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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경미 Oct 24. 2024

걸음에 걸음을 맞춘다는 건

  시계가 멈췄다. 약이 다된 모양이다. 시계는 멈췄어도 시간은 멈춰 서는 법이 없다.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것 같은 것들을 데리고 홀연히 떠나버리는가 하면 뒤돌아보지도 않는다. 

  얼마 전 통화를 할 때였다. 엄마도 이제 기력이 많이 쇠하여졌구나 싶었다. 덜컹 겁이 났다. 엄마는 평소 성품이 밝고 씩씩한 편이었다. 게다가 이웃어른들과 늘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는 건강했던 편이라 엄마의 시간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았다. 무엇이든 더는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통화를 할 때였다. 엄마도 이제 기력이 많이 쇠했구나 싶었다. 덜컹 겁이 났다. 엄마는 평소 밝고 씩씩한 편이었다. 게다가 이웃 어른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무엇보다 지금까지 건강했던 편이라 엄마의 시간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다. 무엇이든 더는 미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한나절 시간을 내어 친정에서 엄마와 함께 보내는 중이다. 함께 밥을 먹고 옛이야기도 한다. 배 잡고 웃는다. 나물을 다듬고 멸치 똥도 깐다. 텔레비전에서 흘러나오는 트로트 노랫가락을 따라 몸을 흔들며 따라 부른다. 엄마 한 소절 나 한 소절, 시간 속으로 흘러간다.

  “산책해요.” 말 떨어지기가 무섭게 엄마는 창이 커다란 꽃무늬 모자를 꺼내 든다. 가을볕에 얼굴이 탄다며 한사코 모자 하나를 더 꺼내어 내게도 씌워 준다. 팔순이 훌쩍 넘은 엄마가 새삼 놀랍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내안에서 절로 웃음이 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윗마을로 발길이 향한다. 이사하기 전 못가 우리 집이 있던 곳에 다다른다. 지금은 터만 덩그러니 남아 있다. 젊은 엄마와 어린 내가 함께했던 시간들이 알알이 박혀 있는 곳이다. 쉬이 발길이 떼 지지 않는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 우리의 한때가 엄마의 기억 속에는 어떻게 자리하고 있을까.

  나도 누군가의 엄마가 되어 엄마 앞에 서있다. 엄마가 되어보지 않았다면 도무지 알 수 없었을 엄마의 심정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와 딸로 만난 우리가 여자와 여자 혹은 인간과 인간으로써는 또 어땠을까.   

  엄마의 걸음에 내 걸음을 맞춘다. 빠르기를 늦추고 폭은 줄인다. 한 번씩 멈춰 서기도 한다. 걸음을 맞추다보니 지금까지 엄마의 걸음이 언제나 우리 걸음에 맞춰져있었겠구나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늘 내 속도로만 달리다가 누군가의 속도에 맞춘다는 게 낯설다.  

  걸음을 맞춘다는 건 마음을 맞춘다는 것일까. 마음을 맞추지 못해 삐걱삐걱, 누군가와 나란히 걸어보지 못한 나의 모습들이 스친다. 걸음을 맞추기는커녕 속도를 더해 빨리 달려야하는 줄 알았다. 옆도 뒤도 보지 않았던 시간들이 되돌아봐진다. 

  엄마는 마을과 하나인 듯 편안하기만 하다. 오랜 세월을 함께 해오는 동안 서로가 서로에게 스며들었을 것이다. 서로는 서로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윗마을 끝 어귀를 돌아 나가려 할 때이다. 집집마다 수도가 들어온 지도, 잊힌 지도 오래이건만 그 옛날 그곳에 떡하니 우물이 서 있다. 한때 우리의 생명줄을 잡고 있었던 것이 유물이 되어 내 앞에 서 있다. 지금은 쓸모없다 해도 유물은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이리라.

  누구에게나 빛나는 시절이 있기 마련이다. 온 마을 사람들이 우물에 기대어 생명을 이어가던 그야말로 우물의 전성기와 같다고 해야 할까. 학교에서 돌아오거나 잠에서 깨었을 때 엄마가 없으면 온 세상이 텅 빈 것 같고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두려움에 휩싸였다. 어린 우리에겐 오직 하나뿐인 존재였던 엄마의 그 시절이 그런 한때가 아니었을까. 

  시간 속에서 시대는 변하고 아이는 자랐다. 우물도 엄마도 그때와는 처지가 사뭇 달라졌지만 쉼 없이 샘솟던, 끝없이 주고 또 주던 사랑만은 잊히지 않을 일이다.

  걸음을 뗄 때마다 커다란 꽃무늬가 엄마와 함께 너울거린다. 엄마는 아직도 꽃같이 내 곁에 서서 걸어가고 있다. 지나온 길이 다 꽃길 같기만 했을까. 숨이 차서 한 발짝 내딛기 힘든 순간이 있었을 테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주저앉고 싶은 순간도 있었을 것이다. 지나고 봐도 아찔한 순간들, 굽이굽이 이어진 길을 지나와 지금 엄마는 나와 산책 중이다.

  누군가의 시간은 사라져가고 누군가의 시간은 새롭게 생겨나고 있다. 엄마와 우리의 시간이 하나로 뭉쳐졌다가 이제는 엄마의 시간이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까지나 함께할 수 있으리란 마음도 불안하게 흔들린다. 오늘 산책길에서처럼 엄마와 나란히 걸을 수 있는 시간이 또 얼마나 허락이 될까. 

  걸음에 걸음을 맞추는 사이 시간은 저녁을 향한다. 엄마의 시간과 접점을 이루며 빚어낸 우리의 이야기들이 노을에 어린다. 아팠던 기억마저 곱게 물든다. 엄마와 함께한 순간들이 사무치도록 소중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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