百尺竿頭 更進一步
百尺竿頭 更進一步
백척간두는 그저 형세를 나타내는 말이요, (갱) 진일보가 뒤에 나와야 의미가 있는 말이 된다.
백척간두라는 말은 흔히 그저 위태로운 지경으로 잘못 이해되지만, 동시에 더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을 만큼 첨단의 위치에 있는 상황을 의미하기도 한다.
피할 수도 있는 위험을 고스란히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개인의 어리석음이다. 불필요한 위험은 피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사업이건 학문이건 스스로와 대상을 똑바로 보고 문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 나서는 사람은 결국 스스로 백척간두의 위치에 선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백척간두에 선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 바람직한 것이다.
이건, '못 먹어도 고' 하는 도박꾼의 심리나, 투자를 받은 돈으로 사장 실 인테리어부터 하는 어리석은 사업가가 처하는 위험과는 다르다. 그들이 처한 것은 백척간두가 아니다. 평지에 구덩이가 파여 있는데 거기 발을 딛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백척간두 역시 위험을 포함하고 있긴 마찬가지이다. 자신이 원하지 않더라도 낭중지추에는 누군가 찔리기 마련이고 그건 곳 위험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세상에 뾰족한 사람이 되는 것 자체는 잘못된 일이 아니다. 남을 찌를까 봐 두려워 무디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과연 그게 바람직한 것인가? 세상에는 못날 뿐만 아니라 용렬함까지 갖춘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그저 빼어나기만 해도 미움받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때 문제가 있는 것은 미워하는 자이지 빼어난 자가 아니다. 남에게 미움받는다고 해서 스트레스를 받을 필요가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인을 존중하되 타인의 어리석은 말은 귓등으로 흘려버리는 기술이 이래서 중요하다. 적을 만들기를 너무 두려워할 필요도 없다. 무슨 일이든 제대로 하려 들면 적이 나타나기 마련이고, 세상에 어떤 인간들은 차라리 적이 되는 게 친구가 되는 것보다 더욱 생산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험은 위험이니 그 위험을 정말로 감당할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다. 그래서 나는 적당한 교활함을 갖추는 것이 미덕이라고 믿는다. 그 교활함으로 문제의 해결과 위험 사이에 난 작은 틈을 메꾸며 사는 것이 바위에 부서지는 달걀신세가 되는 것보다 나으며, 그런 타협에 능해야 큰 일을 할 수 있다. 때론 악을 저지를 줄도 아는 교활한 간웅이 고담준론을 입에 담는 순진한 영웅보다 이 세상에 더 큰 일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항상 옳고 그름만 따지는 입진보는 사실 이 세상에서 정말로 하는 일을 보면 해로운 결과가 나오는 경우는 너무 흔하다. 세상의 옳고 그름은 그들이 이해하는 테두리를 너무 자주 벗어난다.
그런데 조심할 것은 백척간두가 사회의 문제와 관련이 있는 경우 그 위험의 정도가 커진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현재 조국 같은 사람이 겪는 문제는, 근본적으로 그가 이 사회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엘리트지배의 구조에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아이 상장 이야기는 장난 같은 거고 상장 따위는 고사하고, 손쉽게 교수들끼리 자제들 논문실적 품앗이 하는 것만 원리원칙대로 털어도 대한민국 대학 가는 곡소리 날 것이다.
사실 우리가 엘리트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정말로 세상을 영속적으로 지배할 힘을 갖고 있는 지도 의심스럽다. 그 힘들이 지속되는 것은 사실 그들을 동경하고 그들 중 하나가 되고 싶은 욕망에 벗어나지 못해, 그들에게 지배력을 헌납하는 어리석은 개체들 덕분이고, 세상에 이런 개체가 많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불행히도 세상에는 항상 일정한 비율로 그저 이용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층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 정규분포곡선이 보여주듯이? 그저 플랑크톤이나 뜯어먹다가 상위포식자에게 양질의 양분을 공급하는 게 자신의 역할인 바닷속의 작은 물고기들처럼. 사회의 교육은 바뀌어야 하지만 내 자식은 서카포를 가야 하는, 집값은 내려야 하지만 내 집값은 올라야 하는 사람들이 이 사회에 다수를 차지하는 덕에 무지와 탐욕을 레버리지로 지배구조를 이어가려는 사람들은 계속 힘을 얻는다. 그러니 거기에 브레이크를 걸려고 하는 사람들은 조국 같은 처지가 되는 것이다. 조국 같은 이가 보호하고 옹호하려 했던 사람들 중에도 그를 욕하는 이가 많은 건 어쩔 수 없다. 우리가 정규분포곡선에 항의할 수 없는 것처럼 세상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무지라는 상수를 고려해야 세상을 실제로 변화시키는 것을 계획할 수 있다고 믿는다
거창하게 사회문제를 들지 않고, 자신의 개인적인 작업에 있어서도 백척간두 갱진일보는 큰 의미가 있다. 아니 우리의 삶이 우리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것이 되기 위해서 우리는 스스로를 백척간두의 경지에 놓아야만 한다. 인간이 스스로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에 이 본질적으로 위태로운 형세를 반드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모든 문제를 우리가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삶과 사회에 존재하는 문제를 발견하지 못하거나 그걸 해결하려 나서지 못하는 퇴영이 답일 리는 없다. 대강 살면 오래 살긴 좋겠지만 살아남는 게 삶의 목적인 삶이라면 거기서 대단한 의미를 찾는 것도 우습다.
그러니 위태함을 불러들이는 것에 두려워 않고 백척간두까지 앞으로 나아가는 것은 성실함과 용기고, 그 위태함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인지 살펴보는 것은 지혜로움이 된다. 용기와 지혜로움이 있다면 우리 삶은 우리가 어떤 위치에서 무얼 하고 살던지 그다지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백척간두에 오르는 처지 자체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