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읍성의 성벽 위를 걷고 있다. 성 안과 성 밖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안도 밖도 봄기운으로 한창이다. 성 주변에는 새순은 새순대로, 봄꽃은 봄꽃대로 그 화사함에 눈이 멀 지경이다. 한참을 걸었을까. 기나긴 겨울을 보내고 성벽 밖을 타고 돌던 담쟁이 묵은 가지에서 새순이 돋아나고 있다. 성벽 돌 틈사이로 지금 막 성 안으로 들어 온 듯 담쟁이 새순 하나와 눈이 마주친다.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갈 길을 잊은 채 담쟁이 새순을 조심스럽게 어루만져 본다. 굳이 이 비좁은 돌 틈을 지나 안으로 들어와야만 하는 무슨 사연이라도 있었을까. 애처로운 듯 대견한 듯 겨울을 넘긴 담쟁이 새순을 내려다보며 내 마음 벽에 붙어 간혹 따끔거리게도 하던 이야기 하나를 떠올린다.
내게도 기나긴 겨울이 있었다. 겨울 담쟁이처럼 잎 하나 달리지 않고 건드리기만 해도 바스스 부서져 내릴 것만 같았던 시절이었다. 공부에 욕심이 많았던 나는 대학진학을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진학 무렵 우리 집은 여러 가지 사정이 좋질 않아서 진학대신 취직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선생님께서 학비를 대줄테니 진학을 권유했지만 그 또한 맘 편한 일이 아니었다. 스스로 선택한 포기였지만, 나는 부모님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울었다. 생각해보면 그리 아플 것도 아닌 일이지만 그 당시 그것이 내게는 왜 그리도 혹독하기만 했는지 모르겠다.
학기가 막 시작된 어느 봄날, 단짝 친구 그녀가 다니는 학교에서 만나기로 했다. 일찍 도착한 나는 강의실 창밖에 서서 기다려야만 했다. 창 하나를 사이에 두었을 뿐이지만 강의실 안에 있는 그녀와 강의실 밖에 있는 나와의 거리는 멀고도 멀어 아득하기까지 했다. 도저히 내가 가 닿지 못하는 미지의 공간처럼 신비롭기까지 했다. 강의가 끝나고 팔랑팔랑 내게로 다가오는 그녀는 눈이 부셨다. 한때 함께 웃고 떠들며 지내던 나와 그녀가 아니던가. 그녀가 하도 커 보여 내가 보이질 않았다. 그녀가 어찌한 것도 아니었다. 내안에 놓인 열등과 열망의 덫에 스스로 걸려든 것뿐이었으리라. 그녀와 헤어져 돌아오는 봄 길이 마치 한겨울 벌판을 홀로 걷는 듯 메마르고 춥기만 했다.
무엇을 해도 안을 향한 내 그리움은 더 해져만 갔다. 당시 나는 구미에 있는 어느 기업체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구미라는 도시가 더 그것을 부추겼을 것이다. 여러 해 있으면서도 단 한 번도 뿌리 내리질 못한 곳이 그 곳이었다. 몇 시간을 차를 타야만 도착하는 집이었지만 한 주도 빠지는 일 없이 몇 년을 그렇게 반복했다. 주말 오전 근무가 끝나기가 무섭게 짐을 챙겨 그렇게 와서는 다음 날 밤이 되어야 되돌아가곤 했다. 그나마 사보 편집 기자 일과 주변의 문학인들과 교류하는 일들은 내게 큰 위안이 되기도 했지만 깊어져가는 갈증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가 닿지 못할 안이라고만 생각했는데 나도 갈 수 있는 안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니, 꼭 들어가야만 하는 안이 되어버렸다. 딱 2년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아니 1년만이라도 좋을 거 같았다. 이미 입시방식이 수능으로 변해 있어 나에겐 생소했지만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선 모든 걸 받아들이기로 했다. 새벽 일찍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텅 빈 사무실에서 혼자 책을 펼쳤고 퇴근하자마자 독서실로 달려갔다. 친구들이 졸업을 하고 안에서 밖으로 나올 무렵 그제야 나는 비좁은 돌 틈을 갓 빠져 나온 담쟁이 새순처럼 간신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면접관 교수님은 좋은 직장 그만두지 말고 다니면서 공부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셨다. 나이도 있으니 교수님의 배려가 아니었겠냐마는 나는 그것이 조금도 문제 되질 않았다. 간절히 바라던 것은 안의 세계일뿐이었다. 안은 봄의 소나타처럼 상큼하고 생기가 넘쳤다. 도서실을 드나드는 일과 딱딱한 강의실에서 재미없는 강의를 듣는 일조차도 내게는 새로움이었다.
그 옛날 친구의 강의실 창 밖에 서있을 때만해도 내 것이 될 것 같지 않던 안이 팔을 뻗기만 하면 손닿는 곳에 있었다. 그렇게 안과 함께 부대끼며 많은 것을 누렸다. 한 해를 꼬박 그렇게 지냈을까. 그토록 꿈꾸던 안의 것도 그리 대단한 무엇이 아니었다는 것이 조금씩 깨달아지기 시작했다. 안도 밖도 그저 봄이면 꽃이 피고 때가 되면 지는 것을. 먼저 안으로 들어간 친구인 그녀도, 늦게 들어간 나도 아니면 아예 들어가지 못했다할지라도 뭐 그리 대단하게 다를까. 시간을 훌쩍 넘어와 지금 친구들이 사는 모습이나 내가 사는 모습을 보면 오십보백보다. 친구의 강의실 밖에 서 있을 때도 여전히 이것은 진리였을 터지만 그때는 그것을 몰랐다. 그래서 햇살 쏟아지는 봄날에도 춥고 시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을까.
전란으로 팽팽한 긴장이 감돌았을 오래전 고창읍성은 알기나 했을까. 성 안도 성 밖도 없이 새순과 나비는 안팎을 드나들며 평화로운 봄날을 맞이하게 되리란 것을. 성벽 안으로 새순을 밀어 올린 담쟁이에겐 성 안도 성 밖도 아닌 그저 자신의 몸을 지탱하는 성벽일 뿐이지 않겠는가. 누구에게나 동경하는 세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가 닿지 못할 무엇도 아닐 것이다. 안이 밖이 되기도 밖이던 것이 안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곳 고창읍성 봄을 보고서야 깨닫게 된다. 나의 아픔들은 단지 내 안에서 허물지 못한 경계로 인한 오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돌 틈을 갓 빠져 나온 담쟁이는 그 예전 나와는 다른 처지일지도 모른다. 그렇다하더라도 나는 내 앞에 있는 연한 새순을 향해 격려를 아끼지 않고 싶다. 머지않아 무성해질 대로 무성해진 담쟁이는 제법 당당해져있을 것이다. 고창읍성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물며 나는 가던 길을 마저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