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도 되었고
부모님에게 선물을 하나
해 드리고 싶은 마음에
무작정 길을 나섰다.
주말이라 그런지
시내에는 사람도 참 많았고,
적당히 추운 날씨와 파란 하늘
그리고 내 입에서 나오는
하얀 입김까지…
그 어느 것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기분 좋은 오후였다.
평소 집으로 오가는 길에
눈여겨 봐 왔던 여성복 매장.
근사한 옷들로 한가득
디스플레이 되어 있는 이 매장은
언젠가 내가 한번 꼭 들러 보고 싶었던
장소 중 하나였다.
여자 옷을 사는 것은
무척 오랜만의 일이라
나는 한참을 돌고 돌며
이것저것을 눈에 담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내 발걸음은 한곳에 멈추어 있었다.
‘새빨간 원색의 여성용 코트’
말로 설명하자면 저리도 짧지만,
말로 이야기하기에는 부족한
마법 같은 매력을 지닌
아름다운 옷이었다.
한참 동안 넋을 잃은 채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차, 나는 어머니 옷을
사려고 들어왔지.’
빨간 옷에 걸려 있던 마법이
허무하게 풀려 버리는 순간이었다.
비단 그 빨간색 코트뿐 아니라
이곳에는 여러 가지 예쁜 옷이 많았지만,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매장이라 그런지
어머니에게 사 드리기에는
조금 어색한 옷이 눈에 많이 띄었다.
결국 나는 그저 무난히
중년 여성에게 어울릴 법한
검은색 무스탕 재킷을 한 벌 구입했고,
그렇게 그곳에서의 쇼핑은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많은 생각들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고
또 내 마음을 슬프게 했다.
‘나 역시 세월이 흐르고 흘러
머언 미래가 되면
저런 빨간 옷을 입지 못하는 날이
찾아오겠지.’
사람에게는 나이대별로
어울리는 옷이 있다.
나이 많은 노인이 앳된 청소년이 입는
발랄한 옷을 입으면 보기에 불편하듯이,
풍만한 아주머니가 갸냘픈 아가씨가 입는
날렵한 옷을 입으면 몸에 잘 맞지 않듯이
말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는 나이대별로
주어지는 역할 역시 존재한다.
‘1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50가지’
‘20대에 하지 않으면 안 될 100가지’
한때 유행했었던
이 같은 책들의 제목처럼
저 나이대에 하지 않으면
앞으로는 평생 하지 못하게 되는
그런 일들.
해가 바뀌고
나는 또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되었다.
과연 나는 지금 이 시간,
나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소화해 내고 있을까.
시간은 흐른다.
시간은 물살처럼 빠르게 흐른다.
시간의 흐름은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멈추거나 막아서도 아니 된다.
빠르게 흘러가는 이 시간 속에서
나는 무엇을 이루어 낼 수 있을까.
머언 미래가 되어
내가 더 이상 빨간 옷을
입지 못하게 되는 순간,
그 빨간 옷을 보며
후회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도록
또 내 인생에 미안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살아가야 할 텐데…
집으로 향하는 길 내내
조금 전 매장에서 마주한
빨간색 코트의 모습이
계속 눈에 어른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