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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Nov 12. 2023

주사보다 애잔한 글

맨정신이 써서 그래요

피부 급발진 4일 차. 급발진의 시작도 술이고 결과도 술이다. 숙취와 피로가 누적된 화요일 아침, 피부가 먼저 사인을 보냈음에도 나는 그것을 흘려보냈다. 하루를 꼼꼼히 세분해 다른 날보다 더 야무지게 고루 술을 나누어 마셨다. 큰 맘 먹고 술 한잔 하러 서울에 방까지 잡아 놀러 온 친구를 모른 척할 수 없었던 탓이다. 그 '지방'이라 하는 곳은 무려, 수원. (웃음 포인트)


알레르기피부 발진 징후가 보일 때 술은 쥐약이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는데 알 밤 두 알 양쪽 눈두덩이에 한알씩 얹은 느낌이다. 눈썹과 눈 코 입을 둘러싼 삼각형 부위가 숙성 소고기처럼 벌게진 채 고구마처럼 부었다. 안 떠지는 눈 뚜껑을 겨우 들어 올리고 모자에 마스크, 안 쓰던 안경까지 꺼내 써 위장한 채 그러그러 하루의 일정을 마쳤다. 주사도 맞고 약도 먹고 '약건성 및 문제성 피부를 위한 고보습 장애 케어 로션'을 종일 발랐다. 오분만 지나도 발진 부위가 바짝바짝 마르고 당겨지는 터라 적당한 유분과 수분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수 목 금 토. 덕분에 논 알코올 데이를 보내고 있다. '급발진의 결과도 술'이라 말한 것은 다시 말하면 'non 술'이란 의미다. 몇 년 전만 해도 이런 증상쯤은 하루면 회복이 됐고, 다음 날 맥주 한두 잔 정도는 가벼이 들이켰는데 이제는 나흘 째가 되도록 유증상자다. 따끔 따끔 하고, 찬바람과 매운 것에 반응하고, 덥고 건조한 공기에 반응한다. (오늘, 동네 서점 북토크에 갔다가, 행사 마지막까지 버티지 못하고 돌아옴)


이런 일엔 덤덤한 편이다. 흰머리가 나기 시작할 때도, 얼마 전 안과에서 노안을 진단받으며 다초점 렌즈를 사용하기 시작하던 때에도, 또 이번의 더디디 더딘 피부 회복에도 예민하게 반응하지는 않는다. 모두가 고루 코비드에 감염되듯 모두가 고루 나이 들고 있는데, 그것이 무에 그리 억울하고 서글플까. (라고 이렇게 오만해져서는 안 되는데. 본격적인 갱년기에 돌입하면 내 마음이 어떨지 나도 모르는 것을)




어차피 이 글은 '김보리 주사집'에 올라갈 글이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흘간 술 한 방울 먹지 않은 건 실로 오랜만의 일이다(술 안 먹는 사람은 읽지 않았으면). 고로 이 글은 주사가 아니다. 주사가 아님에도 주사보다 애틋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사나흘 간 이상하게 쓸쓸했다. 심심하거나 외롭지 않게 혼자의 시간을 다채롭게 즐기는 편인데, 요 며칠 무얼 해도 한 구석이 허전한 게 사실이다. 한두 잔 곁들이며 책을 읽고, 어학 공부를 하고, 글을 쓰고 빨래도 개고 옷 정리도 하던 일상의 시간들이 내 삶의 꽤나 큰 부분이었던 모양이다. 과하게 마신다면 유지할 수 없는 일상. 적당히 한량하고, 고독할 때 성실할 수 있는 나의 정체성은 아마 그런 시간들이 모여 이루어진 취중 감성 열성의 결과였나 보다.


친구 집에서 자고 온다는 딸의 말이 쓸쓸하게 들리긴 처음이다. '으, 밑반찬에 술 한잔 하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이 바로 따라오는 걸 보면, 딸의 부재가 아닌 술의 부재에 휘둘리고 있다고 봐야겠다. 편의점에 들러 생수만 사들고 들어오는 걸음이 어찌나 허전하던지.


피부도 건조하고 공기도, 마음도 건조하다 못해 한량함마저 쩍 말라버린 것 같은 밤. 피부 급발진의 교훈을 야무지게 곱씹는다. 건강 관리 잘해라. 그래야 길게 마실 수 있다. 이젠 정신이 몸을 모시고 살아야 할 나이, 몸의 사인을 무시하지 마라. 덧붙여, 맨 정신에 사실 더 야무지게 일상을 살았음을 인정해라. (인도네시아어 공부 엄청 많이 했음) 내일도 논 알코올로 열공, 나중의 공부까지 끌어다 열공하고 다음 주엔 날 잡아서 혼술 해야지. 그나저나 주사집에 이렇게 맑고 명징한 글을 써도 되나 모르겠네. 허전해서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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