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가 플랫폼에 서자마자 지대범은 머리를 조아리며 내게 부탁했다.
“절대로, 절대로 비밀로 지켜주세요. 제가 2배, 아니 뭐든 하겠습니다. 송사가 있으시면 저를 이용하세요. 무료로 봉사하겠습니다.”
“지대범씨. 저는 지갑을 찾았고 지대범씨는 ‘자기’가 그냥 가버렸어요. 그런데, 그 비밀이 더 걱정되세요?”
“지원씨, 저 장난 아닙니다. 저는 돈을 더 달라고 집에 전화할 입장이 아니었어요. 제가 합격하고 어머니 친구분들이 여행 다녀오라면서 십시일반 경비를 대 주신 거예요. 돈을 잃어버렸다고 지원씨처럼 엄마한테 ‘쪼르르’ 전화할 입장이 아니라고요.”
“그래서 제 지갑은 지대범씨에게 허락된 것인가요.”
“여유가 있으신 분이니, 자비를 베푸시어 달라고 이렇게 제가 부탁드려요. 어머니 친구분들, 그분들도 바보가 아닌데, 왜 제가 여행한다고 돈을 쥐어 주시겠어요. 다 미래를 위해 투자한다고 생각 하시고 주신거죠. 제가 집안 좋은 변호사들을 알아보겠습니다. 소개팅도 무료로 해 드릴게요.“
나는 행여 이 말을 나 혼자 잘못 알아들은 말인가 싶어 잠시 머뭇거렸다. 옆에 서 있던 오빠가 잠깐 웃는 것 같은 모습을 보고 나서야, 내가 헛말을 들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지대범, 이름처럼 대범한 사람이었다. 나는 용기를 냈다.
“대범씨.”
“네.”
“우리 다시는 안 만날 수 있게 노력해요. 대범씨, 그럼. 부디 한국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멋진 법조인이 되세요.”
“한국 가셔서는 꼭 지원이랑 안 만난다고 약속하세요. 안 지키시면 비밀이고 뭐고 없습니다.”
나는 오빠의 손을 붙잡았다. 오빠는 지대범을 향해 경례를 하는 시늉을 하고 플랫폼을 빠져나왔다. 씁쓸하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고, 몬세라트 나들이는 꿈 같았다. 오빠는 가만히 내 어깨를 붙잡았다.
“피곤한 하루였어. 몬세라트.”
“맞아……. 오빠.”
“응.”
“나 사실, 오빠랑 나영운씨 하는 얘기 들었다. 성당에서 우왕좌왕하다가 중간에 조금.”
오빠가 잠시 멈춰 섰다. 화난 얼굴은 아니었지만, 오빠는 크게 놀라보였다. 나는 오빠의 두 손을 잡았다.
“미안해. 미안해. 그러려고 한 게 아니었어. 난 사실, 아까 오빠를 의심하고 오빠를 찾아서 막 다녔거든.”
“의심? 왜?”
오빠의 얼굴은 조금 빨개졌다. 나는 생각나는 것을 다 말하기로 했다. 기회가 올 때 용기를 내야지. 나는 오빠의 두 손을 맞잡은 채 흔들거리며 말했다.
“너무 예쁜 ex- girl이 나타났고, 둘이 안 보이고, 기차에서는 오빠가 내 말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고, 그래서 속상했어. 그래서 막 불안했어.”
“지원아, 난 정말 영운이한테 아무 것도 안 남아있어. 내 말을 못 믿었니.”
“아니, 나 다 믿었었는데, 서운했어. 나보다 예쁜 여자를 보더니 흔들리는 것 같아서 불안했어. 근데, 그거 다 후회해.”
“뭘.”
“서운해 했던 것 불안해했던 것. 그 시간 너무 아까운 것 같아.”
무엇인가 말을 하려는 오빠를 막았다. 할 말이 남았다.
“나는 오빠가 너무 좋다.”
“…….”
“진짜야. 나영운 바보. 나는 횡재했어. 기껏 만난 ‘자기’가 지대범이었어봐. 어떻게 해.”
“…….”
“오빠, 나는 오빠를 잘 몰라. 그치만, 앞으로 오빠를 더 많이 알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서, 너무 행복해. 시간 낭비 안하고 이제는 정말 오빠를 더 많이, 더 잘 알 수 있는 방법만 연구할래. 그러라고 마리아님이 그 계단에서 날 밀어 내리셨나봐. 나 그렇게 믿을라고.”
오빠가 흔들거리는 내 손을 조금 당겼다. 우리는 길 한 가운데에서 또 멈춰 섰다. 하지만, 이 말은 지금 꼭 하고 싶었다. 생각났을 때, 기회가 왔을 때, 오빠한테 다 말해야지. 시간이 많지 않은 우리에게 아껴둘 말 같은 것은 사치다. 나는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
“오빠가 바르셀로나를 떠나야 되듯이, 나도 스페인을 떠나야 되겠지? 오빠가 나를 잡지 않으면 나는 서울로 돌아가야겠지. 또 보자고 인사해놓고, 다시 보려면 몇 년이 걸릴지 아무도 모르겠지. 근데, 난 상관없어! 오빠가 너무 좋아. 오빠를 만나서 너무 행복해.”
“…….”
“오빠가 섹시한 식물을 연구하든 기타를 치든 난 오빠가 좋아.”
오빠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가만히 눈을 마주치고 있는 이 순간, 좋았다. 갑자기 생각났다. 내가 한 살 많았다는 것, 어서 어서 사과해야지.
“그리고, 나 한 살 많은 것도 미안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냥 오빠라고 생각했어. 속이려고 한 거 아니야.”
“하하하하. 미안할 일도 많다.”
오빠는 잠시 고개를 숙이는 것 같았다. 떨렸다. 무슨 말이 나올까. 나는 후회 없이 다 말했지만, 오빠에게 후회 없이 다 들을 수 있는 것인지는 자신 없었다. 자신이 없어도 상관은 없었지만.
“지원이한테 오빠가 되어서 좋아. 사실 난 여권에 나온 번호 기억 안 났는데, 그게 생일표시인 줄은 몰랐어. 당연히 내가 오빠라고 생각했고…….”
“진짜? 내가 어려보이지 않을텐데?”
“아냐, 난 내가 오빠라고 생각했어. 그리고…….”
“그리고?”
“오빠라는 소리, 좋았어. 다들 그래서 그렇게 여동생들하고 사귀고 싶어하나봐.”
오빠는 또 ‘쑥스럽다’는 얼굴이 되었다. 나는 오빠를 당겼다. 우리는 서로 바르셀로나의 신호등이 되려고 했던 바르셀로나의 첫 날처럼 또 길 한복판에서 전신주라도 되려는 사람들마냥 그렇게 부둥켜안았다. 슬프지도 않고 기쁘지도 않고, 담담하지만 보람찬 기분. 나는 오빠를 안고 서 있으면서 말 못할 기분에 취해 바르셀로나의 아름다운 저녁노을 같은 것은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
오빠는 또다시 아름다운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오빠의 집 근처에서 레스토랑을 고르자는 내 말을 듣고 한참을 고민하던 오빠가 나를 데려간 곳은 테이블이 딱 세 개뿐인 작은 비스트로였다. 테이블마다 붉은색과 하얀색의 격자 체크무늬 테이블보가 늘어졌고, 그 위에는 앙증맞게 놓인 작은 향초가 아름답게 빛났다. 주인은 손수 그날 그날 아침에 사다놓은 싱싱한 재료로 본인이 ‘땡기는’ 메뉴를 만들어준다고 했다. '오늘의 메뉴'라고 입구 칠판에 써 있던 것은 무슨 송아지 어쩌구였다. 오빠는 이 여자친구가 스파클링 와인을 좋아하므로, 생선을 먹고 싶다고 말했지만, 주인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생선이 마음에 들지 않아 시장에서 사오지 않았다고 했다. 두 사람은 좀 아는 사이 같았다. 오빠에게 레드 와인 하나를 가져다주며, 선물이라고 했다.
언제고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좋겠지. 하루 종일 붙어 다니고, 사랑한다는 말을 생각날 때마다 해주고, 듣고 싶을 때마다 조르고……. 그리고 이렇게 눈물 나게 아름다운 테이블에서 촛불을 마주보고 저녁을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천상의 하루겠다. 하지만 이렇게 보낼 수는 없었다. 나에 대한 오빠의 마음이 궁금하고, 혹시나 오빠가 내 마음과 다를까 걱정하던 때와 달리, 이 사람이 너무 좋아지니 이 사람이 더 잘 되는 방향이 무엇일지가 더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내가 방해가 되는 게 아닐까. 바르셀로나 생활을 내가 망치는 게 아닐까. 이런 걱정이 내 머릿속을 뒤덮었다. 헤어지는 것은 아쉽지만, 그 아쉬운 정도보다 더 크게 오빠가 나로 인해 일상을 방해받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걱정이 앞섰다. 드디어 ‘사람’다운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나 때문에 못 낼 뻔 한 수업료, 그렇게 어렵게 내 놓고 수업도 다 빠지고, 이렇게 바르셀로나에서 민폐를 끼치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나 너무 크게 폐를 끼치는 것 같아.”
“그러지마. 백마는 없지만 그래도 나 돈 많은 왕자님 시켜줘. 내가 해 줄 수 있는 거 다 해주고 싶어.”
“세상에, 이거 녹음해야되.”
“하하하, 왜?”
“자랑하려고. 나 횡재 맞지? 히히”
백마, 왕자님.
세고비야가 떠올랐다. 그 날, 우리는 정말 손 한번 제대로 잡아보지도 못하고 묘하고 어색한 분위기속에서도 그 작은 동네를 전세 낸 것처럼 돌아다녔다. 생각해보면 '뽀뽀의 해변‘ 바르셀로나보다 더 설레었던 것이 세고비아의 좁은 골목이었던 것 같다.
“세고비아 좋았어.”
“나도.”
촛불 맞은 편, 오빠의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내 이야기, 당신과 나의 에피소드는 과연 얼마나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여행 다니다 우연히 만나는 남녀 이야기야 흔한 소재이지만, 강도당했다며 콜렉트 콜을 한 여자에게 택시를 타고 달려와 제가 내야할 수업료를 건넨 남자, 그 남자에게 돈 다발 소포로 빚을 갚아 마음을 얻은 여자, 소풍 한 번 같이 갔다 와서 세레나데를 들려주러 나타난 남자, 그 소중한 타이밍을 놓친 죄로, 몇 만 리 떨어진 바르셀로나에 서프라이즈로 나타난 여자의 이야기. 그 여자는 오래된 커플도 아니면서 남자의 말 한마디에 혼자 삐쳤고, 남자는 김태희도 울고갈 예쁜 여자 앞에서, 이 변변치 않은 여자가 사랑스럽다며, 속 깊은 사랑을 고백했다. 묵직한 그 고백을 들은 여자는 그제야 지금껏 징징대온 지난 시간을 뼈저리게 반성하며, 무엇이 되더라도 모든 것을 남자의 뜻에 맡기겠다고 나서고 있다. 이 이갸기는 흔한 이야기는 아니다.
우리의 결론은 어떻게 끝나야 할까. 어떤 엔딩을 맞이해야 ‘공감’을 얻을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가 그 따위 공감을 얻어야 한다고 누가 요구하는가. 반드시 만인의 공감을 얻어야 하는 졸업 논문 과제를 받은 것도 아닌데, 이런 걱정은 뭐 하러 하나.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내가 당신을 이렇게 만난 것이 너무 큰 행운이라는 것, 내가 당신을 정말 좋아한다는 사실 뿐인데. 나는 의젓하게 말했다.
“난 내일 갈래. Al cala로 돌아갈게.”
“가려고?”
“에, 다이나믹한 반응은 없네?”
“아니야. 나는.”
“헤헤, 빈말을 하라고 한 건 아니야. 이래저래 오빠를 너무 괴롭힌 것 같고……, 어서 가야죠.”
흔들리는 촛불의 맞은편에서 오빠의 얼굴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도 섭섭해 하는 것, 다 느껴진다. 뼛속까지 섭섭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나는 오빠가 좋으니까, 더 이상은 조증, 울증 부려가며 오빠를 괴롭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오빠와의 부족한 이 시간들을 담백하게 채우고 싶다.
“가야 되는 것은 원래 알았던 것이라 놀랄 일은 아니지만, 지원아, 넌 방해가 아니야. 더 있어도 되.”
“아냐. 내가 있으면 오빠는 기타 수업을 절대 안 갈 거구. 그건 남의 일상을 너무 오래 망치는 거야. 오빠가 언제까지고 바르셀로나에서 살 사람은 아니잖아요. 영국은 언제 돌아가려구.”
“망치는 거 절대 아니었어. 그러니까, 서두르지 마.”
“나도 가야되니까. 아마 이번 주에 기숙사 방 빼야 될 걸요?”
“벌써, 한국으로?”
“응, 갈 때 되었어. 이제.”
“아. 한국, 서울로 가야 되는 때구나.”
오빠의 얼굴이 조금 굳어졌다. 연기라도 좋다. 저 찰나의 표정은 내게 너무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래, 내가 맞았다. 나는 이 사람과 ‘너 이래도 나한테 안 넘어와? 너 이래도 나 안 좋아?’ 하며 ‘Playing Game’을 하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좋은 당신을 이렇게 만난 것, 정말 감사한다. 이렇게 좋을 때, 알아서 내 할 일을 해 줘야지. 당신을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다. 잘 해주고 싶다.
“그럼, 이제 파리로 올라가려고?”
“아뇨, 나 마드리드에서 갈래. 사실 딱 쇼핑할 것도 없고, 파리 갈 생각하니까 무서워.”
“하하. 그날 너 정말 고생했어.”
“고생은 오빠가 했지. 오빠는 보초 섰잖아.”
오빠가 웃었다.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드니까, 내 팔 한 쪽이 찢어져나가는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궁상 떨 시간 없다. 나는 시간을 아껴야 한다. 우리는 시간이 부족하니까. 나는 서두르기로 했다.
“오빠는 무슨 노래를 들어? 그러니까, 아이폰에는 무슨 음악을 주로 넣었어?”
“아. 뭐든. 요즘 배우는 연주곡이나 팝, 뭐 다 들어있어.”
“맞다. 오빠 나 처음 본 기차에서는 CDP 들었잖아. 그거는 뭐야? 아이폰 말고 MP3는 없어?”
“음, CDP는 연주곡들 때문에 버릴 수가 없어. 아직 연주곡들은 CD로만 나오는 게 많거든.”
“아, 그렇구나……. 그럼, 오빠는 무슨 브랜드 옷을 좋아해?”
“브랜드? 특별히 없는데? 무슨 브랜드?”
“그냥, 여기는 ZARA도 싸고, 스페인은 예쁜 옷이 많잖아.”“안 돼. 내가 ZARA를 들락거리다간 안 그래도 다들 나를 게이라고 놀리고 싶어하는 데, 결정적인 오해를 받게 될지도 몰라.”
“정말? 하하하. 왜왜, 오빠 어딜 봐서 게이야?”
나는 깔깔 웃었다. 주인이 가져다준 송아지 고기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 오르고, 오빠가 와인 잔을 채워주는 순간에도 나는 질문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나는 배고픈 것보다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것이 더 급했다. 이 시간은 너무 귀한 시간이었다. 그걸 너무 허투루 썼다. 나영운이나 질투하면서 허투루 썼다. 나는 마음이 급했다.
“오빠는 무슨 영화를 좋아해?”
“아가씨, 질문할 것을 써 놓고 있었던 것 같아.”
“나는 오빠에 대해서 아는 게 아직 얼마 없어. 시간은 얼마 안 남았고, 알고 싶은 건 너무 많아. 왜 나는 이런 걸 미리 안 물어봤을까.”
오빠가 와인 잔을 들었다. 나는 여전히 물음표를 입에 문 채 와인 잔을 들었다.
“질문 많은 아가씨를 위하여.”
“대답 없는 아저씨를 위하여.”
건배 합시다.
촌음을 아끼지 못한 바보를 위하여. 어서어서 오늘이라도 시간을 아껴 당신을 알고 싶다. 못된 미소를 가진 나만의 한 살 어린 ‘오빠’가 대답했다.
“재미있게 본 마지막 영화는 아마, ‘히트(Heat)’였던 것 같아.”
“뭐야, 너무 오래된 영화네?”
“그치만 영화를 안 보고 산 것은 아니야. 나 지난 달에 ‘브레이킹 던’도 봤어. 그것도 욜리랑 영화관에 가서.”
“정말? 하하하하. 남자 둘이 다니니까 게이라는 말 듣는 거야.”
“그런 것 같아. 우리 조심해야겠어.”
우린 둘 다 욜리를 떠올리며 킥킥거렸다. 욜리라는 이름, 귀한 공통사였다. 오빠와 나 사이에 이렇게 공통의 소재가 없다니, 피눈물이 난다. 나는 어서 더 물어봐야한다.
“암튼 남자 둘이 보기에는 진짜 지루했을 것 같아. 그거 미국 10대 여자애들한테 팔라고 쓴 거랬어.”
“딱 그래보였어. 그래도 여기 애들도 좋아해. 로버트, 에드워드가 좀 먹히는 것 같더라.”
“난 제이콥이 더 좋은데.”
“맞아, 넌 나더러 늑대가 되라고 했었지. 뽀뽀하기 전에 신신당부까지 하면서.”
“히히히히.”
오빠도 웃었다. 좋다. 이 순간. 소중하다. 나는 계속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고, 오빠는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물었다.
“욜리랑 나, 둘 다 너무 궁금한데, 우리가 같이 물어볼 사람이 없었던 게 있어.”
“뭔데?”
“벨라는 왜 제이콥을 놓아주지 않아? 가라고, 딱 잘라 말해줘야 되는 거 아닐까.”
“벨라가 가라고 해도 제이콥이 말을 안 듣잖아.”
“여자들이 보면 그렇게 보이나? 우리는 벨라가 제대로 ‘say goodbye'를 안했다고 생각했거든. 그러니까 불쌍한 제이콥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옆에서 맴돈다고 벨라를 욕했어.”
“욕하기엔 벨라가 너무 예쁘지 않아?”
“맞아. 하하하. 그게 문제야.”
갑자기 오늘 하루 종일 몬세라트를 함께 다녔던 나영운이 생각났다. 나영운. 야멸차게 오빠를 버려놓고도 너는 왜 나를 떠났는지 따져 물었다. 아름다운 것은 나영운이 벨라보다 나았다. 나는 오빠에게 물었다.
“나영운이 오빠를 놓아주지 않았어도, 나는 오빠를 쫓아다녔을 거야. 난 제이콥 과인가봐.”
“지원아. 걔 신경 쓰지 마.”
“신경 안 써. 오빠. 난 시간이 없으니까. 걔를 신경 쓸 수가 없어.”
오빠가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하겠지. 하지만 걱정할 일은 정말 없다. 그것은 내 진심이었다.
“아까 혼자 삐쳐서 말 안한 것도 너무 억울해. 내가 바르셀로나를 떠나면, 내가 스페인을 떠나면 우리는 조만간 꼭 보자고 약속하며 헤어지겠지. 그 약속은 다시 언젠가 다시 보자는 걸로, 우리 다음해에 다시 보자는 걸로, 그렇게 미뤄질 거야. 그런 거 어쩔 수 없어. 오빠가 나 때문에 일상을 다 바꾸면서 무리하는 거 싫어.”
“지원아.”
“근데, 난 지금 오빠를 다 알 시간이 부족해. 그래도 난 오빠를 더 알고 싶어. 이렇게 질문이라도 할 생각을 왜 못했을까. 오빠가 제이콥을 불쌍하게 생각하는 거, 오늘 처음 알았잖아. 오빠가 벨라를 못된 기집애라고 생각하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구. 난 알고 싶은 게 너무 많아. 오빠를 다 알고 싶어.”
오빠가 웃었다. 그 미소에 파리의 기차역도 스쳐지나가고 바르셀로나의 해변도 지나갔다. 못된 미소의 남자는 나를 바라보았다. 오빠의 눈이 많은 이야기를 하는 이 순간, 나는 이 순간을 잊지 말아야지. 말하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것 같은 이 순간, 이 좋은 순간을 하나하나 다 기억해야지. 오빠의 목소리가 조금 가늘어졌다.
“그 말은 벅찬 것 같아. 나를 다 알고 보면 실망할 지도 몰라.”
“다 알고 나서 실망하고 싶어. 그럴 시간이 주어지면 좋겠어. 오빠는 그 시간을 다 들여서 알고 싶을 만큼 너무나도 매력적인 사람이야.”
“…….”
“난 오빠가 왼손잡이 인 것도 좋아.”
“나 왼손잡이인거 어떻게 알았어?”
“파리에서, 기차에서, 왼손으로 써줬잖아. 나 그것도 좋아. 난 왼손잡이 좋아.”
“…….”
실컷 다 말하자. 생각나는 대로 말하자. 지대범을 떠올려보라. 지대범과 이상호, 세상에 남자가 둘 뿐이라고 치면 나는 행운아다. 나는 이 행운을 실컷 이야기하고 싶다. 당신을 다시는 못 보게 되더라도 솔직하게 다 말하고 싶다. 나는 행운아다. 당신 덕분에 나는 행운을 가져 보았다.
“나영운도 고마워. 오빠가 언제 아팠는지, 오빠가 무엇 때문에 아팠는지, 그 여우같은 계집애 덕분에 알게 돼서 너무 좋아. 오빠를 더 많이 알게 되어서 너무 좋아. 오빠, 나는 오빠를 좋아한다고 원 없이 말할래. 나중에 그 말 못한 거 후회하고, 서울에서 울면 뭐해. 오빠한테 실컷 말도 못하고 헤어졌는데.”
“…….”
“연애를 하는 친구들을 보면서 부러운 적도 있고, 저럴 걸 왜 사귀나, 궁금한 적도 있었어.”
“…….”
“허구 헌 날 싸우고, 사소한 말꼬리를 잡고 트집 잡고, 상처주고, 삐치고, 말 안하고, 시간을 보내는 걸 보면서, 저럴 걸 왜 사귀나 욕하기도 했어.”
“…….”
“나도 모르게 오빠가 하는 말 하나하나에 과민반응하고 혼자 삐치고, 혼자 미안해하고 하다보니, 친구들이 이해되기도 해. 왜 그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지. 아니, 그게 왜 쓸데없는 짓이 아닌지 이해가 될 것 같아.”
“…….”
“나는 그런 사소한 싸움을 하면서 오빠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어떤 말은 참을 수 없어하는지, 어떤 말은 기분 좋아하는 지, 경험할 기회가 없겠지. 그러니까 시간 낭비는 하지 말았어야해. 오빠를 더 빨리, 더 많이 알려면, 난 오빠한테 더 많이 물어보고, 더 많이 들어보고 그랬어야 되. 그러니까 오빠. 뭐든지 나한테 다 알려줘. 나는 이시간이 너무 고맙거든. 그래서 계속 말할래.”
“…….”
“오빠, 내 앞에 나타나줘서 고마워. 오빠, 지금 내 앞에 있어줘서 너무 고마워.”
그때였다. 오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 자리로 달리는 듯 걸어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달려오는 오빠를 보고 저항할 수가 없었다. 홀린 듯 일어난 나에게 오빠가 키스하기 시작했다. 와인향이 가시지 않은 오빠의 입술은 포도향이 짙었다. 우리 테이블이 있던 창가로 천천히 밀려갔다. 내가 벽에 완전히 붙었을 때, 주방에 있던 사람들, 옆 테이블에 앉았던 사람들, 작은 비스트로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우리를 둘러싼 청중들은 박수를 치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이 비스트로에서 이 포도 맛 입술보다 맛있는 것은 없을 것이니까.
**
우리는 영화를 찍었다. 와인에 취한 우리는 두 걸음 떼며 키스하고, 두 걸음 떼면 또 키스하다가 건널목을 건널 때도 키스를 하며 건넜다. 우리 옆을 지나가던 어린 스페인 남자애들은 ‘A la cama, a la cama! (침대로 가, 침대!)’를 외치며 박수를 치고 난리였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볼일이 바빴다. 나는 잘 안 보이는 그 꼬마들에게 손을 흔들어주는 객기도 부렸다. 꼬마들의 함성소리를 듣자하니, 여기서 내가 노래 한 곡 뽑아주면 헹가래쳐줄지도 모른다는 착각도 들었다. 우리는 낄낄거리다 키스하고 웃다가 키스했다.
오빠의 아파트 문을 열면서도 키스했고, 신발장 옆 작은 스위치를 켜면서도 키스했다. 거실에 앉아 있던 욜리가 소리를 지르며 인사를 해도 우리의 키스는 멈추지 않았다. ‘chick flick (칙 플릭 영화: 여자 취향의 로맨스 영화) 영화처럼 이제 남자주인공인 오빠는 나를 벽으로 거칠게 밀었다. 욜리가 후다닥 달아나며 ’Buenas Noches (잘자!)‘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오빠는 멈추지 않았다. 나도 옴찔거리지 않았다. 브이넥 셔츠를 거칠게 말아 올릴 때까지는 우리는 완전한 영화를 찍고 있었다. 그런데 코믹영화로 변할 수도 있는 거대한 위기가 닥쳐왔다.
“어, 이거 뭐야?”
하하. 하하하하.
아침까지만 해도 너무 천재적인게 아닐까 누군가에게 자랑하고 싶었던 나의 임기응변이 우리의 결정적 순간 앞에 선 최대의 위기였다. 오빠의 눈은 이미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이거, 오늘……, 그냥 떼면 돼.”
“뭐? 나보고 이걸 떼라고?”
오빠는 웃음을 참고 있었다. 나도 웃음을 참고 있었다. 그러다 웃음이 먼저 터진 것은 오빠였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 도대체 여기에 왜 이런 걸 붙였어?”
“왜? 그냥 반창고잖아. 떼떼떼!!!”
“으하하하하하하. 야, 그걸 내가 떼면 난 진짜 변태취급 받아도 되.”
“뭐가 어때? 그냥 브래지어 대용이었어.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브래지어를 하지 왜 반창고를 붙여?”
“여기 와서 빨래도 못하고, 그리고 오늘 니트가 너무 붙는 니트라서, 브래지어 자국 나는 거 촌스러워. 이런 거는 니트 입을 때 최고야.”
“와하하하하하하. 세상에, 여자들이 니트를 입을 때 이런 걸 자기 손으로 붙인다고? 진짜 몰랐어. 너 그럼, 이거 너가 붙여놓고 집에 와서 떼?”
“어. 하하하하. 왜 그런 눈을 쳐다봐. 으하하하하. 그럼 내가 붙이고 내가 떼지, 누가 떼? 으하하하하하하하하”
문제는 나의 가슴 정중앙, 그러니까 ‘젖꼭지’ 마다 수줍게 붙어 있는 반창고였다. 브래지어를 하나밖에 없었던 나는 오늘 아침 니트를 입을 때, 색깔이 비치는 게 너무 눈에 거슬렸다. 회색 니트에 핑크 브래지어. 이건 정말 중학생 같았다. 그래서 나는 반창고를 택했다. 예뻐 보이려던 생각이었지, 오늘의 이 코미디 영화 촬영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오빠는 너무 웃다가 이미 지친 것 같았다.
“안 돼. 반창고는 너무 웃겨. 으으으으윽.”
데굴데굴 구르는 오빠 옆으로 나도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와서 손수 반창고를 떼어내는 아픔을 참는다고 해도, 우리의 ‘로맨스’ 무비는 다시 크랭크 인 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해보였다. 오빠는 ‘꺽 꺽’거리며 웃었다. 나도 웃다가 턱이 빠질 것 같았다.
“아, 지원아. 난 정말 이런 기분 처음이야. 으하하하하하하하하.”
“그만 웃을래? 나도 이런 기분 처음이거든. 으흐흐흐흐.”
“으, 미안. 무안하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내가 손수 떼는 것은 차마 할 수가 없었어. 어떻게 해. 하하하하하. 그걸 어떻게 매일 뗀다고 할 수 있어…….”
오빠가 몸을 일으켰다. 오빠는 자기 셔츠를 벗었다. 나의 맨 등 위로 오빠의 셔츠가 덥혔다. 체온이 남아있는 따뜻한 셔츠가 맨살에 닿았다. 우리는 더 이상 힘이 없어 웃을 수는 없었다. 웃다 지쳐 힘이 빠진 오빠는 쥐어짜도 나오지 않는 웃음이 겨우 진정되는 것 같았다. 더는 데굴데굴 구를 힘이 없어진 오빠는 드디어 나를 가만히 당겨 안았다. 나도 더는 웃을 힘이 없었다. 포근한 오빠의 품이 따뜻했다.
“원 없이 웃고, 원 없이 뽀뽀했어.”
“배 아파. 힘도 없어.”
“우리가 뭘 해보기도 전에 이렇게 녹초가 될 줄이야.”
“한국 올 생각 없어? 사슴 한 마리 잡아 줄게. 힘을 내봐.”
오빠는 또 조금 킥킥 거렸다. 나도 마지막 힘을 얼굴 근육에 모았다. 미소를 짓는 내 볼을 가만히 쓸어내리는 오빠의 손은 따뜻했다. 따스한 체온, 가슴이 두근거렸다.
“너를 보내면 아마 후회하겠지.”
“보내지 말라고 보채다간 아마 후회하겠지.”
“너를 가지지 못해도, 나는 후회하겠지.”
“내가 먼저 나를 가지라고 말하지 못해도, 나는 후회하겠지.”
“왜 너는 서울에서 태어났니. 너는 왜 가야하는데.”
“왜 오빠는 서울에서 안 태어났니. 왜 서울 갈 일이 없는데.”
“지원아.”
“응.”
“사랑해.”
사랑한다는 말. 너무 좋다. 노래를 부르다 나온 가사가 아니었다. 오빠는 나한테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했다. 나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사랑해.”
내 뺨에 닿은 오빠의 맨살은 뜨거웠다. 맨 등에 닿은 오빠의 셔츠위로 오빠의 팔이 느껴진다. 오빠의 등을 쓰다듬어보았다. 보드라운 피부, 기억하고 싶다. 뜨거운 이 체온, 기억하고 싶다. 이놈의 반창고만 안 붙였어도, 나는 지금쯤 별나라에서 노닐고 있을 지도 모르지. 나는 오빠의 등을 가만히 쓸었다. 오빠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약간 웃음이 섞여있는 목소리로 귓속말을 했다.
“난 차마 떼지 못하겠지만, 이대로 잘 수는 없을 것 같아.”
“내가 떼면 된다니까.”
“그건 보고 싶지 않아.”
“음, 그럼 도망가 있어.”
“하하하하하하하하. 안되겠다. 음. 그럼. 음. 샤워를 할까?”
“샤워?”
“응. 그럼 아프지 않잖아.”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좋아.”
“부스는 좁지만, 일어날까?”
“좋아.”
오빠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나를 번쩍 들어올렸다.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는 시늉을 했다.
“난 정말 안 본 걸로 할 거야.”
“하하하하하하. 반창고를 무서워하다니, 너무 웃겨.”
“아, 제발 안 아프게 떼 줘.”
“뭐야, 이건 나한테 붙어 있는 거 거든? 하하하하하하하.”
우리는 작은 샤워실이 떠나가라 웃었다. 욜리에게 미안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너무 웃겼다. 사람 일은 계획대로 되는 게 없다. 아침의 몬세라트는 나영운의 계획과는 달리 ‘자기야 커플’을 떼어 놓고, 오빠와 내게 커플 샤워를 선물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이 인생에서, 내 인생에 들어와 줘서 고마워. 나는 샤워기 물을 조절하는 오빠의 등을 가만히 만졌다. 오빠가 너무 고마웠다.
**
오빠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내 몸에 샤워 타월을 둘러주었다. 물이 잔뜩 묻은 오빠의 손은 차갑지만 말랑거렸다. 나는 오빠의 손을 잡았다.
“이렇게 보니까 개구리 손이네. 새로운 사실이야.”
“하하하하. 개구리 손? 개구리 손이라는 말, 너무 웃겨. 개구리는 개구리 다리라고 하니까 개구리 발 아니야?”
“음, 국어 교육을 잘 받았군. 그치만, 오빠는 개구리 손이야. 물에 넣으니 아주 하얗고 긴데?”
여전히 웃음을 최대한 참는 것처럼 모이는 오빠의 입은 곧 터질 것 같은 웃음보 때문에 너무 귀여워보였다. 나는 젖은 머리를 흔들며 가만히 웃었다. 샤워기 옆의 세면대에 엉덩이를 얼마다 부딪혔던가. 얼얼한 내 안과 쏟아지는 따뜻한 물, 묘한 조합이었다. 그래서 다들 영화를 찍으면 샤워 섹스를 으뜸으로 치나보다. 정수리를 타고 내리는 물방울, 따뜻한 샤워실보다 더 높은 우리의 온도, 당신의 숨소리, 당신의 촉촉한 감촉. 아픈 기억보다는 촉촉하게 따끈했던 이 모든 공기를 기억할 것 같다. 이 좁은 샤워부스도 남자와 여자에겐 함께 사랑을 나눌 공간이 되었다. 오빠의 목을 꼭 잡고 서커스 하며 서 있던 나, 그 덕분에 오빠가 더 녹초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착한 모범생은 샤워를 시켜줄 타이밍이 되자, 갑자기 바닥에 놓인 바구니를 뒤졌다.
“뭐 찾아?”
“욜리한테 클렌저 사오라고 했었는데, 있나?”
“무슨 클렌저, 클렌저는 여기 있는데?”
“그거 말고, 너가 말한 과일향 클렌저 사두라고 했거든. 여기 있다.”
오빠는 베리 향이 쏟아지는 작은 클렌저를 흔들었다. 나는 오빠의 등을 꽉 끌어 안았다. 오빠를 이렇게 두고 떠나야 할까. 나와 당신은 원래부터 만나온 사람들처럼 이렇게 영원히 살면 안 될까. 딸기향이 진하게 뿜어져 나오는 샤워젤 거품 사이로, 나는 거품처럼 사라질 수도 있는 이 아름다운 순간들을 어떻게 저금해야 할지 생각했다. 오빠와 나는 딸기맛 나는 거품을 온 몸에 가득 바르다, 뽀얗게 불어서 샤워실을 나오고야 말았다. 오빠가 잠시 아쉽다는 표정이 되었다.
“바디 로션 사오라고 한다는 걸 깜빡했군.”
“오빠는 원래 안 발라?”
“응.”
“그런데 왜 그렇게 피부가 예뻐?”
“그래? 부끄럽네.”
“그런 소리 처음 들어?”
“아, 음. 그런 가.”
“에휴, 내숭. 나영운도 칭찬했구나?”
오빠가 내 앞에 앉았다. 젖은 머리칼, 촉촉한 피부, 아름다웠다.
“영운이 얘기 굳이 쿨하게 안 해도 되. 쿨한 아가씨.”
“잊었구나? 난 굉장히 이해심이 많은 여자거든.”
“미안해.”
“어허, 왜 또 미안해? 내 이해심을 몰라봐서 미안하다는 거야? 괜찮다니까아아. 난 대범하다고.”
“하하하, 대범? 그 용감했던 지대범씨가 있었군, 도대체 그 대범한 남자는 언제 만났던 거야?”
“빨리도 묻는다. 아니지, 아냐. 오빠가 그렇게 시시콜콜 묻지 않는 거 너무 대범해 보여서 좋아.”
그랬다. 오빠는 말 한 마디에 일희일비하던 나와 달리 늘 내 맘을 편하게 해줬다. 나는 작은 것에도 전전긍긍했는데 말이야.
“소매치기 변호사님은 마드리드에 도착하자마자 만났어. 기차역에서 다운타운으로 가 달라며 택시 아저씨에게 불호령을 내리기도 했다구.”
“무서운 남자였구나.”
“무서운 남자였지. 오빠, 마요르 광장에 진짜 촌스러운 식당 있거든? 거기 걔랑 같이 갔었어. 집채만한 태양 있는 레스토랑 봤어?”
“아, 어디인지 알겠다. 하하하하. 기념품 파는 집인 줄 알았는데?”
“그치? 나도 기대안하고 들어갔는데, 완전 사람 많았어.”
“마요르 광장이라……. 너는 거기서 나를 보고 천사라고 하다가 쓰러졌지.”
“백 년전 일 같아.”
“그러게.”
“근데 오빠랑은 마요르 광장에서 같이 걸어 본 기억이 없어. 마드리드에서 우리가 처음 만난 곳인데 아쉽게.”
“내가 기억하고 있잖아. 눈 풀린 현지원.”
“하하하하하하.”
우리는 오빠의 침대를 그냥 적시고 누웠다. 파란 시트는 촉촉하게 젖으려고 했다. 오빠가 더 두꺼운 담요를 꺼내려고 했다. 나는 그냥 나중에 가져오자고 했다. 물에 불은 우리 둘은 파란 시트위의 얇은 이불 속에 가만히 누웠다. 노곤함과 뻐근함. 아련함과 몽롱함. 이 순간이 좋았다. 이렇게 마음이 노곤해 지게 해 주는 남자, 이 남자를 여기 두고, 아무도 날 찾지 않는 그 놈의 서울로 내가 떠나야 한단 말인가. 몽롱한 행복감은 자꾸 아쉬워졌다. 여전히 촉촉하게 물기를 머금은 오빠가 말했다.
“처음 만났을 때, 그 때가 12월 26일이었나?”
크리스마스가 지난 파리, 기차역 곳곳에 여전히 크리스마스 장식이 찰랑거릴 때, 나는 정말 우연히 당신을 만났다. 그 날, 우리가 이렇게 한 침대에 누워 있을 거라고 상상할 수 있었을까.
“응, 그리고 12월 27일 아침에 헤어졌지. 우리는 처음부터 하룻밤을 함께 보냈어.”
“그러고 보니 우린 한 해를 함께 했구나. 12월과 1월을 같이 보냈구.”
“맞아.”
“지원아.”
“응.”
“처음 봤을 때, 나 어땠어?”
오빠는 ‘처음’을 물었다. 끝에 이르면 처음을 되짚어본다고 했던가. 이것이 끝은 끝일까. 이 생각을 시작하자 나는 갑자기 말문이 막혔다. 끝을 생각하지 않은 적 없지만, 막상 되짚어보려니 우리의 처음이 아련했다. 아름다운 첫 시작, 나는 원래부터 내 인생에 있었던 사람만 같은 당신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처음이라며 떠올리는 것이 바람직할까 고민했다. 오빠는 약간 초조해 했다.
“이런, 역시 별 생각 없었구나.”
“아냐, 오빠를 처음 본 날 말이지?”
당신을 처음 본 그날, 기차 안에서 앞뒤로 앉은 채 긴 밤을 함께 보낸 그 날, 나는 뾰족한 당신의 멋진 콧날에 살짝 걸쳐진 그 안경에 넋을 잃은 적 있었다. 당신은 처음부터 무지하게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그 말을 해도 될까. 처음부터 그 아름다운 옆모습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는 말, 해도 될까.
“음. 마드리드에서는 천사인줄 알았고 …….”
“맞아. 나보고 천사랬어.”
“진짜 그랬다구.”
“지원아.”
“응.”
“시티 오브 엔젤은 어떻게 끝나?”
“니콜라스 케이지가 사람으로 변하고 나서 둘이 한번 자고 멕 라이언이 죽어.”
“오, 나 천사라고 하지 마, 그거 이상한 결말이야.”
“하하하, 알았어. 나는 안 죽을 거야, 이건 영화가 아니고, 오빠는 가브리엘이니까.”
나는 오빠의 팔 안에서 가만히 얼굴을 돌렸다. 오빠의 얼굴을 보자 묻고 싶은 것이 생겼다. 나의 처음, 파리의 내 모습은 어떠했는지 궁금했다.
“나는?”
“너는…….”
나는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들릴까봐 숨이라도 멈추고 싶었다. 두근두근 이 순간, 오빠는 천사처럼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너는 크리스마스 트리에 있는, 미슬 토(구슬) 같았어.”
“구슬? 트리에 매다는 반짝거리는 동그란 거?”
“응…….”
“이야.”
“빨간 가방을 어깨에 메고, 빨간 캐리어를 잡고 있는 여자애가 TGV직원을 붙잡고 있었어. 내가 가까이에서 그 곁을 지나가려는데 작고 빨간 무엇인가가 흥분한 목소리로 영어로 말하는 게 들렸지. 그래서 돌아봤는데, 빨간 미슬 토, 크리스마스 장식 같았어. 그 때 넌, 용감하게도 TGV 직원들을 영어로 꾸짖고 있었지. 당황할 법도 한 상황이었는데 말이야.”
“세상에.”
내가 지금껏 들었던 나의 첫인상에 관한 그 모든 말 중에 내 마음에 쏙 드는 말, 나는 오빠의 품으로 더 파고 들었다. 이 사람을 떠날 때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프지만 황홀했다. 나는 또 다시 당신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너무 과분한 말이야. 난 처음 본 오빠한테 다짜고짜 화를 내다가, 민망한 줄도 모르고 샌드위치를 빼앗아 먹었는데.“
“하하하. 기억난다. 난 그 때, 내 뒤통수에서 누군가가 내 빵을 노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지.“
“아, 창피하다. 괜히 얘기했어.“
“뭐가. 하하하하하.“
오빠는 가만히 내 손등을 쓰다듬었다.
샌드위치. 쫄아 들었던 내 위장에 어떤 만찬보다 훌륭했던, 까칠하고 고소했던 토마토, 브리 샌드위치. 우리의 모든 순간은 너무도 특별했다. 내 특별한 오빠, 나보다 한 살 어린 오빠가 가만히 속삭였다.
“갑자기 파리가 생각나네. 너랑 이렇게 내 침대에 누워있다니. 그 때 기차를 탄 순간에는 절대 생각할 수 없었던 것들이 모두 일어났어. 그래서 사람들은 행운을 이야기하나봐.”
“오빠를 만나서 행운이었어. 그 때, 오빠가 나한테 플랫폼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면, 난 그날 거기서 노숙자가 되었을 거야.”
“지원이는 알아서 잘 찾았을 지도 몰라. 내가 운이 좋았어.”
“오빠, 그 때 5번 플랫폼에서 8번으로 온 거, 오빠 나 도와주려고 빨리 왔지?”
“나? 하하, 그랬지. 사실 Relay (잡화 매장)에서 신문을 좀 보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너한테 기차가 늦게 간다는 걸 알려줘야 될 것 같았어.”
“오빤 정말 천사였나봐.”
“천사, 영광이야, 천사로 살게 해 줘서.”
“히히.”
“다만, 날 두고 죽지 마, 멕 라이언 싫어.”
오빠가 갑자기 일어났다.
“노래 불러줄게.”
“세레나데?”
“아, 기타가 필요한 노래는 아니구. 잠깐만.”
오빠는 잠시 팔을 풀었다. 몸을 뻗어 침대 머리맡의 아이폰을 쥐고는 다시 누웠다. 오빠는 오빠의 배 위에 아이폰을 올려두고, 내게 다시 팔 베게를 둘러주었다.
“나 한국 노래 연습했다.”
“뭔데?”
“음, 이 노래는 우리 클래스에 있는 한국 누나가 여자가 좋아하는 노래라고 해줬어. 못 불러도 미워하지 마.”
나는 오빠의 팔 안으로 조금 더 몸을 바짝 붙였다. 오빠의 배 위에서 이승철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아주 오래간만에 듣는 ‘오직 너뿐인 나를’이었다.
‘아직도 널 잊지 못해 이유 없는 울음 삼키며 애써 기다린 그대 지우려 하네.
어두웠던 지난 겨울비 내린 그날 밤, 이젠 잊은 듯한 눈길이 다가와.
사랑해 너무 사랑했었어. 널 위해 살아온 날 잊지 말아줘.
널 보며 너를 기다려 오며, 너만을 그리워 한 오직 너뿐인 나를 기억해줘.
그렇게 지나온 시간 속에 넌 아마 날 잊어 버린채 애써 행복한 듯한 눈빛을 보이지
울어도 괜찮아, 내게로 와 너를 위해 남겨진 내 품 안으로 아직 난 널 사랑해
사랑해 너무 사랑 했었어 널 위해 살아온 날 잊지 말아줘. 널 보며 너를 기다려 오며
너 만을 그리워한 오직 너뿐인 나를 기억해줘…….‘
오빠의 목소리가 내 귓가에 울려 퍼졌다. 이승철의 노랫소리는 오빠의 배 위에서 울려 퍼졌다. 나는 오빠의 목에 가만히 키스했다. 오빠는 후렴을 부르려고 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오빠는 노래를 마저 다 부르지 못했다. 노래를 부르느라 목청이 울리는 오빠의 목을 나는 뱀파이어 흉내를 내며 간질러 버렸다. 오빠는 나를 잡았다. 몸이 돌아가는 순간은 번개와 같았고, 오빠의 아이폰은 번개처럼 침대 밑으로 낙하하고 말았다. 우리는 파란 시트위에서 또 엉겨붙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