마워. 흑흑흑.”

“뭐가 고맙니. 울지 마.”

“흐흑. 내가 나빴어. 내가 나빴어.”


생트집으로 ‘쪼잔’ 하게 굴었던 기차 안이 생각났다. 부끄러워서 쥐구멍으로 들어가고 싶다. 아니 성당의 첨탑에라도 올라가고 싶다. ‘조강지처 코스프레’를 하며, 퉁명스럽게 굴던 것이 미안하고 창피했다. 복에 겨운 투정들이 후회스러웠다.


“왜 나빠, 응? 그만 울어. 마리아는 봤어?”

“응.”

“검은 성모마리아는 어때?”


나는 고개를 들었다. 아까 검은 마리아를 보자마자 달려 내려왔더니, 오빠가 있었다. 마리아님이 나를 보다 못해 내려 보낸 게 아닐까. 너 시간이 얼마나 있다고 그렇게 바보 같이 구냐. 그만 트집 잡고, 예쁜 시간을 보내라. 이런 것 같다. 그 때는 꼭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다고 말하자. 나도 사랑한다고 말하자. 나는 대단한 결심이 선 것처럼 입술에 힘을 주며 말했다.


“세상 어떤 마리아를 보더라도 난 검은 마리아님을 잊을 수 없을 거야.”

“감동적이었나 보다.”

“오빠, 나 오빠가 너무 좋아.”

“뭐어?”

“오빠, 나 아까 너무 미안해. 괜히 화낼 일 아닌데, 화내고 혼자 삐쳐 있었어. 이제 진짜 안 그럴게.”
“언제? 아, 아까? 아까 화나서 말을 안 한 거야?”

“아까 오빠가 나영운을 너무 신경 쓰는 것 같아서 질투 났어. 미안해. 안 그럴게. 그럴 일 아니었어. 흑흑.”


나는 또 눈물이 났다. 자꾸 못나게 굴던 장면이 반복 재생되는 것, 그것은 꽤나 부끄러웠다. 창피했다. 나는 창피해서 눈물이 났다. 어떤 드라마였더라, ‘연애는 찌질한 내 모습을 다 들켜야 한다’고 하던 주인공의 친구가 생각났다. 나의 이 찌질함은 누구든 맞닥뜨리는 그런 것이라고 위안 삼아도 될까. 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만큼 격하게 찌질해지는 나를 참아도 될까. 오빠는 이런 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아줄 수 있을까. 나는 이 사람과 제대로 연애를 하는 게 맞을까. 며칠이 지나면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타야하는 주제에 이런 걸 연애라고 해도 될까. 이 모든 고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 기분이 완전히 나쁘지만은 않은 내가 변태일까. 나는 자꾸 웃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변태에 가깝다는 생각에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빠도 끄덕이며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나도 미안해.”

“근데, 오빠. 다 어디 갔어? 나 아까 지대범하고 마리아 앞까지는 같이 있었는데, 내가 막 빨리 내려왔어.”

“맞다. 너 없어진 거 찾으려고 흩어지기로 했어. 이따가 1시간 뒤에 저기, 입구에서 만나기로 했어. 널 금방 찾아서 우리 한 시간은 오붓하게 있겠다.”


그랬구나. 나는 결국 거대한 민폐 덩어리가 되었구나. 나는 고개를 들기가 어려웠다.


“미안해.”

“아니야. 지원아, 저기로 가볼래? 저기에 ‘나를 지켜봐주는’ 예수님 조각이 있어.”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손을 잡고 걷는 이 길. 어느 나라에나 있을 법한 회색빛 자갈이 곱게 깔린 성당의 뒷켠은 사람이 없었다. 다들 검은 마리아에만 열광해서인지 이 길에는 오빠와 나 뿐이었다. 사각사각 밟히는 자갈길을 따라, 걸으니 나를 내려다보는 목조 예수님 상이 정말 있었다. 생각보다 아담하고 생각보다 오래되지 않은, 신선한 예수님 조각상은 정말 움직이는 나를 따라 눈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손을 잡고 나무 예수님 앞에 섰다. 나는 오른쪽으로 걸어갔다. 예수님의 눈이 나를 따라왔다. 멈춰선 내 자리에서 바라본 예수님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계셨다. 나는 다시 왼쪽으로 움직였다. 다시 멈춰선 내 자리에서도 예수님과 나는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보고 있었다. 신기한 체험이었다.


“예수님의 눈이 정말 날 보고 따라와.”

“그래서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신데.”

“무섭네, 나 성당 안 나간 지 20년은 된 거 같은데. 자꾸 보시면 안 되는데.”


굴레 굴레 나를 따라 눈을 굴리는 예수님 앞에서 갑자기 오빠가 케이블카에서 한 말이 생각났다.


“오빠, 근데 아까 왜 지갑 물어봤어?”

“아. 너 잃어버린 지갑, 핑크색 프라다 지갑 맞아?”

“어. 그걸 어떻게 알았어. 내 지갑 본 적 있어? 파리 기차역에서 본 적 있던가?”

“아니. 파리에서는 본 적 없지. 그런데, 아까……, 섣불리 말하는 것이 될까봐 걱정은 되지만, 나 아까 너 지갑 본 것 같아.”

“어디서????”


마드리드에서 소매치기 당한 내 지갑. 어떻게 이 몬세라트에서 본단 말인가. 오빠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


“지원아. 아까 나랑 지대범씨가 빵을 고르러 일어났잖아.”

“어!!!“

“지대범씨가 계산을 하겠다고 했는데, 주인이 신용카드 리더기가 고장이 났다고 하는 거야. 그랬더니 자기 현금이 100유로(Euro) 밖에 없다면서 가방에서 지갑을 꺼냈는데, 핑크색이었어. 남자 지갑 치고는 유난스러운 색깔이지.”

“뭐라고?”


눈이 핑 돌 것 같다. 노란 별, 까만 별, 눈이 핑 돈다는 것은 이런 별이 보이는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나는 잠시 주저앉을 뻔했다.


“너 소매치기 당할 때 누가 너 가방을 가져가는 걸 봤었어?”

“아니.”

“그럼, 어떻게 지갑이 없어진 걸 알았어?”

“프라도 미술관에 가려고 한 날, 아침에 아무 생각없이 내 가방을 메고 미술관에 가서 입장권을 사려는데, 그 때 가방에 지갑이 없었어.”

“그래서 길에서 누가 가져간 거라고 생각했구나.”

“응, 그 때 지하철에 사람이 많았고, 생각해보니까 내 옆에 히잡을 두른 아줌마들이 바짝 붙어 있었거든. 돈이 없어지고, 아이패드가 없어지고.”

“맞아, 아이패드도 그 때 없어졌다.”

“응. 오빠, 근데 그 지갑, 나영운 거는 아니겠지?”

“영운이는 남자한테 자기 지갑을 맡기지 않아.”


오빠는 잠깐이지만 쓰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 말이 더 쓰게 들렸다. 그럼 그 사람이 언제 내 지갑을 가져갔다는 말인가. 나는 도대체 어떻게 확인해야 하는가.


“오빠, 어떻게 하지?”

“우리 생각해보자.”


오빠와 나는 서로 쳐다보았다. 몬세라트는 두고두고 할 말이 많아질 것 같았다. 나영운과 지대범. 아직 계약기간이 꽤나 남아보이는 이 싱싱한 커플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에피소드를 제공하고 있었다. 우리는 따뜻한 겨울 햇살을 등 뒤로 받으며 돌 산위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예상치도 않은 작전회의였다.


“핑크색 프라다 지갑이 너만의 것이라는 표시 같은 게 있으면 좋은데.”

“내가 동전 지갑 쪽에 볼펜으로 전화번호를 써 놓았어.”

“진짜?”

“응. 그거 엄마가 처음에 사줬을 때, 너무 예뻐서 잘 때도 옆에 두고 잤거든? 촌스럽게 그런 거 처음 받은 애처럼 나 이름까지 쓸 뻔했는데. 그래도 참고 전화번호만 썼어.”

“좋아. 우리는 어떻게든 지대범이 동전지갑을 우리 앞에서 열어보게 해야 돼.”

“그럴 거 뭐 있어. 100유로(Euro)가 몇 장씩 들어있는 지갑은 내 거야. 열라고 할래.”

“그래. 그러자.”


나는 무릎에 턱을 괴며 한숨을 쉬었다. 고급스럽고 수준 높은 사람들을 차차 만날 것이기 때문에 프라도 미술관은 꼭 가보고 싶다고 했던, 예비 변호사님은 ‘잡범 중의 잡범’, 절도범이었다. 그 덕분에 오빠는 500유로(Euro)를 주고 바르셀로나에서 택시를 타고 나를 도우러 날아왔고, 우리는 이렇게 몬세라트의 언덕 위에 나란히 앉은 비둘기처럼 둘 다 웅크리고 있었다. 우리를 만나게 해 준 것은 고맙지만, 당신이 너무 얄미워서 가만히 있고 싶지 않다. 나는 한숨이 또 나왔다.


“이유가 뭘까 정말 궁금해. 그날 내가 저녁을 사 주고 남는 돈은 자기 가지라고 줬댔잖아. 그런데 그 중에서 60유로(Euro)는 민박집에 맡겼거든. 내 방값으로 쓰라고.”

“양심의 일부가 남아 있어서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너한테 의심을 받지 않으려고 일부러 맡긴 것 같아. 의심 받을 수도 있잖아.”

“연락처도 모르는 내가 의심하면 뭐해.”

“이름을 알잖아. 한국으로 모두 돌아갈 사람들이고.”


그랬구나. 이름 석자를 안다면 귀찮게 추적당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겠지. 머리가 좋은 사람이니까. 이 얄미운 놈. 그래서 나를 처음 보고는 그렇게 당황했던 걸까. 그리고는 안전하다고 마음 놓은 걸까. 하하. 하하하.


“어떻게 내 가방을 열 생각을 했을까.”

“그러게. 아마 너 샤워 하거나 뭘 하는 중간에 너 방에 들어갔겠지. 사람들은 너랑 지대범이 같이 움직인 걸 봤으니까 ‘그냥 필요한 거 가지러 들어가나보구나‘ 생각해서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자기는 불편했겠지. 그래서 그렇게 인사도 안 하고 아침에 홀연히 떠났을지도 몰라.”

“그 다음 행선지가 말라가(Malaga)였을까. 나영운하고 만났다는 말라가.”

“그럴 수도 있지. 아직 여행 일정은 많이 남았고, 돈은 없고. 당장은 어쩔 수가 없었겠지만, 호의를 베풀어준 너에게 그런 식으로 엿을 먹이다니.”

“내 돈을 들고 편하게 다니다 나를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물어봐, 니가 직접.”

“기차에서?”

“응. 내가 도와줄게.”

“오빠.”

“응.”

“나영운은 바보야. 오빠를 버리고 기껏 잡은 남자가 소매치기라니.”

“하하하하하하하하. 나영운이 바보여서 난 좋아. 그 남자가 소매치기라서 난 다행이야.”

“왜.”

“나는 너를 만났잖아. 그 지대범 덕분에 너는 나한테 제일 먼저 전화했지.”

“바보.”

“바보.”


우리는 왜 이렇게 바보일까.

이렇게 멀쩡한 당신은 왜 하필 나 같은 바보에게 눈을 두었는가. 나는 왜 하필 당신처럼 착한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겼는가. 이유도 없고, 설명도 어려운 바보들의 사연은 무엇이 되든 좋았다. 당신은 나를 만났고, 나는 당신을 만났다.


영양가 없는 바보 두 마리는 약속된 시간에 맞추어 입구로 향했다.


**


냉기 감돌던 아침의 기차와는 달리 기차 전체가 왁자지껄한 분위기였다. 에 맞춰 목소리가 높아지긴 했다. 우리도 조금 달랐다. 오후를 홀리(Holy)한 성당에서 보내서 그런지 아침에 비해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만, 나영운은 피곤한 얼굴이었다. 오빠를 구석에 몰아넣고 다그치던 그 기세는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피곤해보였다. 여전한 스테미너를 가진 것은 역시 예비 법조인, 지대범이었다. 그는 계속 나를 나무라고 싶었던 모양인지 검은 마리아에 관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아까 마리아 상 옆에서 얼마나 지원씨를 찾았는지 몰라요. 오는 사람 밀려오지, 가는 사람 줄지어 내려가지, 그 혼잡한 곳에서 오도가도 못하고 말이지. 하하하하.”


너는 그저, 신기한 조각상 앞에서 CCTV 몰래 사진 찍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느라 그 자리를 쉽게 뜨지 못한 것 아니니, 이 잡범아.


“죄송하댔잖아요.”

“사과 받으려고 말씀 드린 것은 아니에요. 하하하하. 근데, 상호씨는 지원씨를 쉽게 찾으셨어요?”

“네. 입구에 서 있더라구요.”

“아, 그거 잘 하셨네요. 사람이 엄청 많아서 입구 같이 딱 보이는 데 서 있어야 제대로 찾죠.”

“대범씨.”


나는 오빠를 보며 지대범을 불렀다. 오빠는 나만 알아볼 수 있는 미소를 지어보여주었다. 힘이 났다.


“저를 한국에서 다시 볼 생각 있으셨어요?”

“네?”

“그냥요. 저 학교도 물어보시고, 그러셨잖아요.”

“하하, 만나면 좋죠.”


지대범은 환하게 웃었고, 나영운은 나를 쏘아보았다. 나는 나영운은 보지 않고 계속 물었다.


“저를 다시 만나실 생각이 있으셨어요?”

“네? 왜요? 하하.”

“생각이 없으셨다면, 구엘 공원에서 저를 처음 보셨을 때 놀라셨겠어요.”

“아, 하하. 예, 놀라고 반갑기도 하고.”

“반가우셨어요?”

“왜 물어요? 지원씨, 갑자기 그런 거 왜 물어요.”


나영운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 왔지만, 나는 내 페이스 대로 가기로 했다.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물어볼 것을 물어보자.


“스페인이 좁구나 했죠.”

“세상은 좁더라고요.”


나는 가만히 웃으며 오빠를 바라보았다. 오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드리드를 떠나시고는 어디를 가셨어요?”

“이비자 섬을 가려고 했는데. 중간에 말라가를 들렸죠. 거기서 자기를 만났고요.”


지대범은 나영운의 손을 잡았다. 나영운은 주인이 쓰다듬어주는 것을 즐기는 고양이처럼 예쁘게 웃었다. 나는 지대범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 때, 강도당한 다음에 제가 드린 100유로(Euro)가 차비가 충분했나요? 말라가까지 가는 기차만해도 엄청 비쌀 텐데. 지갑도 없으셨는데 돈을 어떻게 구하셨어요?”

“아…….”


지대범의 눈이 잠시 가늘어졌다. 눈치 빠르긴. 난 멀리 돌아갈 필요 없다. 나도 정곡을 찔러 묻고 싶다. 여기는 기차 안. 우리는 무릎을 맞대고 앉아 있다. 너는 어디 갈 수가 없다. 기차에서 물어보라던 오빠의 말은 정말 천재적이었다. 지대범의 반응이 너무 궁금해서 내가 이성을 잃을까봐 걱정되었다.


“민박집 떠나면서 한국에다가 말해서 송금 받았죠.”
“스페인 계좌가 있으세요?”

“아니, 스페인 계좌 없어도 ATM이 있고. 주인 아저씨도 계시고.”

“지갑이 없으셨잖아요.”

“하하. 알고 보니 제가 다른 카드 지갑 하나를 배낭에 넣어 뒀더라고요. 그래서 살았죠. 하하.”

“지대범씨 아까 핑크색 지갑 그게 원래 쓰시던 다른 지갑이에요?”


지대범은 잠시 흙빛으로 변했다. 세상에 거짓말탐지기라는 게 있다더니, 죄 지은 사람이 그 사실을 들켰을 때, 자기도 모르게 온 몸이 격렬한 화학반응을 한다는 것이 진짜인가보다. 지대범은 정말 흙빛으로 변했다.


“아니. 네. 남의 지갑을 언제 봤어요?”

“아까 계산할 때, 지갑 꺼내셨을 때요. 100유로(Euro)만 있는 지갑을 꺼내시면서 작은 단위의 돈이 없다고 하셔서 제가 계산 할때 봤어요. ”


오빠가 지대범의 두 팔을 묶었으니, 이제는 내가 지대범의 심장에 비수를 꽂을 타이밍이었다.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조금 당차게 물었다.


“남자의 핑크색 지갑, 보고 싶어요. 보여 주세요.”

“왜 남의 지갑을 봅니까?”

“어머, 자기 왜 화를 내.”


나, 나영운, 그리고 이상호. 세 사람은 지대범을 동시에 쳐다보았다. 지대범의 눈꺼풀이 한 순간 파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지대범은 계속 화를 내야 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미쳤어? 이 사람들이. 지금 누굴.”

“대범씨. 그 핑크색 프라다 지갑. 보여 주세요.”

“이봐요. 이상호씨. 당신이 뭔데 나한테 이래? 아까 그 돈 낸 게 그렇게 아까웠어?”

“그래서 묻는 게 아닌 거 잘 아시죠?”

“자기야, 무슨 일이야?”


오빠는 나영운을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나랑 지원이는 너의 ‘자기’에게 큰 빚을 지고 있어. 그 지갑이 우리에게는 아주 소중한 은인이지.”

“자기야, 그게 뭐야? 무슨 지갑.”

“이 사람들이.”


나영운의 눈은 반짝였고, 지대범의 눈은 이글거렸다. 나는 이 상황을 차마 눈뜨고 관람할 수가 없었다. 내가 이기는 게임도 징그럽고 싫을 수가 있구나. 이렇게 치졸한 상대를 만나면 모든 것이 불편하다. 나는 오빠의 손을 잡았다. 오빠는 손에 힘을 주며 나영운에게 말했다.


“남자가 가지고 다니는 그 지갑은 하필 핑크색이고, 하필 프라다래. 지원이가 마드리드에서 잃어버린 지갑하고 하필 똑같은가봐.”


오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하필 지원이는 100유로(Euro) 10장만 바꿔서 스페인으로 내려왔지. 100유로(Euro) 뿐이라, 파리 기차역에서도 2유로(Euro) 짜리 크로와상을 못 사서 굶고 다녔고.”

“이봐요. 프라다 지갑이 어디 한 둘이야? 100유로(Euro)가 현지원만 가지는 돈이야?”


지대범은 살짝 떨고 있었다. 무릎을 마주보고 히죽거리던 우리는 이 순간을 예측할 수 없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수갑을 채울 기세로 지대범을 향해 쏘아 붙였다.


“누구도 가질 수 있는 지갑이라면 꺼내주세요. 우리가 백배 사죄할게요.”

“너네 다 후회할거야. 내가 누군지 알고.”

“변호사님. 꺼내주세요.”


지대범은 나를 쳐다보았다. 윗입술이 조금 떨렸다.


“지원씨가 착각할 수는 있겠지만. 프라다 지갑이 세상에 하난가요 어디.”

“그러니까 마음 놓고 꺼내주세요. 보고나서 제가 또 사과드리면 안 될까요?”

“여기. 이거 맞아요?”


나영운은 지대범의 가방에서 언제 꺼냈는지 핑크색 프라다 지갑을 꺼냈다. 지대범은 이제 하얗게 변해버렸다. 나영운이 내민 것은 한 달만에 보는 내 지갑이 분명했다. 삼각형의 한쪽에 묻은 파란 얼룩 점박이.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오빠가 지대범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지원이한테 사과하세요. 그 날, 지대범씨 상황 들었습니다. 당황하셨겠죠. 이해는 해요. 하지만, 지대범씨가 지원이한테 정정당당하게 돈을 빌릴 수도 있었잖아요.”

“너 지금 나를 아주 도둑놈으로 모는데.”

“그럼, 아니에요?”

“조심해. 너 진짜 한국 오면 조심해. 이거 어디 봐서 지원씨 거죠? 지원씨 아이디 카드, 뭐 이런 거 찾아보세요. 없어요. 저 이거 여동생 거예요. 이게 한국여자들이 좋아하는 지갑이잖아요?”

“아이디 카드가 없어도 이거 제거예요.”

“뭘 보고.”


나는 지갑을 조심스럽게 들었다. 내 손이 왜 떨릴까. 한달 만에 주인을 찾아온 내 핑크 지갑은 내 손에서 잠시 달달 떨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지갑 안쪽을 폈다.


“제 지갑이면 여기 제 번호가 써 있겠죠.”


나는 동전지갑 부분을 가리켰다. 내 침이 넘어가는 소리가 열차 안에 울려퍼지는 것 같았다. 나영운이 나에게서 지갑을 빼앗아갔다. 급하게 동전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010-***-8376.”

“제 번호에요.”

“너, 이 개새끼.”

“…… 말 하려고 했어.”


지대범의 목소리가 떨렸다. 나영운은 지대범을 가리켜 삿대질을 했다.


“너 어떻게 그러니? 너 어떻게 저게 다 니 돈인 것처럼 그랬어?”


지대범은 말이 없었다. 기회가 있을 때 미루지 않고 해야하는 것은 ‘사과’이다. 사과는 빨리 빨리. 아니면 소용이 없으니까. 궁지에 몬 내 마음도 불편했다. 오빠가 차분하게 말했다.


“지대범씨. 기회가 있었는데도 미안하다는 말 한 번 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요. 용기가 없으시네요.”

“제가 두 배 드리겠습니다. 이거 비밀로 해주세요.”

“뭐라고? 그게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나영운이 소리를 질렀다. 얼마나 실망스러울까. 어디서 이런 남자를 잡느냐며, 마법의 양탄자라도 깔아줄 사람을 구한 것 마냥, 오빠에게 쏘아 붙이던 아침의 나영운이 스쳐지나갔다. 내가 다 안타까울 정도였다. 법조인이라며, 변호사라며, 처음 '자기'를 소개하던 순간도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사람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동물인가.


“제가, 제가 그 날 실수했습니다. 두 배, 아니 세 배로 갚겠어요.”

“지대범씨.”

“비밀을 지켜주세요.”

“무엇이 비밀이죠? 무엇을 위해 비밀을 지켜야하나요?”


나는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상식을 넘어서는 찌질함을 마주하게 되면, 찌질한 내 자신도 대견해보인다. 나는 천천히 말을 시작했다.


“왜 그러셨어요.”

“실수에요.”

“아까 왜 말 안하셨어요.”

“원래 범죄자는 처음에 잡아 땝니다.”

“그거 농담이에요?”


오빠가 끼어들었다. 오빠의 눈이 싸늘하게 변했다. 오빠는 지대범을 쳐다보지 않고 말했다.


“지원이는 그 날, 지갑이 없어진 걸 모르고 신나게 프라도 미술관에 갔죠. 입장권을 사려고 줄을 서 있는 내내 자기 지갑이 잘 있는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어요. 원래 그 자리에 있을 지갑이니까. 전날엔 소매치기를 당한 지대범씨한테 멋진 척 저녁을 사 먹이고 그 가방에 고이 넣어뒀으니까. 얌전히 자고 일어나서 처음 도착한 프라도 미술관이 그 날의 첫 일정이었으니까.”

“그건, 죄송해요.”


지대범은 오빠를 보고 고개를 숙였다. 저렇게 쉽게 구부러질 고개였던가. 아까 눈을 부라리던 지대범은 어디로 사라졌나. 오빠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저한테 죄송할 일은 아니죠. 지원이는 입장권 파는 데서 지갑을 찾아도 없는 것을 알고는 길에서 소매치기를 당한 줄 알았대요.”

“죄송합니다.”


나는 아무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미워서 때려주고 싶었지만, 너무 비굴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오빠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리고 계속 이야기했다.


“아침부터 그날 자정까지. 지원이는 아무것도 못 먹고, 아무 곳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마드리드를 온 종일 걸었죠. 마요르 광장에 돌아온 것은 밤 10시가 넘어서였어요. 그 추운 겨울날, 아무것도 못 먹고 밖에서 걷기만 하다가 말이죠.”

“죄송합니다.”

“지대범씨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사과는 않고, 처음 뱉은 말이 ‘두 배 줄테니 비밀로 하라‘니, 제 정신인가요.”


지대범은 간곡한 눈길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잠시 마주친 지대범은 울 수도 있는 얼굴이었다. 난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대범은 읍소를 멈출 생각이 없어보였다.


“제가 아직 변호사 자격증이 확고히 나온 것이 아니니까. 2년만, 2년만 비밀을 지켜주세요.”

“지대범씨.”


오빠가 지대범을 불렀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 상황은 불편했다. 이 상황은 너무 불편했다.


“지원이가 고생한 걸 생각하면, 지원이가 이 상황을 참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지대범씨는 다른 직업을 찾아보세요. 그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죄송합니다. 지원씨. 제발 부탁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시시하게 지갑을 찾았다. 나는 나영운을 바라보았다. 나영운의 눈가가 촉촉했다. 커플여행을 제안하며 오빠의 마음을 긁어주려던 나영운은 어느 덧, 잡범으로 변신한 예비 변호사님과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었다.


누가 알았을까.

지대범이 내 지갑을 가져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지대범이 나영운과 ‘자기’라고 부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오빠가 지대범의 지갑을 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오빠와 내가 몬세라트에서 이 모두를 겪게 될 것을.


‘인생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말, 그동안은 그저 멋진 허세 정도로 생각했다. 알 수 없는 것이 어디 있나. 대충 예측하는 만큼, 그렇게 살아지던데. 나는 늘 알 수 없다는 인생은 겪어본 적 없이 살았다. 그런데 이번 겨울, 내 인생은 그간 내가 살아온 어떤 방향에서도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주었다. 알 수 없어요. 알 수 없어요. 나는 어서 바르셀로나에 도착하기를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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