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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숨씀 Aug 31. 2020

호구력 만렙

1화. 호구의 끝을 보여줄게

체력, 근력, 지구력, 집중력, 순발력을 비롯하여 내가 가진 힘 가운데 가장 자신 있는 능력은 바로 호구력이다. 세상에 많고 많은 재능 중에 하필이면 호구력이라니. 호구의 끝은 어디일까.


어제는 미용실에 갔다. 

"머리를 기르고 싶은데요. 이런 펌을 하려고요."

인터넷에서 찾은 예쁜 사람들의 사진을 미용사에게 열심히 보여줬다. 원하는 머리 모양이 무엇인지 한참을 설명하고 나니 미용사가 내 어깨 위로 가운을 살짝 덮어주면서 입을 뗐다.


"손님은 곱슬이라서 위쪽은 이렇게 하고 아래쪽은 저렇게 하면 풍성한 웨이브가 유지될 거예요."

뭔지 잘 모르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절대 애매한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딱 내가 원하는 처방이다.


"자세히 살펴보니 머릿결이 많이 상했네요. 영양을 해야 펌도 오래가요."

내 머리를 살살 빗으며 걱정스런 표정을 짓는 그의 모습이 거울에 비쳤다. 때마침 오늘부터 사흘간 역대급 할인 기간이라는 말이 나를 한껏 부추겼다. 알겠다고 대답하며 얼마인지 넌지시 물었다. 앞으로는 다시없을 절호의 할인 찬스를 써서 34만 원이라고 했다.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나의 흔들리는 눈빛을 읽었는지 "한번 해보고 나면 단번에 아실 거예요. 펌도 오래갈 걸요?"라며 그는 힘두어 말했다. 그래, 비싼 만큼 좀 다를 거야. 동네 작은 미용실 애호가였던 나는 커피와 각종 빵을 간식으로 가져다주는 이 미용실의 서비스가 부담스러웠다. 호구 잡힌 것 같다는 불안한 생각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영양도 펌도 다 끝나갈 때쯤 그가 말했다.


"그런데 염색은 안 하세요?"


머리를 하고 휘적휘적 미용실을 나오자마자 후회가 밀려들었다. 거울 속에 나이 들어 보이는 저 여자는 누구인가. 찰랑이는 머릿결은 딱 일주일 뒤 원상태로 돌아왔다.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피하고 싶은 장소들이 있다. 정가가 제대로 표시되어 있지 않아 "얼마예요?"라고 먼저 물어봐야 하는 곳들. 이를테면 전통 시장, 핸드폰 매장, 옷 가게, 미용실 같은 곳들. 뭐랄까, 그런 곳에서는 불공평해지는 기분이다. 같은 데서 같은 물건을 내가 더 비싸게 주고 샀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되었을 때... 그럴 때 기분이 매우 복잡해진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이나? 호구의 역사는 조금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간다.

 



엄마가 잔뜩 설레는 표정으로 작은 강아지를 소중히 품에 안고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던 날이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지금이야 보신탕이라고 하면 소스라치게 놀라며 경악을 금치 못하는 네 가족이지만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한여름에는 몸보신을 해야 한다며 모란시장에서 개고기를 사 와 함께 먹었다. 한의원에 가서 보약을 지어 올 형편은 못 되고 체력은 자꾸 떨어지니 우리 집에서 보신탕은 삼계탕과 함께 여름 더위에 대비하는 보양식이었던 것이다. 그날도 엄마는 보신탕용 개고기를 사기 위해 모란시장에 갔다. 그런데 웬걸, 그날따라 상자 속에 꼬물거리는 강아지가 눈에 걸리더란다.


"너무 귀엽지 않니? 게다가 어찌나 총명한지 벌써부터 내 말을 알아듣더라니까. 그리고 아저씨가 그러는데 얘가 치와와래!"


귀와 주둥이가 뾰족하고 황갈색의 깡마른 강아지. 초등학생이던 내 눈에도 치와와는 아닌 듯했는데 엄마는 핏대를 세우며 한사코 치와와라고 우겼다. 누가 봐도 똥갠데?


어느 더운 여름날 보신탕용 개고기 대신 우리 집을 찾은 치와와는 무럭무럭 자라 덩치 좋은 똥개가 되었다. 개랑 같이 산책할 때면 몇몇 사람들이 "아유, 귀여워라. 종이 뭐예요?"라고 묻는다. 나도, 엄마도, 아빠도, 동생도 한 치의 망설일 없이 대답한다.


"치와와예요."




아니 그러니까 나의 호구력은 집안 내력일지도 모른다는 합리적 의심을 치와와 사건으로 충분히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피는 물보다 강하고, 우리 집 똥개는 평생 자기가 치와와인 줄 알고 늘 자신감이 넘치고, 나는 동네에서 제일가는 호구다.


아주 솔직히 말하자면 같은 물건을 사면서 남들보다 몇 푼 더 내는 일은 그렇게 억울하지 않다. 바보 같아 보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값을 조금 더 치를지언정 물건에 정가를 표시해놓은 곳에 간다. 아무리 싸게 살 수 있는 상점이 있다 할지라도 말이다. 상점이든 회사든 견딜 수 없는 지점은 "깎아주세요"라고 말할 줄 아는 사람인지 아닌지, 싹싹한 사람인지 아닌지에 따라 각각 다른 값이 매겨질 때다. 이건 공정성의 문제 아닐까? 성향에 따라 차별당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어떠한 관계든 상대의 좋은 점과 부족한 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서로를 대등한 위치에 놓는 것, 그런 공정함이 존중되는 곳에는 아끼지 않고 돈을 쓰고 싶다. 어떻게든 손해 보지 않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억지로 싹싹한 척하며 붙임성 있게 구는 건 나랑 영 맞지 않기도 하고.


부르는 게 값인 곳은 인생에서 걸러낸다. 그게 물건을 사고파는 곳이든 마음을 주고받는 곳이든지 간에. 이것이 바로 호구력 만렙의 경지!




본업은 편집자, 부캐는 솜숨씀으로 일명 '호구마'(호박도 고구마도 아닌, 착하지도 않고 못되지도 않은 어정쩡한 성격의 소유자) 같은 사람들이 겪는 인간관계의 어려움, 나라는 사람의 일하는 태도와 마음가짐을 담은 에세이를 출간하였습니다. 관심과 사랑은 대환영입니다.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 반디앤루니스, 영풍문고 등 온오프라인에서 주문 및 구매 가능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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