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ex Sangwoo Kim Jun 21. 2016

나는 좋은 아빠인가?

아직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아빠가 된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좋은 아빠가 된다는 것은 더욱 그렇다. 좋은 아빠는 어떤 아빠인가? 사실 그것도 잘 모르겠다.


 난 아버지와 어린 시절을 함께하지 못했다. 조금 나이가 들어 더 이상 엄마와 같이 목욕탕에 갈 수 없는 나이가 되어서는 할 수 없이 혼자 남탕에서 때는 안 밀고 물놀이만 하다 나와 엄마에게 등짝 스메시를 당했고 , 이차 성징 때 거뭇거뭇해지는 내 몸을 보면서 혼자 당황했어야 했다. 포경 수술 역시 간호사 아줌마 앞에서 바지를 벗는 게 아주 창피하게 느껴질 나이가 되어서야 했다. 야한 책을 몰래 보다가 엄마한테 걸렸었는데 엄마와 나 서로 당황해서 엄마가 버럭 나에게 '너 그럼 꼬추 잘라진다'라고 말하고 황급히 돌아섰던 기억도 있다. 난 정말 꼬추가 잘라질까 며칠을 고민하고 자책하였었다. 그렇게 사내아이가 크면서 아빠가 있어줘야 했던 순간순간이 나에게는 참 아쉬운 시간으로 기억된다.     


그래서일까? 난 좋은 아빠가 되려는 강박 비슷한 것이 있다. 어떻게든 아이들과 좀 더 시간을 보내고 추억을 만들어 주면서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로 인정받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아이들이 인정해주면 혼자 신나서 뿌듯해한다. 어쩌면 내가 꿈꿔왔던 아빠의 이미지를 아이들의 통해 실현시키면서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건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딸아이의 방에 메모가 가능한 벽걸이를 하나 만들어 줬다. 밤에 뚝딱뚝딱 열심히 만들어서 자고 있는 아이의 방에 걸어 주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우리 딸 유진이가 폴짝폴짝 좋아하겠지?라는 마음으로 마음이 뿌듯해졌다. 근데 웬걸? 잠에서 깬 유진이의 반응은 시큰둥 그 자체였다. 응 뭐가 벽에 하나 걸려있네.. 뭐 이런 거 가지고 호들갑은.. 같은 반응?


그래도 나름 열심히 만들었는데 흥!칫!뿡! (아이들이 보는 만화 콩순이에 나온 표현)이다! 이제 좀 컸다고 이런 거에는 감동이 없다 이거지? 쬐~~금 서운했다. 2년 전만 해도 풍선만 불어줘도 엄청난걸 본 듯 좋아하던 아이들이었는데, 아이들이 커가면서 아이들에게 인정받기가 쉽지 않다. 더 이상 아빠가 밤마다 우주에 나가서 악당을 물리치고 온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조금씩 커가면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는 아이들을 보면서 뭔지 모를 아쉬움이 몰려온다. 머리가 커가면서 자기 의견을 내세우고 내 마음대로 안 되는 아이들이 당황스럽기도 하다. 


좋은 아빠가 되려면 아이를 내 소유로 생각해서는 안된다는 걸 아이가 커가면서 점점 더 느낀다. 혼자서 성장해 나갈 때마다 진심으로 응원해주고 지켜봐 주어야 하는데 아직 너무나 여리고 안타까워 늘 옆에서 아이의 인생에 간섭하고 끼어들어 도와주게 된다. 나는 도와주는 것이지만 어찌 보면 아이들을 내 마음대로 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미국에 살면서 미국인 부모에게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아이의 나이를 떠나서 하나의 인격으로 존중하고 인정한다는 것이다. 아이와 많이 대화하고 아이들은 자기의 의견을 자유롭게 말한다. 그리고 그 의견이 크게 문제가 없다면 정답이 아니어도 아이의 의견을 들어준다. 


나도 그러려고 하는데 결국엔 내 마음대로 하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한여름에 긴바지에 긴팔을 입고 학교에 가겠다는 막내 놈과 싸우고 윽박질러 결국엔 반팔에 반바지를 입히는 것이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입고 가서 학교에서 개고생(?)을 해봐야 다음부터 긴바지에 긴팔을 입겠다는 소리를 안 할 텐데 학교에 가서 고생할 아이가 안쓰러워 결국 내가 말한 대로 입혀서 학교에 보낸다. 선생님이 애들도 신경 안 쓰는 무심한 부모로 볼까 봐 신경도 쓰인다. 말도 안 되는 패션으로 학교에 가겠다는 큰딸도 내가 생각한 대로 이쁘게 코디를 해서 보내야 속이 시원하다. 


나는 뉴욕의 빈민가에 운동장도 없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학교 안에서 권총강도도 3번 당하고 괜히 길 가다 얻어 맡기도 여러 번 했다. 몇 년 전에 우연하게 뉴욕에 Jericho 고등학교란 곳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관중석을 갖춘 운동장이 야구장, 축구장, 미식축구장, 테니스장으로 개별적으로 나뉘어 있었고 실내 수영장도 운영하고 있었다. 충격이었다. 아.. 이런 세상도 있었구나. 내가 맨해튼 길바닥에서 알바를 할 때 다른 아이들은 이렇게 좋은 학교에서 수영과 테니스를 배우고 있었구나. 이래서 좋은 동네 사는구나.


능력이 되면 우리 아이도 그런 곳에서 키우고 싶다. 아마 많은 돈을 투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학에 가기를 원하겠지.. 내가 이렇게 최고의 환경을 만들어주려고 희생했는데 그 정도의 결과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미 아이가 갈길은 정해져 있다. 그곳 어디에도 아이의 의견은 없다. 아이에게 운동을 시켜도 악기를 시켜도 결국엔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도구이다. 아무도 물어보지 않는다. 내 아이가 대학을 하고 싶어 하는지. 왜? 아이들은 아직 어리니까.. 아무것도 모르니까.. 그래서 부모 맘대로 결정해 버린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이들을 위한 답시고 해오던 많은 것들이 결국엔 나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이었다. 내가 자랐을 때와는 다른 환경을 만들어주어서 난 좋은 아빠라는 걸 증명하고 싶은 욕심, 하바드 다니는 자식을 가지고 싶은 부모의 욕심. 그래 놓고는 결국엔 부모의 희생 운운하겠지. 아빠는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대학을 갔는데 너는 왜 못하니?라는 말도 나오겠지. 그런 부모가 되고 싶지는 않다. 그냥 아이가 어렵고 힘들어할 때 옆에서 묵묵히 지켜봐 주고 응원해주는 그런 부모로 기억되고 싶다.


나는 지금 좋은 아빠인가? 
아직 그렇다고 대답할 자신이 없다.


한 번 더 다짐하고 되새겨 본다. 


아이는 내 소유가 아니다.

아이의 의견을 존중해주자.

지켜볼 뿐 간섭하지 말자.


 

매거진의 이전글 나도 어쩔 수 없이 꼰대가 되나 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