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당신이 있는 사랑의 도시

by Nima


‘먹물 백수’ 놀이는 그만 하기로 했다. 엄마가 주는 용돈을 받아 하는 일이라고는 돈 쓰는 일 뿐이던 과거는 이제 졸업하기로 했다. 스페인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다짐한 것이었다. 방학마다 용돈으로 여행 다니는 일도 이제 졸업하고, 나도 열심히 살아보자며 마음 먹었다. 현실에 치여야만 될 것 같았다. 그래야만 아름다운 바르셀로나를, 차가운 공기가 서늘하게 드리웠던 파리의 몽빠르나스를, 그리고 여름에도 추워서 들어가기 어렵다는 해변, 샌드뱅크를 떠올리는 일을 멈출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렇게 살기로 했다.

오라는 곳 없어도 줄기차게 입사 지원서를 돌렸다. 주구장창 면접을 보면서 한 가지 깨달은 것은 우리나라가 스페인어를 그렇게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면접관들마다 나를 보면 신기한 표정을 지었고 똑같은 질문을 했다. ‘여기 써 있는 말들은 스페인어로 뭐냐, 이런 말은 스페인어로 할 수 있나’ 나를 동시통역관 면접 후보자로 착각한 것처럼 스페인어를 자세히도 물었다. 하지만, 그것이 결정적으로 내 입사를 도와주는 요인은 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고 오래도록 구직생활을 하고 있었다.


내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백신을 개발해야 하는 운명을 타고 난 것도 아니고, 죽어가는 경제를 살리기 위한 묘책을 연구해야하는 고난의 길을 갈 사람도 아니고, 나는 다행히 남들처럼만 살면 되었으니까. 운 좋으면 좋은 회사에 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고 구직활동을 하다가 되면 뼈 빠지게 일하면 끝이었다. 그 사실에 감사하기로 했다.


지루하지도 않았다. 세상이 좋아진 덕분에 스페인에서 내보내는 라디오를 아이폰으로 들으며 서울을 누빌 수 있었으니까. 마드리드의 라디오 방송, 바르셀로나의 라디오 방송, 그리고 오빠가 있는 런던의 라디오 방송도, 내가 마음만 먹으면 그 동네 아침 라디오를 들으며 저녁의 강남역을 헤맬 수 있었다. 나는 심심하지 않았다.

혼자 버스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면, 런던의 아침 라디오를 들었다. ‘지금 8시’라는 DJ의 목소리를 들으면서 ‘오빠는 출근을 준비 하겠구나’하며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짓기도 했다. 금요일부터 일요일 아침까지 ‘Club special'이라며 요란을 떠는 DJ의 목소리를 들으면, 행여나 주말의 Bar에서 예쁜 여자를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닐까 새삼스럽게 궁금해지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오빠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다시는 못 볼 것 같다는 생각으로 서럽게 울었던 것은 마드리드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대한항공이 마지막이었다. 내가 운다고, 내가 연락한다고, 내가 이메일이라도 한 장 더 보낸다고, 우리 사이가 달라질 일이 없었으니까. 오빠는 좋은 직장을 포기할 필요 없고, 나는 영국으로 불려갈 핑계가 없다. 나는 나, 너는 너, 원래 있던 제자리를 지키도록 도와주는 것이 진짜 오빠를 위해서 좋은 일이라고 믿었다. ‘아프지만 보내준다, 사랑하지만 이별한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던 순정만화의 대사들이 마음속에 팍팍 와 닿았다. 나는 그만큼 이상호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 날도 평범한 구직의 날이었다. 강남에 있는 프랑스 화장품 회사에서 인터뷰를 보러 오라고 했다. 성심 성의껏 옷을 챙겨 입고 10분도 안 볼 인터뷰를 위해 하루 종일 기다렸다. 다섯시가 다 되었을 무렵, 검은 단발머리에 강렬한 레드 립스틱을 바른 여자, 노처녀가 분명한 여자가 내게 재미있다는 듯 질문했다.


“마드리드 다녀왔어요?”

“예.”

“랭귀지 (어학연수)를 마드리드에서 했구나, 나는 리옹에서 했는데, 리옹은 안 갔다 왔어요?”


리옹, 프랑스의 도시 아닌가. 한 번은 들려봤던 리옹, 아는 척하면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다. 어떻게 해야할까.


“리옹에는 내리지 않았습니다만.”

“오로지 스페인만 좋아하는 거에요? 그럼, 스페인 다른 city (도시) recommend (추천)좀 해주세요. 어디가 제일 좋아요?”

“여행하기 좋은 도시요?”

“뭐든. 지원씨 taste (취향)에 가장 favorite (마음에 드는) city (도시)."


재미있는 아줌마군. 최화정이었나? 한국어로 말 할 거면서 굳이 영어 단어를 지나치게 넣어 말해주는 그 토종 연예인보다 한 급 높은 이 붉은 립스틱의 아줌마와 함께 일하는 것은 재미있을까. 아니다. 재미없다면, 없던 재미도 만들어야지. 나는 성의 있는 대답을 생각해보았다. 나의 favorite city, 바르셀로나였다.


“바르셀로나에 꼭 가보시길 추천 드려요.”

“바르셀로나, why? 마드리드에서 랭귀지 한 거 아닌가?”

“바르셀로나는 사랑의 도시에요. 너무너무 아름다워요.”


이 이야기, 오빠랑 한 적 있다. 아마도 우리의 뽀뽀 해변에서 였던 것 같다. 바르셀로나더러 사랑의 도시라며 호들갑떠는 나를 보며, 오빠는 야자수가 사랑의 도시에 필수적인 조건인 줄 몰랐다며 웃었다. 미소가 번진다. 오래도록 붙잡아 놓았던 그의 조각이 여기서 이 순간에 비집고 튀어나오면 안된다. 나는 미소가 퍼지는 내 얼굴을 가만히 손으로 감싸 쥐었다. 그때였다. 내 입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과한 아이 컨택 해 주시던 빨간 입술이 갑자기 내 다리 쪽으로 시선이 움직였다.


“전화 오네요."

"네?"

"아, 지금 지원씨 포켓에서 Light(빛)가 보여서요. 셀폰을 무음으로 해 두었군요."

"네. 지금 인터뷰 보러 들어오니까요."

"Urgent call (급한 전화)인지 체크해 봐도 되요."

"아닙니다. 나중에 보겠습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나도 모르게 내 시선이 내 포켓으로 내려갔다. 정말이지 내 포켓에서 작은 핸드폰의 LCD가 ‘발광’중이었다. 음, 나는 받을 만한 전화가 딱히 없었다. 지금 이것을 꺼낼 필요 없었다. 아마도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신용대출 해주겠다는 전화겠지.


"하하, 다른 회사 인터뷰에서 통과되었다고 전화 오는 거라면, 아깝지 않을까요?"

"그래도 받지 않겠습니다."

"선착순으로 붙여준다는 전화였어도?"

"그러면 제 운명에는 그 회사가 없는 걸로 생각하면 되요."

"하하하하, 지원씨, I like that. (맘에 드네요)."


빨간 입술은 조금 상냥해진 얼굴로 물었다. 내가 생각해도 근사한 이 대답은 어디서 나온 걸까. 내 머리에서 나온 걸까. 나는 조금 우쭐해졌지만, 티나지 않는 표정을 짓느라 땀이 났다.


"아까 우리가 얘기 하고 있었던 것은 바르셀로나 이야기였죠? 인터내셔널 city of love (사랑의 도시)는 파리 아닌가?”

“네."

"오, 그런데도 여전히 바르셀로나가 사랑의 도시라고 생각하세요?"

"파리가 모두에게 사랑의 도시인 것은 맞아요, 그렇지만, 저 개인적으로, 아주 개인적으로는 바르셀로나가 사랑의 도시에요. 저한테 스페인에서 가 볼만한 곳, 제 취향의 도시를 추천해달라고 하셨던 거, 아닌가요?"


레드 립스틱은 웃음을 멈추었다. 나를 오묘하게 쳐다보는 립스틱, 입꼬리가 조금 올라갔다.


“맞아요. I like that, Seriously. (나 진짜 좋은 거 같네). 내게 휘둘리지 않고, persuade하는 것 (설득하는 것) 마음에 들어요. 이 애티튜드는 다른 인터뷰에서도 쓸 건가요? 아주 attractive (매력적)이네요."

"감사합니다."

“궁금해요. 왜 바르셀로나를 personal recommend를 (개인적 추천)주었을지, 알려주세요. 나랑 같이 일하면서 천천히요.”

“네?”

“유러피언 익스피어리언스 (경험)이 있는 것도 마음에 들고, 지원씨 좋네요. 그럼, HR팀하고 앞으로의 스케줄 얘기하세요.”


멀쩡한 사람도 생트집 잡을 것 같던 빨간 입술은 그렇게 웃으면서 회의실을 나갔다. 나는 얼빠진 사람처럼 목례를 했다. 내가 지금 인터뷰에서 바로 합격 통지를 받은 게 맞는가? 기뻐 날뛰어야 하는 순간 아닌가? 너무 엉겁결에 일어난 일이라 제 정신이 돌아와 주지 않는구나. 나는 얼른 내 핸드폰을 집었다. 나를 결정적으로 도와준 은인, 내 배위에서, 재킷의 포켓 안에서 발광해준 내 아이폰, 역시 너 값을 하는 구나. 나는 얼른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072-9174-9923’


부재중 통화가 온 번호는 모르는 번호였다. 안 받길 잘했다. 나는 중국에서 걸려왔을지도 모르는 '보이스 피싱'전화 한 통 덕분에 강남 한 복판의 화장품 회사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거머쥐고 만 것이다. 내 개인 정보를 1원에 팔아 넘겼다는 '옥션'에 감사드려야 할까.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서 또각 거리는 내 구두소리가 이 건물을 지나다니는 다른 사람들의 소리에 묻히고서야 겨우 합격의 실감을 하게 되었다. 나도 드디어 학교가 아닌 빌딩으로 서식지를 옮기는 구나. 그 때, 미소를 지어보려는 찰나, 전화가 울렸다.


[따르릉]

아, 집요한 보이스 피싱 아줌마의 목소리에도 상냥하게 거절해야겠다. 나는 목청을 가다듬어가면서 낯선 번호에 상냥하게 대답했다.


- 현지원입니다.

- 네?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요?

- 어디세요? 저 모르고 전화하신 거예요?


보통은 '현지원 고객님'을 먼저 뱉곤 하지 않니? 보이스 피싱계에도 초짜들은 티가 나는 구나. 이 아저씨, 너무 초짜 피싱이다. 나는 화나지 않았다. 당신 덕에 저는 아주 예의 바른 인턴으로 뽑힌 것 같다구요. 나는 입가에 미소까지 띄우며 되물었다. 그런데 전화를 거신 피싱 아저씨는 이상한 말을 했다.


- 번호 맞는 것 같습니다. 팀장님 어서 불러 오세요.


팀장님이라니. 너희는 떼거리로 하는데도 이 모양 이구나. 음. 2명 까지는 상냥하게 대해줄게. 나는 여유있는 자세로 팀장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지길 기다렸다.


- 현지원. 지원아.”

- 누구세요.”

- 나야, 이상호. 상호오빠야.”


상호오빠. 익숙한 목소리. 수화기에서 퍼져 나오는 것 같은 시트러스 향, 이 사람은 나의 바로셀로나 대천사, 가브리엘, 이상호였다. 근데, 이거 보이스 피싱 아니야? 오빠, 지금 이거 무슨 상황이죠?


- 오빠?

- 지원아. 나 서울이야. 번호가 바뀌었으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아, 정말 다행이다.

- 서울이라고?”

-응. 나 서울이야. 나 금방 전화했는데 안 받아서 걱정했어. 넌 어디니?


금방 전화했다는 말. 믿을 수 없다. 나의 천사 가브리엘은 무음으로 울리지 않는 벙어리 전화기에서도 스스로 빛을 내며 인터뷰에서 나를 건져 올렸다고? 이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사람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것일까. 나는 벌써 눈물이 차오르기기 시작했다.


- 오빠, 어디 있어? 오빠 서울이라는 게 무슨 소리야?

- 아, 나 여기 어디인지 모르겠는데, 회사야. 아까 여기가, 강남. 음. 강남이래.


강남. 어디든 30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이상호가 와 있다. 만나고 싶다. 만나고 싶다. 내 목소리는 떨리기 시작했다.


- 놀러왔어? 누구랑 온 거야?”

- 지원아. 나 회사 왔다구.”


오빠의 목소리도 조금 떨리는 것 같다고 느끼는 것은 나의 착각일까. 촉촉한 목소리, 그리워서 닳아 없어질 것 같던 목소리는 나에게 속삭였다.


- 나 서울에서 근무하기로 했어.”

- 서울 회사?”

- 응. 나 서울에서 일할 거야. 디아지오 코리아. 한국 법인에서. 이거 자리가 확정이 안 나서 연락을 못했어. 놀라게 해 주고 싶었거든, 근데 오늘에야 전화하네. 잘 …… 있었어?


마드리드가 생각난다. 당신은 바르셀로나에서 택시를 타고 마드리드로 날아온 전력이 있다. 그런데, 잠깐, 영국에서 서울까지는 13시간은 걸리는 것 같은데, 여기도 택시를 타고 올 수는 없어. 당신은 어디란 말인가.


- 오빠. 서울…… 왔다고? 서울이 옆집이야?

- 너 보고 싶어서 왔어. 너 만나러 가고 싶어.

- 잠깐만.

- 서울에서 아는 사람은 너 뿐이고, 서울에서 보고 싶은 사람도 너 뿐이야. 나랑 서울에서 시작해줄래?

- 아아아악, 도대체 이런 얘기를 왜 전화로 해!! 나도 한 번 무릎 꿇고 프로포즈하는 남자앞에서 우는 시늉이라도 해 보자고!! 도대체 맨날 왜 전화로 하는 데!!! 당장 내려와. 내가 달려갈게. 나도 강남이라고!! 회사 빌딩 말을 해봐!!

- 하하하하하. 알았어. 여기는.


나는 전화기를 잠시 손에 쥐고 씩씩거렸다. 지금 내뿜는 콧김은 화가 나서 뿜는 것이 아니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 뿜는 것이다. 나는 하늘을 향해 나도 모르게 소리 질렀다.

나의 천사는 판타지라고 비웃던 브리짓 존스가 울며 떠나가도록 영국을 떠나 서울에 날아왔다. 이제 나는 호피무늬 빤스를 입고, 오빠는 검은 코트를 입고, 눈 내리는 런던, 아니 서울의 한 복판에서 뽀뽀할 타이밍이야. 세상에. 이 더운 여름에 눈이 내리지 않는 것이 아쉽구나. 나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결국 우리는 만났다. 결국 이렇게 다시 만났다. 당신이란 사람을 포기하겠다고 이렇게 참았는데, 오빠, 절대 오지 않겠다는 이 서울에, 나를 만나러 왔다. 나는 이제 이상호를 만나러 강남역을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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