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희권 Sep 12. 2024

옛 연인과 아이러브스쿨


내가 존경하기도 하고 애정하기도 하는 분이 요즘 힘든일을 겪고 계셔서 그런지 옛날 생각을 하시다가 1996년에 만나셨던 예쁜 여학생을 다시 보고 싶다는 포스팅을 올리셨다. 사람들은 그걸 보고 예전 예쁜 추억은 추억으로 남겨두는게 낫다는 말도 하는데  나는 사실 연락을 해봐도 좋다는 생각이다. 


사실 그분과 나와는 동갑이라 같은 세대로서 비슷한 경험을 공유하는게 많다 보니 나도 그때 쯤 만났던 착하고 예쁜 여학생 생각이 났다. 내 경우에는 실제로 헤어진 이후 다시 연락이 닿았었다. 한때 유명했던 아이러브스쿨 덕분이다. 그 사이트에는 동창이 아니더라도 학교와 과를 알고, 그 사이트에 등록한 회원이라면 검색해서 연락할 수 있는, 개인정보는 개나줘버린 듯한 편리한 기능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졸업한 대학을 다닐 때 나는 시작부터 예비역이라 애들 미팅에 끼거나 하는걸 삼가하고 있었는데, 대학원 다니던 조교형이 신촌에 있는 모 대학 청소년 지도학과 여학생들과 미팅을 주선하면서 한명이 빈다고 혹시  자리 좀 채워 줄 수 있냐고 했다. 별 생각없이 4대4 미팅을 나가서 재미있게 놀았는데 알고 보니 나중에 애프터로 이어진건 나와 그 여학생 뿐이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는 일이지만, 랜덤하게 자기 물건을 건내면, 주인이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물건을 선택하는 방식으로 파트너를 골랐다. 기억이 확실치 않은데, 우리는 그 물건으로 이어진 사이는 아니었던것 같다.) 


항상 웃는 낯의 Y( 라고 부르기로 하자)는 누구 에게나 좋은 인상을 주는 예쁜 여학생이었는데, 특히 걔를 본 나이먹은 선배들은 "희권아 어디서 이렇게 좋은 애를 만났니?" 하고 칭찬하곤 했다. 그러고 보니 나중에 내가 아주 오래 만나게 되는 누군가와 비슷한 구석도 있다. 


싸우는 일도 없이 제법 오래 (내 기준으론) 사이좋게 만났던 우리는 걔가 대학을 졸업할 즈음에 헤어졌다. 나는 아직 대학교 3학년이었을 때다. 


지금 생각하면 분명히 문제는 나 때문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몇 개월을 만났는데도, 그냥 만나서 이야기하고 영화보고 그런 단조로운 데이트만 했다. 손만 잡고 다녔다.


'야 예쁜 여자애랑 비디오방 가서 손잡고 영화만 보는 빙구가 바로 나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당시 내가 쓸데없이 많은 책을 읽고 머리속에 쓸데없는 생각만 담고 다니는 가방끈 긴 병신 이라는데 있었는데 


거기에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면, 당시 내가 이전에 다녔던 대학에서 좋아하게 됐던, 세월이 지난 후에 만났으나 헤어졌던 다른 여자의 강렬한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헤메고 있었던것도 한 몫 할 것이다. 


지금 확신하는데 Y는 내 마음이 어딘가 다른데 가 있다는 걸 느꼈으리라. 물론 몸이 따라오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과거로 돌아가서 데이트하는 나를 찾아가 여자애가 화장실에 갔을때 나타나 내 뒤통수를 한대 갈긴 다음에 알려주고 싶다. "야 잘들어 이 등신아. 맨날 손만 잡고 다닐게 아니라 크리스마스때는 뽀뽀도 하고, 돈이없으면 알바라도 해서 워터파크에도 같이 놀러가고 그래. 부처님 가운데토막 흉내좀 그만 내고" 그러고는 타임머신을 타고 사라진후 내 세계선은 다른 방향을 향하는 것이다. 


실제 인생은 그런 귀인을 만나는 일 없이 재미없게 흘러갔고 나는 오랜 세월이 지난 이후 심경에 커다란 변화를 일으켜 플라토닉을 버리고 플라스틱 친화적인 삶을 지향하는 (응?)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인데, 


세월이 지나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을 중퇴하고, 직장에 다니다가 뜬금없이 이미 맛이 가고 있던 아이러브스쿨에 접속해서 아이디를 만든 후 그 여자애를 찾았던 것이다. 


있다!!


나는 혹시 그 사람이 맞는지 메모를 보냈고 반가워 하는 답장이 왔다. 우리는 시간을 맞춰 채팅을 몇 번 하는 사이가 됐다. (이제 컴퓨터 통신에서 막 인터넷으로 나아가던 시대였다.)


그녀는 대학을 그만두고 아버지가 하는 사업을 돕고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그때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싶었다. 


제대로 양다리를 걸치는 것 조차 아니고, 과거의 그림자에 얽매여 현재에 충실하지 못했던 나 자신에 대해 솔직하게 이야기 하고 사과를 했다. 아 그랬었구나, 그녀는 이해한다고 대답 했다. 


그녀는 자신이 많이 변했을 거라고 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나는 지금도 별로 철이 없어."


일주일 정도? 약속한 시간에 만나 채팅을 하던 어느 날 나는 용기를 냈다. "우리 한번 만나보지 않을래?" 


잠시 침묵이 지나간 후 그녀는 대답했다. 


자신이 오빠가 보기에 많이 변했을 거라고. 그리고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수긍했다. 이런 대화는 설득의 문제가 아니다. 


남녀 의 문제는 모두 설득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남은 인생에서 서로가 누릴 행운을 빌며 채팅을 종료했고, 나는 다시는 아이러브스쿨에 접속하지 않았다. 그 사이트는 얼마 후 없어졌다. 


같은 여자에게 두 번 거절 당한 형국이 되어 버렸지만, 


나는 그래도 그때 연락을 한번 했었던 것, 그리고 만나자고 이야기를 해봤던 것이 드문 행운이고, 그런 드문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용기를 낸 게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정말로 어떤 일이 일어났을 지는 아무도 모른다. 


만약에 정말로 다시 만났으면, 


아마 지금 쯤 내 근처에서 "야 이 화상아." 소리를 입에 달고 사는 손이 매운 누군가와 비슷한 사람이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 사람도 한때는 Y 이상으로 항상 웃고 다정하고 부드럽고 예쁜 사람이었다.


 (이런 생각은 큰 위안이 될 뿐만 아니라 매우 현실적이다.)


뭐 그렇게 되었어도 좋고, 안되었어도 좋다. 그럴 일이 안 생긴 것도 좋은 일이다. 사람들이 자주 잊는 사실인데, 지나간 일은 다 잘된 일이다. 


잘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면 그건 아직 지나간 일이 아닌 것이다. 두번 째 이별 이후로 나한테 Y는 확실히 지나간 사람이, 지나간 일이 되었다.  


그런식으로 다시 만났는데, 우연히도 서로가 혼자인 상태라 다시 만나는 것 역시 좋은 일이다. 그렇게 지나가지 않은 일을 현재로 만드는 것도 좋은 일이다. 


만일 다시 만났는데, 둘 중 한 사람, 또는  서로가 서로에게 실망해서 다시 만나게 되지 않게 되는 것도 잠시는 섭섭할 망정 결과적으로 좋은 일이다. 


지난 일은 다 좋은 일이기 때문이다. 


* Chatgpt 에게 그림을 그려달라고 시켰더니, 아니나 다를까 비현실적으로 예쁘게 그려버렸다. 예쁜게 문제가 아니라 비현실적이란게 문제다. 현실적으로 해달라는게 AI에게는 가장 어려운 일인걸 보면 AI가 사는 세계가 바로 플라톤이 말한 IDEA 의 세계가 아닐까? 예쁜 얼굴의 이데아는 존재하지면 '현실적으로 예쁜 얼굴'의 이데아라는건 존재하지가 않는 것이다. 여러번 디테일하게 고치게 해서 Chatgpt 가 내놓은 그림이 아래 그림이다. 좀 현실적으로 만들어봐라는 구박에 가까운 명령어에서는 심지어 실패하고 다시 시도하는 모습까지 보였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