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만달러 모노폴리 사기사건이
가능하면, 인생의 후반전은 글 쓰는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다는 욕심을 키우고 있다. 그러나 이미 20년이나 되는 세월을 게임을 만들면서 지내왔으니, 나는 아마 게임을 만들던 사람으로 기억될 것이다.어떤 일이건 그 일을 하다보면, 그 일이 갖는 사회적인 가치라는걸 생각하게 된다. 게임은 악의없고 허튼 장난으로서 이미 충분히 의미있다고 생각하지만, 게임을 활용하는 맥락에서, 그리고 게임을 만드는 입장에서 게임이라는 매체에 담을 수 있는 가치에 대해 생각할 때가 있다. 그때는 자주 모노폴리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한다.
모노폴리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된 것은 그저 호기심으로 읽었던 Games of History 라는 책에서였다. 이후 모노폴리 관련 스캔들을 다룬 Billion Dollar Monopoly Swindle(천만달러 모노폴리 사기사건) 이라는 책도 구해 읽으며, 이 어마어마한 히트작에 관련된, 게임보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알게 됐다.
혼자만 알기 아까웠던 이야기를 정리해서발표했던 것은 2003년 여름에 코엑스에서 열린 KGDC 라는 게임 개발자 콘벤션에서 였다. 그 이후 몇달간 칼럼을 연재했던 경향게임즈에 칼럼으로 한번 썼었고, 2010년 경에 교육방송에서 이 주제에 대해 루면서 이제는 많은 사람들이 알게되었을거라 생각한다.그러나 아직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수많은 사람이 거짓임을 밝혀낸 오늘날에도 잘못된 정보는 뻔뻔하게도, 대형회사의 마케팅력에 힘입어 계속 재생산 되고 있다.
게임업계에서는 가끔 어마어마한 판매고를 기록하는 히트작들이 나온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천만개가 넘게 팔린 게임은대략 10개 정도 되며 판매 수많은 유튜브 2차창작물들을 만든 마인크래프트 같은 게임은 1억개를 넘게 판매했다. 2위인 디아블로3이 3천만개이니 압도적인 히트작이다. 그러나 모노폴리의 누적 판매는 2억개를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모노폴리는 간단한 게임이다. 주사위를 굴려 그 눈금만큼 자신의 마커를 움직이는, Roll and Move라 불리는 몇 천년의 역사를 지닌 원시적인 시스템과 특정 장소에 도착하면 그 장소를 구입 할 수 있고 타인이 자신이 구입한 위치에 도착하면 거기서 사용료를 받는 룰을 더한 것이다. 자칫 단조로울 수 있는 시스템을 보완하기 위해서 감옥, 사회 복지 기금 등 행운요소도 더해졌다.
게임의 목적은 게임에 참가한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이다. 자신의 말이 주어진 보드 둘레를 한 바퀴 돌면 얼마 안 되는 급여를 받지만 내 부동산으로 타인에게 사용료를 받는 것에 비할 수는 없다.
보드위의 부동산들은 처음에는 누구의 것도 아니지만 언젠가는 모두 누군가의 소유물이 된다. 그리고 운수 나쁘게 타인의 부동산에, 그것도 그 사람이 많은 돈을 투자하여 비싼 건물을 지어놓은 부동산에 도달한 사람은 자신의 부동산을 팔아서라도 그 사용료를 내야만 하고 곧 플레이어들은 한명씩 파산하게 된다. 승자는 약 40cm X 40cm 크기의 보드와 몇 개의 플라스틱 마커가 구성하는 이 작은 세계에서 경쟁자들을 전부 파산 시키고 살아남는 사람이다. 결국 누군가 이 세계를 독점 (모노폴리) 할때 게임 플레이는 끝난다.
게임패키지 안의 설명서에 따르면 이 게임은 1930년 경제 대공황 당시 필라델피아에 살고 있던 찰스 대로우라는 실직자가 만든 것이다. 찰스 대로우는 이 게임을 통해 백만장자가 되었기에 보드게임 개발자를 꿈꾸는 사람들이 흔히 언급하는 신데렐라 스토리로 알려져왔다. 모노폴리는 오랫동안 자본주의를 상징하는 게임으로 알려졌고, 그래서 냉전시기에 모노폴리는 소련에서는 금지된 게임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이야기는 전부 잘못 알려진 것이다.. 먼저 이 게임을 만든 것은 찰스 대로우가 아니다. 그리고 이 게임은 게임플레이가 암시하는 것 처럼 자본주의적인 이데올로기가 아닌, 오히려 굉장히 반 자유주의, 자본주의 적인 급진적 경제이론의 영향을 받아 제작 된 게임이다. 모노폴리의 성공 이면에는 게임을 통해 자신이 믿고 있는 사상을 사람들에게 알리고자 한 용감한 시도가 있었다.
이 모든 이야기는 19세기말 20세기초를 치열하게 살다간 엘리자베스 메기라는 한 여성에서 시작된다.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1866년에 태어난 매기는 시대를 앞서 나간 여성이었다. 여성선거권을 운동이 태동 하던 시기에 살았던 그는 법정 속기사라로 일하던 작가였고, 효율적인 타이핑 머신을 발명한 발명가 였으며 또 훌륭한 배우이기도 했다. 그러나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긴 것은 게임 디자이너로서다.
1903년 매기는 그녀가 랜드로드 라 이름 붙인 게임의 특허를 출원했다. 1년 후 통과된 그 특허에서 그녀는 게임의 목적을 “가능한 한 많은 부를 획득하는 것” 이라 밝혔다. 모노폴리의 매뉴얼에 적힌 게임의 궁극적인 목적과 동일하다. 그녀의 랜드로드 게임은 모노폴리나 모노폴리의 아류인 부루마블을 즐겨본 사람에게는 굉장히 익숙한 게임이다. 랜드로드는 40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진 4각형의 보드로 구성되어 있고 철도회사와 감옥이 있으며 그 감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두 눈금이 같은 주사위 굴림을 하던지 아니면 50불을 은행에 지불해야 한다. 모노폴리와 똑같이 세금시스템이 있으며 수도와 전기 회사가 있다. 모노폴리에서 “Free Parking" 구역이라 표시되어 있는 부분은 ”Public Park" 라고 표시되어 있다.
매기가 이 랜드로드 라는 게임을 만든 것은 단순한 재미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그 자신이 신봉하고 있던 경제 이론을 알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점의 폐해를 알리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이 게임을 만들었다.
1879년 경제학자 헨리조지는 “진보와 빈곤” 을 출간했다. 그는 지가 상승에 따르는 불로소득의 발생은 단지 몇 명의 지주(랜드로드) 들에게 이익이 되는 반면에 대부분의 세입자, 소작인 등 부동산 임차인 들을 파산으로 내몬다는 사실을 밝혔다. 지가의 상승은 곧 부동산 임차비용의 증가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젠트리피케이션이 상식이된 오늘날에는 일상적인 것이지만,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대단히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는 모든 정부의 세입이 땅에 대한 세금만으로 구성되야 한다는 내용의 ‘단일세’ (the single tax) 이론을 주장 했다. 빈익빈 분익부가 절정에 달했던, 대공황 당시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리지 필립 매기는 열렬한 단일세 신봉 주의자가 되었고 헨리 조지의 경제 이론을 널리 알리기 위해 그녀의 게임, 랜드로드를 만들었다.
Ralph Anspach 가 쓴 저서 “The Billion Dollar Monopoly Swindle” 에 따르면 랜드로드는 발매 후 프린스턴 대학을 비롯 미국 서부지역 대학가를 중심으로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펜실바니아 대학의 와튼 스쿨 교수였던 스콧 니어링은 랜드로드 게임을 그의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시연함으로써 독과점의 폐해를 예시 하는데 활용했던 것으로 전해 진다.
모노폴리(또는 부르마블)을 플레이 해본 사람을 눈치 챘겠지만, 독과점의 폐해를 고발하기 위해 만든 게임에서 스스로 승자가 되기 위해 돈을 모으는 과정이 재미요소가 된다는 것은 하나의 아이러니다.
리지 필립 매기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랜드로드를 처음 특허 출원 한 것은 1904년 이었지만 1923년 다시 재 출원을 하며 매기는 이 게임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바꿔 기술했다. “이 게임의 목적은 단지 플레이어들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 중략 ~ 부동산의 소유자는 다른 회사들에 비해서 큰 이점을 갖고 시작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 게임을 통해서 어떻게 부동산 에만 부과되는 단일세가 부동산 투기를 막을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1932년 매기는 두 번째 프린트 버전을 출판했다. (첫번째 프린트가 소진된 후 랜드로드는 헨리의 이론을 신봉하는 사람들과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핸드메이드로 만들어져 플레이 되었다.) 그는 보다 더 노골적으로 헨리의 단일세 이론을 표현한 게임 “Prosperity"를 만들어 랜드로드 2판의 박스에 함께 포함시켰다. 처음에 이 게임을 구입하고 플레이 하는 사람들은 조지 헨리의 단일세 이론 신봉자들 이었다. 그러나 곧 이 게임의 유저층은 대학 사회의 자유주의자들로, 그리고 일반인들로 이어졌다. 그리고 대부분은 일반인 들은 생경한 경제이론을 체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즐기기 위해 이 게임을 플레이 했다. 그리고 그에 따른 변화가 시작되었다. 찰스 대로우 라는 사기꾼이 랜드로드를 모노폴리라는 이름의 게임으로 표절하여 Parker Brothers 사를 통해 출판 함으로써 이 게임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알리기 위한 게임이 아니라 자본축적 과정을 즐기는 게임이 되었다.
처음 이 게임 시스템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루스 호스킨스라는 한 퀘이커 교도였다. 그는 자신이 핸드메이드로 제작한 랜드로드 게임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게임을 좋아하는 친구들과 거의 매일밤(!) 플레이를 즐겼다. 그리고 몇가지 시스템을 그들의 입맛에 맞게 변화시켰다. 그들은 랜드로드에 있었던 경매 시스템을 단순한 고정가격 시스템으로 바꿨다. 이 변화는 경제 개념이 자리 잡지 않은 아이들도 이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었고 랜드로드 게임이 온가족이 즐기는 게임이 될수 있게 만들었다. 루스 호스킨스와 그 친구들은 그들 자신의 버전을 만들면서 자신들이 사는 Atlanta city의 이름을 붙였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모노폴리의 모습은 이렇게 루스 호스킨과 그의 퀘이커교도 친구들로 하여 거의 완성되었다.
1889년에 매릴랜드 지역에서 태어나고 피츠버그에서 자란 찰스 대로우는 결혼 후 저먼타운으로 이사했다. 배관공이었던 그는 1930년대 경제 대 공황 때 직업을 잃었다. 가족들의 생계를 꾸리기 위해 닥치는 대로 잡일을 해나갔지만 그것마저 일정치 않았다. 그리고 그는 장난감으로 눈을 돌렸다. 그는 브리지 게임을 위한 점수판을 계량해서 만들었지만 별로 잘 팔리지 않았다. 나무를 잘라서 직소 퍼즐을 만들어 ‘버그’ 라는 이름으로 팔아 보았지만 이 역시 신통치 않았다. 찰스 대로우가 호킨스가 개량한 아틀란타 버전의 랜드로드 게임을 소개 받았을 때 그는 3년째 실업 상태였다.
이 절박한 사내 앞에 나타난 랜드로드는 그에게 미래를 약속하는 것 처럼 보였다. 그는 그 당시 값싸게 구할 수 있었던 천으로 보드를 대신하고 핸드메이드로 게임을 만들었다. 4각의 랜드로드 보드(현재 의 모노폴리와 같은)를 원형의 천으로 대신하였지만 지명에서부터 게임 시스템 까지 거의 모든 부분이 원작과 같았다. 그는 보다 화려한 색을 사용했고 몇가지 일러스트레이션을 첨가했다. 거기에는 오늘날 모노폴리 게임의 상징이 된 몇가지 중요한 아이콘들 즉 감옥표시, 프리파킹 구역의 붉은 자동차. 붉은 화살표와 찬스카드를 위한 물음 표 등이 새롭게 더해졌다.
1933년 대로우는 그의 게임 ‘모노폴리’의 특허를 취득했고 (당시의 허술한 지재권 관리 시스템 때문에 랜드로드와 거의 유사한 모노폴리의 특허 취득이 가능했다.) 그 게임은 곧 인기를 얻었다. 처음에 하루에 두 개씩 일일이 손으로 만들었던 모노폴리는 수요가 늘어감에 따라 공장에서 인쇄되게 되었고 전문적인 디자이너의 손끝에서 태어난 유명한 모노폴리맨 캐릭터가 덧붙여졌다. 모노폴리는 점점 더 인기를 얻었지만 대로우가 그 당시 가장 큰 장난감 회사였던 파커 브라더스와 밀튼 브래들리 사를 찾아갔을 때 그들은 이 게임을 구매하기 원하지 않았다. 대중적인 인기를 얻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게임이라고 생각 한 것이다.
모노폴리를 만들어 팔아 약간의 목돈을 손에 쥔 대로우는 여기서 일생 일대의 모험을 한다. 그가 만들 수 있었던 가장 높은 수준의 퀄리티로 7500개를 대량 생산한 것이다. 이 새로운 버전의 모노폴리는 곧 높은 인기를 얻었고 그 판매 추이에 주목한 파커 브라더스는 대로우와 계약한다. 그리고 부도 위기였던 파커브라더스는 엄청난 이득을 거둔다. 누적 판매 2억개를 넘는 수퍼 베스트셀링 게임 모노폴리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모노폴리가 유명해 지면서 당연히 당시에 생존해 있던 리지 필립 매기와 특허권 분쟁이 생겼다. 그때 대로우로부터 모노폴리의 판권을 취득한 파커 브라더스는 그들의 히트작을 보호하기 위해 리지 필립 매기에게 당시 돈으로 현금 500불 과 리지 필립 매기의 다른 게임 3가지의 출판을 조건으로 리지 필립 매기가 1923년에 재등록한 (1904년에 취득한 특허는 기한이 만료되었다.) 랜드로드 보드게임의 판권을 사들인다.
대로우의 모노폴리가 호킨스가 만든 아틀란타 버전 랜드로드의 표절한 흔적은 아직도 남아있다. 루스 호킨스는 아틀란타의 지명 "Marven street"을 "Marvin street"으로 오기 했고, 지금 세간에 유통되는 모든 모노폴리에는 Marvin street으로 표기되어 있다. 모노폴리에 대한 이런 비하인드 스토리는 Ralph Anspach의 저서를 통해 밝혀질 때까지 감춰져 있었다.
리지 필립 매기가 만든 랜드로드와 모노폴리 이면의 이러한 진실은 세월이 지나면서 조금씩 잊혀 져 갔다. 그리고 파커 브라더스가 찰스 대로우라는 한 실직자가 게임 발명을 통해 백만장자가 된 이야기를 모노폴리의 프로모션을 위해 활용하면서 찰스 대로우는 모노폴리의 발명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또한 특허청에 등록된 모노폴리의 판권은 찰스 대로우의 것이었기에 파커 브라더스는 찰스 대로우를 모노폴리의 발명자로 알릴 수 있었다.
1936년, 모노폴리가 파커 브라더스를 통해 출판 된지 겨우 일 년 만에 모노폴리는 백 팔십만개라는 놀라운 판매고를 기록한다. 그들은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한달에 200,000개씩의 게임을 만들어야 했다. 사람들은 곧 그 인기가 식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단지 종이돈과 주석말, 종이 판으로 이뤄지는 세계에서 백만장자가 되는 꿈을 이루고 싶은 사람들의 수는 점점 더 늘어났다.
이렇게.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점의 폐해를 알리려 발명된 랜드로드 게임은 독점하는 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즐기는 게임으로 변질 되었다. 그리고 냉전 시대에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들로부터 금지되는 게임이 되었다. 그러나 반면에 모든 자본주의 진영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게임의 역사에 최고의 히트작 중 하나로 이름을 남기게 되었다.
통제 되지 않는 자본주의 사회의 비극을 알리기 위해 만들어진 게임이 오히려 대표적인 자본주의 게임이 되어 버린 것은 분명 역사의 아이러니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아돌프 히틀러가 독일제국을 건립하기 위해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프랑스령 코르시카 출신인 나폴레옹이 위대한 프랑스 제국을 건설하게 된것, 공산주의를 혐오하던 러시아 정교 사제가 주도한 데모가 러시아 혁명을 촉발 시킨 것 처럼, 역사란 사실 이러한 아이러니로 가득 차 있고 오늘날 우리는 모노폴리라는, 보드게임의 역사를 통해 이러한 아이러니를 발견한다.
100여년이 지났지만, 엘리자베스 매기가 랜드로드를 만들며 꿈꿨던 사회는 실현되지 못했다. 젠트리피케이션은 전세계에서 진행중이며, 대도시에서 성실한 임금노동자가 저축을 통해 자신의 집을 산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100여년 전에 살았던 비범한 여성의 이름의 이름과 그 꿈을 기억하고 싶다. 저 게임을 플레이하는 수 많은 사람들이 100년전에 살다간 한 여성의 이야기를 기억하는 것, 우리가 사는 세상은 분명히 한구석 잘못되어 있고 그것으로 인해 사람들이 부당하게 고통받고 있으며, 그것을 치유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고 믿는 것은 분명히 의미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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