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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희권 Dec 23. 2022

사막에 두고온 것

세상의 모든 시절(가제) 단행본 수록부분

 2023년에 멜라이트 출판사에서 간행될 세상의 모든 시절(가제)의  일부입니다.


 아내는 가끔 나를 놀라게 한다. 그녀는 내 총각 시절 옷들 중 다른 여자가 선물한 옷을 기가 막힌 정확도로 골라내는 능력이 있다. 자기 남자의 소유물 중에서 다른 여성의 흔적을 찾아내는 아내의 초자연적인 능력은, 복잡한 쇼핑센터에서 자기가 원하는 물건까지 기가 막히게 길을 찾는 능력과 함께(내가 돈을 지불할 때 그 능력은 증폭된다.) 두려우면서 감탄스러운 부분이다.


 그 사진을 발견한 날도 그랬다. 오래된 앨범 속의 나는 여러 외국인들과 웃으며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었다. 1997년에 호주의 서쪽 끝, 퍼스라는 곳에서 찍은 사진이다. 아내는 갑자기 그중 눈이 크고 키가 큰 여학생을 짚으며 내게 말했다. "당신 얘 하고 사귀었지?"   "히익!"

 나는 정말 놀랐다.  모모코(가명)와 나는 멀리 떨어져서 카메라를 바라보며 웃고 있을 뿐이다. 아내는 도대체 어떻게 눈치챈 것인가? 하지만 모모코와 나는 연인이 되진 못했다.     


 1997년 겨울 호주로 떠난 것은 즉흥적인 결정이었다. 졸렬한 영어실력을 보완하고 싶었다. 한국사람을 피하기 위해 인종차별로 유명한 서호주의 대학을 골라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냈으나 답이 없었다. 휴가 기간이었다. 잠시 고민 후 일단 떠나기로 했다. 적어도 그 나라는 노숙자들도 영어는 할 테니 말이다.

 도착 후 배낭여행자 숙소에서 지내다가 개강일이 되자 학과 사무실로 향했다. 개강일 배낭을 짊어지고 찾아온 나를 본 직원은 좀 어이없어했지만, 반이 배정되었다. 역시 걱정할 필요 없었다.      

  퍼스는 스완리버라는 강이 흐르는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나는 수업이 끝나면 도서관에 가서 문 닫는 시간까지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남아서 공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는데, 언제부턴가 조용히 구석에서 책을 읽는 키 큰 일본 여학생이 한 명 있었다. 당시 한국에서도 유행하던 일본 패션잡지에서 튀어나온 것 같았다. 이름이 모모코라는 것을 나중에 알게 됐다.


  호주는 참 심심했다. 세상에 스마트폰 같은 것은 없었을 때다. 주말에 열리는  한국과 일본 학생들의 국가 대항전은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여학생들은 관중석에서 구경을 했고 끝나면 모두 같이 맥주를 마시러 갔다. 모모코는 거기 오지 않았다. 그녀는 로비라는 호주인 집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다. 나는 젊었고, 한국에 두고 온 여자 친구 따위는 없었으며 그녀는 예뻤으니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나는 다른 나라 여학생들에게 마구 들이대는 몇몇 친구들이 민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느 주말, 친구들과 근교를 여행했다. 모닥불 주위에 둘러앉아 맥주를 마시는데, 로비가 내게 다가왔다.  혹시 사귀는 사람이 있냐고 물었다. 없다고 하자 노골적으로 혹시 자기 집에 하숙을 살고 있는 모모코는 어떠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 좀 뜬금없었지만, 나는 모모코는 예쁘고 매력적이라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갑자기 고쳐 앉은 로비는 내 어깨를 툭 치며 이야기했다. "토마스, 지금 뭘 하고 있는 거야? 내일 학교에 가면 바로 데이트를 신청해. 모모코는 항상 시간이 많아."      


  토요일 나는 스완리버 옆에 있는 레스토랑에서 모모코를 기다리고 있었다. 무척 더웠지만 강가에서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하늘하늘한 하얀색 면 치마를 입고 모자를 쓰고 걸어오던 모모코의 모습이 지금도 또렷하더.  나는 세상에서 제일 예쁜 여자 옷은 하얀색 면치마라고 생각한다.

 점심식사를 하고 우리는 강가를 산책했다. 스완리버에는 검은 백조가 살았다. 블랙 스완이란 건 진짜로 있다. 커다란 백조들은 강가를 헤엄치다가 우리가 강가로 가자 다가왔다. 갑자기 백인 아이가 우리를 보고 울기 시작했다. 아마 동양인을 처음 봤으리라. 부모가 달래는 동안 나는 다정하게 아가에게 이야기했다. "Don't worry Honey, We don't bite." 그리고 멀어지며 조용히 한마디 더했다. "Usually". 모모코가 큰소리로 웃기 시작한 건 그때였다. 나중에는 눈물까지 흘리며 웃었다. 모모코가 그렇게 크게 웃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우리는 함께 오래 걸었고 정말 많은 이야기를 했다. 나는 모모코가 오사카에서 대를 이어 음식점을 하는 집안의 외동딸임을 알게 됐고 모모코는 내가 온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철학을 공부하는 중이라는 걸 알게 됐다. 모모코는 자기 집에 있는 고양이 사진을 보여줬고 나는 내가 길렀던 다리가 세 개뿐이었던 강아지 이야기를 했다. 형제들에게 치이는 그 녀석을 위해 우리 3남매는 다른 강아지들을 구석에 몰아넣고 그 녀석이 혼자서 어미 젖을 먹을 시간을 주곤 했다. 모모코는 내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워크맨이 너무 구형이라 이상하다고 이야기했고 나는 난 그런 거 별로 신경 안 쓴다고 대답했다.  모모코는 맥주를 한 병 시켜달라고 했다. 얼굴이 발 그래진 모모코는 말이 많아졌다. 우리는 서툰 영어로 이야기했지만 우리 가 대화하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문득 나는 궁금했던 것을 물어봤다. 모모코 너는 왜 그리 늦게까지 열심히 공부해?

모모코는 말을 멈추고, 빤히 내 얼굴을 보더니 대답했다. "토마스, 네가 항상 그곳에 남아 있으니까". 내 얼굴이 붉어졌다.      

 모모코는 일본에서 도망치고 싶었다고 말했다. 왜냐고 물었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모모코는 누군가에게 그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마음이 아프다. 함부로 남의 속내를 듣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통곡의 벽 역할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바위 같은 마음이 필요하고 한 남자가 그런 마음을 품게 되기까지는 종종 오랜 세월이 필요하다.

  모모코는 아이를 한번 가진 일이 있었다고 했다. 자신은 그 아이를 낳고 싶었으나 남자 친구는 아이를 지우기 원했고 그래서 너무 슬펐다는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쏟았다. 힘들어하는 모모코에게 집안에서는 외국 여행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이야기했고, 그렇게 모모코는 호주에 오게 된 것이었다.

  이제 나는 그때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정답을 알고 있다. 나는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가 하고 싶은 말을 모두 다 쏟아낼 때까지 기다려준다. 섣부른 위로의 말 따위는 하지 않다. 그녀의 감정이 너무 격해진다면 손을 꼭 잡아주거나 안아줬을 테지만 굳이 서두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녀가 이야기를 다 쏟아내고 나면 나는 자연스럽게 다른 이야기를 시작할 것이고, 나는 반드시 그녀를 웃게 만든다. 모모코가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플 때까지. 그건 내게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웃음의 잔향을 머금고 우리는 어두운 밤길을 지나 그녀의 집까지 같이 걷는다. 걷는 도중에 나는 그녀의 손을 꼭 잡아줄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음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그녀를 데리러 으리. 분명히 우리 둘은 서로 사랑하게 됐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때 어른의 껍데기를 쓴 아이였고, 그저 당황하고 있었다. 나는 그때 여자친구 손 한번 잡아본 일 없는 숙맥이었기 때문이다. 뭘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한심한 일이다. 집까지 데려다주는 동안 모모코는 말이 없었다.


  그날 이후 모모코는 도서관에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 나는 호주의 동쪽 끝 시드니까지 횡단여행을 하는 팀에서 멤버를 구한다는 공고를 보았다. 사막을 여행하겠다는 내 오래된 목표를 달성할 좋은 기회라는 것을 깨달았다. 출발은 일주일 후였다.      

  내가 여행을 떠난다는 사실은 작은 유학생 커뮤니티 사이에 알려졌다. 호주는 정말 아름다웠지만, 우리는 한창때였고 그래서 모두들 몸살이 날 정도로 심심해했다.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했다.

  어느 날 교정에서 마주친 모모코는 내게 여행을 간다는 말이 진짜냐고 물었다. 나는 맞다고 대답했다. 호주 사막을 일직선으로 가로질러, 사막 한가운데에 솟은 거대한 바위 울루루를 거쳐 브리즈번까지 가는 여정에 대해 이야기했다. 나를 빤히 바라보며 듣고 있던 모모코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갑자기 일본인 특유의 예의 바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잘 가 토마스".      


   여행은  고생스러웠다. 도로는 비포장이었고 험로용 대형 SUV는 요동이 심했다. 일주일을 일직선으로 달렸지만, 우리 주위에는 온통 지평 선 뿐이었다. 우리는 주로 사막 한가운데서 침낭을 펴고 들어가 잤다. 검은 하늘을 배경으로 거대한 은하수가 천구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지평선 멀리 하늘과 땅을 잇고 있는 거대한 회색의 기둥들이었다.

도대체 저게 뭐냐고 물었을 때, 나이 많은 호주인 여행자가 내게 웃으며 말했다. 토마스, 넌 곧 알게 될 거야. 기둥 중 하나가 도로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다. 베테랑 여행자인 호주인은 모두 내려서 저 가운데로 걸어가자고 했다. 기둥 속으로 들어가자 엄지손가락 만한 굵고 뜨거운 빗방울이 소리를 내며 내 얼굴을 두드렸다. 온몸이 흠뻑 젖었지만, 그 기둥 바깥으로 나오면 곧 젖은 몸이 말라버렸다. 그곳은 사막이었으니까. 하늘과 땅을 이어주던 거대한 빗방울의 기둥, 파리 때가 들끓던 물웅덩이들, 밤에 하늘을 보고 누우면 하늘을 가득채우고 있던 별들 , 그리고 세상의 배꼽이라는 거대한 바위산 울루루에 비치던 신비로운 석양에 압도되는 동안 거짓말처럼 나는 모모코에 대해 생각하지 않았다.      


 세월은 흘렀고 나는 이제 평범하고 시시한 중년이 되었다. 아내와 아이들도 있다. 그리고 오래된 사진을 꺼내기 전까지는 모모코에 대해 잊고 있었다. 25년전 그녀는 정말 예쁘고 멋졌지만, 나는 그녀보다 내 앞에 놓여있는 자유를 더 사랑했던 것 같다. 그 자유가 내 눈앞에 놓인 길보다 더 좋은 것인지 알 방법은 없었다. 자유라는 건 그저 가능성의 공간일 뿐이지 항상 다른 것 보다 더 낫거나 옳은 것도 아니다.  나는 그저 그 미답의 가능성을, 결정되어 있는 다른 미래보다 더 사랑했던 것뿐이다. 청춘의 시절이란 그렇게 미완의 가능성에 열려있던 시기를 의미하지 않나 싶다.

  청춘이 지나갔다는 것은, 그렇게 미정의 미래를 사랑하는 일을 끝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항상 그 선택이 멋진 길로 나를 인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딱히 후회는 없다. 나는 내가 선택한 삶을 살았다.

 그러나 가끔 상상해보지 않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우리가 인생의 고비에서 내리는 선택들이 만드는 분기점과, 그 분기점에서 탄생하는 평행 세계를 생각해 본다, 1997년 겨울, 호주를 기점으로 만들어진 어떤 평행세계에서 나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오사카의 일식집에서 머릿수건을 한 채 이럇샤이마세 하고 손님을 맞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나쁜 인생은 아니다. 단지 나는 그 길을 가지 않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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