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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경미 Oct 24. 2024

구두

  구두가 말을 한다. 어디 먼 데를 돌아와 갓 벗어놓은 듯 낡은 한 켤레의 구두. 소리 내지 않고도 끝없이 말을 하고 있다. 지치고 고단해 보이는 이것은 누군가 끌어 안아주지 않으면 울음이라도 터트릴 것만 같아 마음이 쓰인다. 지금 나는 고흐의 구두에게 붙들려 있다. 

  구두가 귀했던 시절, 아버지에게도 한 켤레 구두가 있었다. 아무도 구두가 없는 우리 집에 아버지는 빛나는 구두 같았다. 구두를 신기만 하면 나도 빛날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은 적잖은 즐거움을 가져다주었다. 그럴 때마다 몰래 아버지의 구두를 신어보곤 했다. 내 발에 맞을 리 없었지만 구두를 신었을 때만큼은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다. 세상 가운데로 걸어 갈 수 있을 만큼 당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아버지의 커다란 구두 안에서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갔다.  

  구두처럼 아버지의 삶이 빛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가난한 농가의 아들이었던 아버지는 우리 5남매를 길러내기 위해 구두 한 켤레로 수십 년을 견뎠다는 걸 알았다. 여러 해 동장 일을 맡아온 아버지는 면사무소 갈 때나 장날이 되어야 한 번 신을까 말까한 구두였다. 평소 멋 낼 줄 모르는 아버지가 내심 불만이던 때도 있었다. 멋 낼 줄 모르는 게 아니라 멋을 내지 않았다는 것을 그땐 알 리가 없었다. 아버지의 구두는 언제나 그 자리에 반듯하게 놓여 있었다. 마치 보물인양 구두를 대하는 엄마의 마음이 커 보였다. 아버지를 향한 엄마의 극진함이 아니었을까 더듬어 본다.

  어느 여름 한 낮이었다. 아버지는 땡볕 논일에서 돌아와 등목을 부탁했다. 처음 자세히 본 아버지의 등이었다. 햇볕에 그을리다 못해 허물이 벗겨진 것이 가뭄에 갈라진 논바닥 같았다. 그날 비로소 아버지를 알게 된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무 말 못하고 아버지 등으로 찬물을 끼얹을 뿐이었다. 그때처럼 아버지가 안쓰러워 보인 적은 없었다. 아버지는 밤이 되면 책을 읽었다. 그것도 잠시, 낮 동안의 고된 농사일로 금세 곯아떨어지던 모습이 생각난다. 당신의 몸 상하는 것도 잊고 손이 닳고 발이 닳도록 일해 온 아버지는 마치 낡을 대로 낡은 고흐의 구두와 흡사했다. 그 덕분에 우리 5남매는 제법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 웬만한 비바람에도 끄덕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는 아버지와 함께 구두도 세월을 이기지 못했다. 빛을 잃었어도 내게는 여전히 빛나는 한 켤레 구두, 아버지였다.

  고흐의 구두에서 내 어릴 적 아버지와 마주 하는 동안 시간이 제법 흐른 듯하다. 주섬주섬 마음도 챙긴다. 오랜 시간을 걸쳐 철학자와 미술학자들 사이에서 논란이 되어 온 것은 고흐의 그림 속 구두가 누구의 것이냐는 거였다. 누구는 부드러운 대지를 밟던 여자 농부의 건강한 걸음이 눈에 들어온다, 어떤 이는 고흐가 파리 뒷골목을 헤맬 때 신은 것이다, 구두 주인 찾아주기는 공허한 논쟁이고 무익한 이론적 소동에 불과하다고 한 이도 있었다.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고 영원히 해결되지 않을 수도 있는 궁금증이 돌연 내게로 옮는다. 나 또한 오랫동안 궁금해 할 것만 같아 피식 웃음마저 난다.

  어느새 남편이 곯아떨어져 있다. 새벽에 집을 나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돌아오기에 지치기도, 고단하기도 할 것이다. 오늘 내가 마주한 고흐의 구두를 보는 듯 움찔한다. 바로 지금 남편 모습 같다. 늘 아버지의 구두를 닦아 반듯하게 두던 엄마와는 달리 신발은커녕 남편에게 조차도 살갑지 못하였다. 바쁘다, 피곤하다, 늘 먼저 엄살을 부리니 힘이 든들 남편이 말할 틈이 있기나 했을까. 남편은 매사 수월한 편이었지만 그 고마움을 몰랐다. 외환위기 때 설계사무소를 그만두고 새로운 공부를 시작했을 때도 잠시 쉬는 일이 없었다. 무엇을 해서라도 가정을 책임지려고 안간힘을 다하는 모습이었다. 나보다 더 힘들었을 테지만 언제나 먼저 위로하고 응원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투덜거리기만 한 나를 되돌아본다.

  신발을 챙기다 말고 남편의 구두를 들여다본다. 한 번도 눈여겨보지 않아서인지 왠지 낯설다. 뒤축과 안이 낡아 있다. 가족을 위해 분주했을 하루하루가 고스란히 새겨져있는 듯하다. 아무렇게 널려 있는 신발을 가지런히 챙긴다. 나와 아이들 신발 곁에 남편 것도 가만히 놓아 본다. 구두끈을 이제 막 풀어헤치고 쉬고 있던 그림 속 낡은 구두, 누구의 것일까에 대한 궁금증이 풀리는 순간이다. 다름 아닌 가족을 위해 일하다가 지친 몸으로 돌아와 곯아떨어지곤 하던 아버지와 남편, 또한 모든 아버지들의 것이었다.

  누군가 안아주지 않으면 막 울음을 터뜨릴 듯 안쓰럽던 고흐의 구두 대신 잠든 남편을 가만히 안아 본다. 남편의 등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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