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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ima Feb 23. 2022

늙어가는 나에게 닥친 두려움 1

One page a day project

어느 의사 선생님의 응급실 이야기를 읽었다.


갑자기 실려온 어떤 환자의 몰골은 노숙인의 그것과 같았다. 간경화 말기에 이른 채 손 한번 써보지 못하고 스스로 구급차를 불러 병원에 실려온 남자는 심한 황달에 복수가 차오른 볼록한 배가 눈에 띄게 심각했고, 그를 본 의사 선생님은 그가 마지막일 것이라 짐작한 채 본인의 상식에 비추어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아내분은 있나요?"

"네, 그러나 이혼했습니다."

"자녀분들은?"

"연락 안 한지 오래입니다."

"이렇게 아프도록 왜 가만히 계셨어요."

"현장 다니다 아파서 누워버렸는데, 집 밖을 나갈 수가 없었어요. 아파서."


선생님은 본인의 기준에서 환자를 다그쳤던 점을 몹시 후회했다. 아픈 몸, 호소할 곳 없는 고독. 결국 누워버렸는데 보이는 것이라고는 천장. 할 수 있는 것은 굴러다니는 술병을 손에 잡는 것. 그래서 더 누워버린 그에게 왜 누워있었냐며 지적한 본인을 힐책했다.


인류애가 끌어오르는 따뜻한 그의 시선이 머릿속에 남아야 했건만, 읽는 내내 나에게는 누워서 천장만 봤다는 환자의 모습이 눈앞에 잔상으로 남았다. 지독하게 고독했을 환자의 시간. 그는 혼자였다. 그가 집에 돌아와 아프기 시작했을 때, 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사실,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아빠가 죽고 엄마는 나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해졌다. 가끔 혼자 설움에 복받쳐 울먹거리며 이렇게 말했다.


"니는 나를 끝까지 책임져야 한데이."


20년 전부터 누누이 들어오던 저 말을 들을 때마다 콕 찝어 말할 수 없었던 무겁고 답답한 부담감은 나를 죄책감 느끼게 했았다. 하지만, 지금은 덜 느낀다. 엄마는 '나'라는 사람에 대해 오랜 시간, 독립적인 인간으로 보기보다는 본인의 소유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라는 판단을 내리게 된 덕분. 어렵고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나에 대해, 내 인생에 대해 중심을 잡는 일 중에 하나는 나는 나로서 엄마에게 최선을 다하면 될 뿐, 소유물로서 행동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스스로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일대 전환점처럼 엄청난 일이었다. 온갖 저주(?)를 퍼붓는 엄마를 모질게 두고 나는 불편한 마음으로 독립했으나 그 이후, 정말이지 나는 행복해졌다.


일단 독립된 공간에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그 시간들이 행복했다.

코딱지만한 오피스텔에서 그야말로 쥐죽은듯 조용한 순간, 묘하게 안정감을 느꼈다. TV도 사지 않았다. 물론 핸드폰이 터져라 Youtube만 보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적막이 흐르는 이 공간에 혼자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친구를 부르지도 않았다. 근처에서 만나도 오피스텔로 올라와 본 친구는 정말 손에 꼽을 정도인데, 이 자발적인 고독은 나를 이제서야 심리적으로 안정되었다고 느끼게했다. 지난 6년, 나는 행복했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책을 보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심심하면 근처 커피숍을 돌아다니다 다시 들어왔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 가습기 돌아가는 소리, 가끔은 에브리봇 혼자 씩씩하게 일하는 소리마저도 나를 행복하게 했던 것 같다. 그러다 강아지를 들였으나 그것은 외로워서가 아니었다. 나는 마치 교통사고처럼 내 강아지를 만났다고 자부한다. (다만, 이 고독한 바이브는 작은 강아지에게도 영향을 미치는지, 이 강아지는 짓지 않는다. 참 요상한 일이다.)


그러던 어느 날, 나도 겁이 난 적 있다.

내가 이렇게 자다 눈을 뜨지 못하면, 누가 제일 먼저 발견할까.

내 핸드폰의 주요 통화목록을 살펴봤다.


엄마.

회사.

결혼한 친구A,

미혼인 친구B.


끝.


그 찰나의 섬찟함을 기억한다.

나 스스로를 몹시 만족시켰던 극한의 고독감은 그 순간 내 온몸을 소름 돋게 했다. 안정감을 느낀다고 착각하고 있었던가. 결국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 노인이 된다면, 엄마도, 회사도 저 목록에서 사라지는 순간, 나는 철저하게 혼자일 것이다. 내가 죽었을 때, 별 연도 없던 사람에 의하여 우연히 발견되는 것은 몸서리쳐지는 일이다.


나는 어떻게 죽어야 할까.

늙어가는 나는 어떤 준비를 해야할까.

요 근래 더더욱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 때, 마침 응급실에 들어온 환자의 무기력한 이야기를 읽어버린 것이다. 나는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러게, 누구를 만나. 늙으면 외롭다고."


내가 왜.

혼자가 편하다고, 이렇게 편할 줄 몰랐다고 스스로 선택한 서울 한 복판 극한의 묵언 수행 라이프가 나름 만족스럽다고 자위했건만. 그래서 '누구 만나라'는 얘기는 코웃음칠 수 있었는데 오만했던 것일까. 이제는 늙어 쓰러지면 서로 간병인해줄 필요가 있으니 함께 봐줄 누군가는 보험으로 들라는 혹할 이야기로 들린다. 그치만 그건 또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겠지. 그 환자도 누군가를 만났었다. 다만, 그의 고독한 마지막에는 아무도 없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야겠다.


늙어가는 나를 발견하고,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흘려보내길 수 없이 반복하는 무책임한 나 자신을 놓아버린 나를 발견하고, 그래도 이대로도 행복하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나마 사지 멀쩡하고 오장육부 붙어 있으니 가능했던 것이다. 나날이 앉아있기 버겁고, 뭐만 하면 누워야 될 것 같은 느낌적 느낌에 시달리다보면, 나는 50이 될 것이고, 나는 노인이 될 것이고, 나는 지금보다 더 아플 것 같다. 그러면, 아마도, 나는.


아, 정말이지 무섭다. 이럴 시간에 런닝 머신이라도 타야하는 건가. 궁상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아이허브에서 영양제 한 박스 사다 날라야하는 것인가. 다 귀찮고 다 싫었고, 그런 유난은 정말 꼴보기 싫었는데 갑자기 왜 이런 것이 생각나는가.


왜 하필 이 두려움이 기억 난 것인가. 한 페이지 써 보겠다고 마음 먹자마자!!


오늘의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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