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지란 무엇일까.
벨라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시리즈도 끝나지 않은 벨라에게 나는 잘 다니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덜컥 흡혈귀 총각의 와이프로 사는 기분은 어떠냐고 늘 묻고 싶었다.
넌 집으로 가고 싶은 적은 없었니. 너는 평범하던 너의 일상은 아까운 적 없었니.
지루할 수도 있는 일상이지만,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야 된다면, 누구나 벨라처럼 주저없이 돌아설 수 있을까. 난 항상 그게 궁금했다. 모두가 꽃미남 흡혈 청년에게 열광하는 트와일라잇을 보면서 내가 제일 궁금했던 것은 벨라에게 ‘워싱턴 주의 한 아가씨로 돌아올 가능성은 없었는지’였다. 벨라는 용감하게 흡혈 총각을 따라가겠다며, 결국은 흡혈아기를 낳기까지 했지만, 벨라는 한 번도 워싱턴 주의 평범한 아가씨로서의 삶을 아쉽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내 일상이, 내 서울 생활이, 포기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포기할 수 없을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인생이라는 것이 누군가 보기엔 답답하고, 남들이 보기엔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감이 안 올만큼 엉망인 부분도 있겠지만, 내가 내 누추한 인생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일에는 나는 용기를 내기 어려울 것 같다. 벨라가 아닌 나로서는 일생 일대의 선택을 눈 앞에 두고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모든 것을 다 새로 시작하겠다면서, 내 서식지를 유럽으로 옮겨가면서, 친구 하나 없고, 가족도 없는 이 땅에 이 남자 하나 믿고 정착할 수 있을지는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제 목을 물어 달라며 에드워드에게 부탁하던 벨라같은 용기는 내게 없었다.
그런 나임에도 불구하고 오빠에게 나를 잡아달라고 빌어볼까 생각한 순간도 있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마드리드로 돌아오면서 내내 그렇게 빌어보고 싶었다. 서울 생활에서, 내가 오빠 같은 사람을 또 찾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서. 오빠 없는 서울 생활이 과연 전처럼 평온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서. 서울에는 절대 오지 않겠다는 이 사람, 내 평생 제일 사랑스러운 남자, 이 사람을 아주 만날 수 없게 된다면, 나는 전처럼 멀쩡하게 살 수 있을지 자신이 없어서. 오빠가 나를 잡아주면, 더는 뿌리칠 수 없을 만큼 강하게 잡아주면, 용기를 내 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용기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오빠도 문제였다. 나하나 생각해서 나를 물어 달라고 내 목을 내밀면 천사인 오빠는 얼마나 골치 아플까, 이런 생각이 나를 덥치자, 수천 리를 먼저 앞서가는 내 머리에서는 그냥, 이 모든 것을 추억으로 묻어도 된다고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래. 영국서 백수 와이프로 사는 게 그렇게 좋을 것 같지도 않다. 둘 다 좋자고 하는 선택이다. 좋은 꿈이다. 행복한 꿈이었다. 내 마음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꿈같던 바르셀로나에서 일주일 만에 돌아온 마드리드는 아니 Al cala는 모든 수업이 종료된 상태였다. 같이 수업을 듣던 어학연수 프로그램의 친구들 일부는 기숙사를 떠나버리기도 했다. 우리 빌라에서는 이야고가 보이지 않았고, 후안과 안나는 짐은 있지만 낮 시간 내내 보이지 않았다. 프란체스코는 내가 짐을 꾸려 나간다는 이야기를 하자, ‘도대체 어디에 있었던 것이냐’며 놀렸다.
나는 파리에서 서울로 가는 비행기를 마드리드에서 바로 서울로 올라가는 것으로 바꾸었다. 파리에 들려 쇼핑을 하다가 서울로 갈 기분이 아니었다. 쇼핑 같은 것은 머릿속을 떠나버렸다. 나는 오로지 한 가지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제 여기를 떠나면, 오빠를 한동안 볼 수 없다는 사실, 그 사실만 생각했다. ‘한 동안’의 길이는 알 수 없겠지. 오빠가 ‘마크 달시’가 되어 갑자기 서울로 온다는 일이 벌어지면 모를까, 내가 영국에서 버젓한 직장을 구하는 대 기적이 일어나면 모를까, 우리는 아마 누군가의 휴가철에나 다시 보면 볼 수 있을 그런 사람들이 될 지도 모른다. 한 두해는 견우 직녀가 칠월 칠석을 기다리듯이 서로 만날 그 시간만 기다리면서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빠진다면, 다른 일이 생긴다면, 다른 사람이 생긴다면, 이 모든 것들은 꿈처럼 나른하게 낡아버리겠지. 그것을 받아 들여야 하는 나는 쇼핑 같은 건, 정말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렸다. 오빠는 내가 마드리드 공항을 가는 날, 공항까지 바래다주고 싶다고 했고, 그 저녁 비행기인 마드리드 발 대한항공은 오빠와 나를 갈라놓을 것이었다. 그 생각만 하게 되었다.
짐을 꾸린 뒤 며칠 동안, 오빠는 연락이 없었다. 이제나 저제나, 언제 올까를 보채기 싫어서 나도 가만히 있었다. 전화하는 게 조심스러워졌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이 오빠를 섭섭하게 할까봐. 얼굴을 보며 말하면, 내가 일부러 깔깔거린다는 것 정도는 알아주겠지. 오빠도 전화가 없었다.
[따르릉]
“Hola. (여보세요.)”
“나야, 지금 기숙사에 도착했어.”
“지금?”
오빠는 세레나데를 실패하고 떠나던 그 통유리창 앞에 서 있었다. 내가 스페인을 떠나는 날 아침에야 기숙사에 나타난 나만의 천사, 반가운 AVIS 렌트카를 타고 날아온 나만의 제이콥은 아무렇지 않은 듯한 얼굴로 수줍게 웃고 있었다.
우리는 은근히 정든 레지덴시아 앞에 차를 곱게 세워두고, Al cala를 조금 돌아보기로 했다. 학생들이 빠져나간 텅빈 레지덴시아를 떠나, 버스를 타고 매일 같이 지나다니던 학교 건물과, 유대인 거리 앞에 있던 아름다운 카페. 그리고 구시가지 끝에 있던 작은 향초 가게까지. 오빠는 내 한 달의 일상을 요약한 동선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우리는 내가 늘 메뉴 고르기에 실패하던 작은 비스트로에 앉았다. 이제야 익숙해진 이 비스트로도 마지막이다.
“Al cala는 정말 귀여운 동네야. 그치?”
“응, 예쁘네.”
"그 때, 오빠가 Al cala 오고 싶다고 하지 않았어? 아주 처음에."
"맞아."
"보고 싶은 거 다 봤어?"
"응."
"뭐였는데?"
"학교들. 여기는 유서 깊은 곳이야. 유럽에서 두 번째인가, 세 번째인가 오래된 대학이야."
"아, 맞다. 그랬어. 오빠가 나 한테 공부 열심히 하라면서 하던 말, 기억나."
오빠는 콜라잔을 들어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의 우리가 나눈 대화에서 아직까지는 ‘너 가면 언제 언제 연락하자’는 둥의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있다. 입이 간질간질, 묻고 싶다. 알고 싶다. 듣고 싶었다. 하지만 참을 지어다.
“유대인 거리에 있는 그 카페, 커피 진짜 맛있지 않아? 난 Al cala를 떠올리면 학교 생각보다 그 카페 생각이 날 것 같아.”
“진한 커피 좋아하는 건 정말 인정해. 넌 전생에 이탈리아 사람이었나봐.”
“아랍 커피 장사였을 수도 있어.”
“하하.”
“오빠.”
“응.”
“그 때, 나영운하고 가고 싶었다는 그 영국 해변 이름이 뭐야?”
“아, 샌드 뱅크.”
“영국서 일 잘 하고 있어. 내가 영국 가면 샌드뱅크 꼭 가자.”
“여름도 추워.”
“그럼, 안 데리고 갈 거야?”
“아니. 데리고 갈게.”
오빠는 뭔가 또 부연설명을 하려는 듯 했다. 막아야했다. 구구 절절 약속을 읊어달라고 시작한 말이 아니었다. 사육신 코스프레를 일삼던 당신에게 마음에 부담을 가지게 하려는 말이 아니었다. 나는 그저 당신에게 내가 당신과 많은 것을 하고 싶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앞으로도 당신과 무엇을 할 생각만 하면 두근거릴 것 같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당황하는, 혹은 부담갖는 눈빛을 보자, 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실컷 하는 것은 지금 이순간에 좋은 선택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나았다.
“오빠는 서울은 절대 안 온댔지, 아쉽다.”
“지원아. 나는.”
“서울에서 나 아직 남산 케이블카 못 탔거든요. 나 꼭 남자친구랑 가서 타 보고 싶었는데, 오빠가 안 올 거니까. 나는 못 타겠지.”
“…….”
“헤헤, 영국에는 케이블 카 없어? 나 꼭 타고 싶어. 내가 런던 갈게요. 케이블카 찾아 놔.”
“음.”
농담처럼 던진 말은 조금 무거웠다. 이제 가니까. 언제 보겠나, 다시 만나면 어색하지 않을까. 각각의 머리는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그래. 판타지는 없다. 쿨하게 가기로 해 놓고 왜 이러는 거야. 나도, 오빠도 조용히 저녁을 먹었다. 대화가 사라진 저녁 무렵의 Al cala는 조용했다. 우리의 마지막 만찬처럼 사방이 조용했다. 우리가 마드리드로 달릴 때까지 아무 말도 안했다. 둘 다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었고, 둘 다 음악을 듣는 척 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은 모조리 엉망진창이었는데도, 라디오 채널도 바꾸지 않고, 말없이 달렸다. 벙어리 행세를 몇 시간이나 한 걸까. 오빠가 입을 뗀 것은 공항에서였다. 체크인 시간이 되어서야 오빠는 내 이름을 불렀다. 왔구나. 이별의 시간. 받아들이자. 우리 여기까지다. 나는 웃어보였다.
“지원아.”
“응.”
“준비 다 잘했지?”
“응.”
“빠진 것은 없어?”
있어. 오빠와의 추억. 여기에 묻고 가야겠지. 오빠가 내 현실의 남자가 될 수는 없다. 미안한 부탁, 안 할 거야. 나 모질게 마음먹을게. 우리는 열렬히, 미련 없이, 이 겨울을 다 녹이도록 따뜻하게 보냈으니까. 그걸로 충분해. 나는 충분해.
“응.”
“다른 거 필요한 거는 없니?”
나는 갑자기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우리는 누구나 만나고 헤어진다. 만남은 이별의 다른 말이다. 당신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이 이별이 다가올 것을 알고 있었다. 모른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이렇게 억장이 무너져 내릴 일은 아니었다. 나는 자꾸 아쉬워지는 내 마음을 부인하고 싶었다. 내가 오빠에게 기대하고 있는가. 스페인에 남아달라는 말, 혹은 영국으로 와 달라는 말. 그런 말을 듣고 싶을까. 아니다. 오빠는 내 인생의 방향을 무리하게 유턴하라며 시킬 사람이 아니고, 그럴 사람이 아닌 오빠로 하여금 호기를 부려달라고 부탁하기 싫었다. 내가 나고 자란 곳, 내 모든 것이 익숙한 내 고향 서울, 서울에 있는 내 전부를 두고, 내가 홀연히 오빠 옆에 있겠다고 말할 수도 없으면 이 대단한 추억을 보물처럼 간직하는 게 베스트다. 어려운 일 안시키겠다고 우리가 이러는 것이다. 따라서 나는 섭섭해 할 필요가 없다. 나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당연하지. 다 챙겼어.”
“지원아. 조심하고.”
“응.”
“서울 가서 씩씩하게 보내고.”
“응. 오빠도.”
오빠가 잠깐 머뭇거렸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걸까. 빠르게 뛰려는 내 심장을 진정 시키자. 나는 사방이 환한 공항 한 복판에서 땅으로 꺼지고 싶을만큼 떨렸다.
“왜?”
“지원이, 한 가지, 너가 잘 잊고 사는 게 있는 거 같아. 그거 잊지 마.”
“……뭐.”
“넌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거. 넌 정말 좋은 사람이야. 나는 너를 만나서 행운이야.”
“……응.”
나는 가방을 세웠다. 아. 이 말은 내가 그린 결말에서 반드시 나와야 하는 인사말이었지만, 나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섭섭했다. 너는 좋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마라. 너를 만나 행운이라는 말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예상답안처럼 우리의 시간이 여기가 마지막이라는 선고였다.
처음 파리에서 만났을 때가 생각났다. 우리는 기차역에서 내 빨간 캐리어 가방을 앞에 두고 티켓을 가지고 옥신각신했다. 스페인으로 가는 열차를 찾으려다 만난 우리는, 스페인을 누비며 열렬히 사랑했다. 그래서 나는 최소한 고민했다. 하지만, 당신은 나에게 선고했다. 나는 당신을 추억하는 데까지만 허락 받았다. 알았다. 받아들인다. 떼쓰지 않겠다. 사랑한다.원하는 대로 더 해주고 싶다. 오빠 마음 가는 대로 하라고 해주고 싶다. 내 마음은 찢어져도.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잡지 않겠다는 말이리라. 잘 가주자. 이렇게 마무리 하자.
“오빠. 건강해.”
“너도.”
“나 간다.”
나는 왜 잡지 않느냐고 묻지 않았다. ‘마크 달시’가 되라고 떼쓰고 싶지도 않다. 징징거려서 모두에게 어색한 피날레를 선물하며 망치기엔 오빠가 너무 소중하다. 난 이제 바르셀로나만 떠올려도 미소 지을 것이고, 런던에 대한 뉴스만 봐도 오빠의 안부를 궁금해 하겠지. 그거면 된다. 오빠가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다는 생각, 할 수만 있으면 된다. 더는 바라고 싶지 않다. 나의 판타지는 여기서 끝이다. 나는 이제 책을 덮고 내 현실 세계로 돌아가야지. 이제는 내 갈 길을 가야지. 오빠의 안녕을 기도하면서. 대한항공의 크루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