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리지 않은 소리의 기억
정연두 작가의 촬영을 위한 콘서트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디아스포라 연주회>에 갔다. 이 연주회는 제 3회 강릉국제아트페스티벌에서 선보일 정연두 작가의 작품 <싱코페이션> 의 주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한 음악회로, 정연두 작가와 임지선 작곡가가 협업하여 기획한 곡이 연주된다.
이 공연의 특징적인 점은 두 대의 피아노를 위한 악곡을 연주할 때, 한 피아노에는 현을 제거하여 소리가 나지 않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곡은 세 번 연주되며, 그 동안 카메라는 각각 다른 위치에서 연주를 담아낸다. 마지막에는 현을 끼운 피아노로 교체되는데, 이때야 비로소 임지선 작곡가의 두 피아노 곡을 그 자체로 들을 수 있게 된다.
공연장에 들어가 안내된 좌석에 앉는다. 무대에는 포스터에서 보았던 것처럼 두 대의 그랜드 피아노가 서로의 곡선에 맞닿아 한 몸을 이루고 있다. 검은 피아노는 따뜻하고 둥글게 무대를 밝히는 조명을 받으며 주변의 빛을 머금고 반사한다. 인공 조명은 섬세하고 정밀한 빛의 효과를 위해 조율된 양 정확하게 사물을 비춘다.
두 피아니스트가 사각 문으로 들어온다. 한 사람은 소리내는 사람. 다른 사람은 현을 제거한 피아노를 연주하는 사람, 그리하여 자신이 발성하고 있음을 쿵쿵 내리누르는 건반 소리나 나무와 솜과 손의 부딪힘을 통해서만 들려주는 연주자이다. 소리내는 사람은 덩치가 크고 손가락이 굵고 연륜이 있다. 침묵하는 사람은 몸이 말랐고, 팔과 등과 목이 한 덩어리로 연결된 듯 보인다. 큰 손가락의 섬세한 소리를 듣고, 작은 몸이 소리나지 않는 건반을 온 몸으로 누르는 것을 본다.
전체 곡은 몇 개의 악장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의 민요 <한오백년>, <신고산 타령>, <만났도다>, <국문뒷풀이> 에서 가져온 악구들이 악장의 테마이자 꾸밈 선율로서 등장해 변주된다. 특정할 수는 없지만 귀에 익은 음계와 분위기이다. 어떤 모던 풍 영화에서 들었을 법한, 한이 서린 통속적 곡조들이 들린다.
작가와 작곡가가 나눈 대화 속에서 언급되었던 장면들이 음악이 되기도 한다. 전시가 열리는 도시 '강릉'과 얽힌 작가의 기억, 예컨대 산불이나 산사태 같은 재해의 장면이랄지, 발효균의 작용으로 신주 막걸리가 보글보글 끓는 모습, 염원의 노래를 반복하며 마음을 증폭시키는 단오제의 풍경과 같은 장면들이 민요의 선율과 얽혔다.
이러한 재료들로 서정적이고 묘사적인 음악이 만들어졌다. 화성악과 현대음악에 능통한 작곡가가 전개하는 곡은 지적이고 규범적이라고도 느껴진다. 현대음악이라는 함수에 정연두가 수집한 곡조와 이미지들을 넣으면? 오늘의 연주가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촬영을 위한 연주는 세 번 반복되었다. 두 피아니스트는 같은 곡을 연주하는데, 처음에는 카메라가 객석에서 촬영하고, 두 번째와 세 번째에는 카메라가 무대 위에 서서 피아니스트의 손과 피아노 건반의 움직임, 그 내부 망치와 현들을 담는다. 이 촬영 장면은 스크린에 함께 송출된다.
반복 속에서 선율은 어느 덧 귀에 익고, 두, 세 번째 손의 움직임들을 보는데 침묵하는 피아노의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악곡의 규칙대로라면 이러한 멜로디가 나오겠지, 이번 파트는 돌림노래처럼 앞선 연주자의 선율을 받아 변주할 것 같은데? 저 손은 솔에서 출발해 옥타브를 오르내리는군. 눈은 보며 소리를 상상한다. 들리는 소리와 들리지 않는 소리가 상상적 하모니를 이룬다. 소리나지 않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피아니스트는 무엇을 들을까? 기억 속 멜로디를 치면서, 타악기가 된 건반 소리를 듣는 이질적인 경험을 하겠지?
듣는 이마다 달리 상상했을 곡이 마지막 연주에서 하나로 수렴된다.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재치있는 변주, 화성을 펼쳐내는 방식, 몸집 작은 피아니스트가 내는 크고 울림있는 소리가 흥미롭다. 이전의 세 번의 침묵이 없었더라면 감각하지 못했을 공명이다. 소리나지
않는 피아노, 상상 속에서 여러 잠재태로 울리는 선율, 들리지 않았던 음악의 기억과 교차하며 마침내 생성되는 소리. 이 곡이 작가의 영상 작업에서는 어떻게 등장하고 어떤 이미지와 겹쳐져 새로운 감각을 만들어낼지 기대가 된다. 전시는 내년 3월 14일부터 강릉 전역에서 진행된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