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순 옷장

by 김보리

며느리가 사준 빨간 스카프 (백화점)

사드린 지 꽤 됐는데도 날만 추워지면 꼭 이것만 두르신다. 며느리가 철마다 사드린 스카프가 여러 개인데 그중 가장 애착하는 캐시미어 스카프. 오랜만에 들른 백화점에서 ‘어머니, 이거 한 번 해보셔요’ 권할 적엔

“어우우, 내가 목도리가 몇 갠데 이걸 또 사, 안 사 안 사…” 하더니, 이미 목에 두르고 있다. 희색이 만연, 더없이 흡족해한다. 사주는 마음이 더 뿌듯하다. 좋은 것을 사드리면 애지중지 오래 쓰고 쓸 때마다 고마워하는 착한 마음을 가졌다. 그럼요, 그럼요. 그리 하시니 또 사드리고 싶어요.


연두색 쉐터 (수입상가, 이태리제)

이을순 쇼핑 역사상 최고의 히트템, 최 장수 애장템. 밝은 연두 바탕에 진 밤색 무늬가 자잘한 카디건과 셔츠, 세트 상품. 서울 살던 시절 아파트 수입상가에서 무려 30만 원을 넘게 주고 사셨단다. 시간을 되짚어 보면 30 년 전의 일이니, 고가의 옷이다. 입을 때마다 들어야 하는 의복의 역사고, 입을 때마다 공감해야 하는 찬사다. 30년, 30만원, 이태리제, 캐시미어. 귀에 인이 배겨요, 어머니.

“이게 이게, 너어어무 좋은 옷이야. 만져봐. 이게 이태리쩨잖아. 뽀풀도 없어. 케시미 옷이 이렇게 좋다니까….”

그 시절엔 수입상가가 백화점보다 우세였다. 속옷부터 가방, 구두, 보석, 그릇까지 없는 게 없었지. 미제, 일제라는 말이 입에 붙어있던 시절이었으니까. 캐시미어 카디건 세트를 얘기할 때 꼭 따라붙는 부록 같은 쇼핑의 기억은 친구들의 귀걸이. 어머니 살던 아파트의 수입상가 물건이 꽤 좋았던 모양이다. 100만 원짜리 귀걸이를 그곳에서 세 분이나 사셨단다. 너무 비싸 어머님은 끄응 하며 마음을 접으셨다고. 그 역시 30년 전의 이야기다. 30년 후를 살면서도 3만 원짜리 보세 반지 하나도 잘 안 사는 김보리로서는 기가 찰 노릇이다. 그때로 돌아가 참 잘했다고 이을순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싶다. (김보리도 외모 치장 아닌 딴 데다 돈을 많이 쓰는 것이지 그리 알뜰한 사람은 아니다)

연두 캐시미어 카디건 세트는 차츰 등판이 더뎌지더니, 금번 겨울 며느리 집에 올 땐 챙겨오지도 않았다. 얼마 전엔 구멍 난 곳을 세탁소에서 잘 수선했다며 뒤집어 보여주셨는데, 이제는 슬슬 과거의 유물로 사라질 모양이다. 퇴역 군인처럼, 혹은 은퇴 선수처럼 눈에서 사라질 테지만 그 명성은 이을순 쇼핑사(史)에 별이 다섯 개 히트템으로 오래 남을 것이고, 훗날 딸과 며느리 손녀들도 보푸라기 없이 잘 늙어간 이을순 같은 이을순의 옷을 두고두고 기억할 것이다. 며느리 김보리와 손녀 송승윤, 그대들의 인생 히트템은 무엇인가요. 기억해 줄 만한 애착템은 무엇인가요. 누구에게든 그 사람을 떠올릴 만한 시그니처 아이템 하나 쯤 있는 것은 기억 한 켠을 따뜻하게 해준다.


검정 맞춤 옷 한 벌

시아버님 절친의 아내는 옷을 짓는 분이셨다. 한때 또 양장점이라는 게 수입상가처럼 사모님들께 백화점보다 더 친근하던 곳이었다. 백화점이 흥하며 하나둘 의상실이 사라지던 시절이었으나 아버님은 이따금 그곳에서 옷을 맞춰 입으셨고, 이을순에게도 선심 써야 할 일이 있을 때마다 옷을 한 벌씩 맞춰주셨다. 며느리 김보리도 얻어 입은 일이 있으나, 취향에 맞지 않아 실은 한두 번 입고는 말았더랬다. 좋은 수입 원단을 쓰고, 오직 단 하나의 고객을 위해 한 땀 한 땀 손으로 지으니 꽤나 고가다. 그들만의 오뜨 꾸뛰르라고나 할까.

몇 벌의 맞춤옷 중 가장 자주 입던 옷은 까슬한 흰 깃에 반짝이는 알 단추를 단 위아래로 새카만 정장 한 벌. 그 옷 한 벌이 있어 옷 살 일이 줄었다. 격식 차릴 자리라면 어디든 다 어울리는 옷이었다. 체격이 늘 비슷한 편이라 옷이 작아지거나 커지지 않으니 좋은 옷 한 벌이면 십 년을 넘겨 입는다. 이태리제 캐시미어 카디건 세트처럼.

영감 살아있을 땐 옷 선택의 자유가 없었다. 워낙 의견이 강하고 세세한 것에도 매의 눈을 들이대는 탓에 그저 남편 좋은 대로 옷을 입어야 했다. 이제 혼자되었으니 맘 편히 사 입어도 좋으련만 자식이 주는 돈이 아까워 쉬이 옷을 사지 못한다. 양장점서 지인의 손으로 지은 깜장 옷 한 벌은 아마 앞으로도 꽤 오래 애정 아이템이 될 것이다. 그 옷 입고 다니실 만한 좋은 자리가 더 많았으면 좋겠다. 그보다 더 좋은 옷 한 벌 사드리고 싶다. 더 좋고 덜 비싼 기성품으로.


돈 주고 사야 내꺼지

며느리나 손녀 옷 중 좋아 뵈는 옷을 발견하면 눈이 커지며 본능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이 있다.

“오오, 이거 어디서 샀어? 비싼 거야-?”

눈치 밝은 며느리 손녀가 한 번 입어보시라 권하면 절대 필요 없다고 고갯짓 하는 동시에 소매를 끼고 있거나 바지를 추리고 있다. 옷에 대해 그리 애착이 크지 않은 김보리, 송승윤은 곧잘 “드릴까요?”라며 선뜻 옷을 건넨다. 맘에 들어 하는 표정을 읽을 수 있다. 환해지는 것이다. 옷에 대한 칭찬이 많아지는 것이다. 세 번쯤 거절하다 지갑을 열며 계산을 한다. 그냥 가져선 절대 내 옷이 안 된다는 말은 지당하다. 오천 원이고 만 원이고 돈을 쳐서 주곤 기쁘게 옷을 얻는다.

며느리는 옷을 잘 안 사거나 너무 싼 것만 사서 탈인데, 가끔 괜찮은 옷이 눈에 띄면 역시나 쉽게 발각되는 그녀의 뜨거운 구매욕. 이번 겨울 횡재는 며느리의 롱패딩이다. 김보리 역시 그리 자주 입는 편이 아니었던지라 바로 넘겨 드렸다. 추위를 많이 타는 이을순에게 더욱 유용한 옷이라 생각돼 드리려는 마음을 먼저 먹기도 했다. 고가의 옷으로 보였는지 통 크게 오만 원을 내주셨다. 곁다리로 밝은 원색의 초록 숏패딩도 함께, 원 플러스 원 개념으로 생각했으나 그래선 안 된다며 만 원을 더 주었다. 손녀 송승윤에겐 캐시미어 초록 니트를 샀다. 부드럽고 따뜻해서 매일 입는다. 역시 옷은 캐시미지. 매일 입고 매일 칭찬한다. 너무 소중해 드라이클리닝 맡기러 세탁소에 다녀왔는데 6천 원이라길래 다시 들고 왔다. 어머님 사실 그 옷, 승윤이가 구제로 오천 원인가 주고 샀을걸요. 절대 드라이 하지 마세요.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일이니.


옷 구매 시 유의사항

⦁ 옷은 무거우면 꽝이야

어떤 옷이든 먼저 무게를 가늠한다. 내 옷이건 남의 옷이건, 누워있건 걸려있건 일단은 다 손에 쥐어본다. 무거우면 꽝. 자식 손자들이 무거운 옷을 입고 다니면 안타까워 죽겠다. 옷이란 우선 가벼워야지, 이걸 어떻게 입고 다녀…. 옷을 고르는 기준이 여러 개일 수도 있는데, 이을순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다.

⦁ 면 백 프로, 캐시미가 최고

일단은 면 백 프로여야 한다. 나일롱 그런 건 절대 안돼. 폴리는 좀 섞여도 되는 것 같다. 요즘은 면이 아니어도 다 감이 좋다고 며느리 김보리가 아무리 말을 해도 동의하지 않는다. 겨울엔 단연코 캐시미어. 아니면 모 백 프로. 어떤 옷이든 훌러덩 속을 뒤집어 깨알 같은 글씨의 옷 성분 표를 확인해야 한다. 피부로 느껴서 좋은 옷이면 되지, 성분이 뭐 그리 중요한지 덜렁덜렁 김보리는 이해할 수 없다.

⦁좋아하는 색이 따로 있지

특이하게도 카키색을 좋아한다. 국방색이라고도 하는 그 색깔. 점잖고 고상한 색이라고 생각한다. 김보리의 국방색 투박한 야상을 좋아해서 비슷한 것을 한 벌 드리기도 했다. 잘 어울리는 편이다. 환하게 튀는 원색보다는 차분하고 채도 낮은 파스텔 톤 색을 좋아한다. 분홍색이 잘 어울린다. 낯빛이 화사해 어느 색이든 잘 어울려 옷 사드리기가 편하다. ‘옷 필요 없다, 돈 아껴라’ 극구 사양해서 잘 안 사드리게 되는데 괜한 말일 수도 있으니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는 말아야지. 지난 어버이 날 우격다짐으로 주름 옷을 위아래로 한 벌 사드렸는데 얼마나 좋아하시던지. 채도 낮은 분홍 옷에 검정 주름 바지는 향후 십 년 간 이을순의 봄과 초여름을 빛나게 해줄 것이다. 사드리고 싶을 땐 묻지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저 사드리자. 그럴 날이 그리 많지 않다.

며늘네 동네 핫플레이스 유니클로

며느리네 올 때마다 방문하는 곳이다. 며느리, 손녀와 두 번쯤 가고, 며느리 없을 때 안 가는 척 하고 한 번 더 가기도 한다. 딸네 동네엔 없다. 싸고 좋다. 이젠 비싼 옷은 사지 않는다. 수입상가, 그런 거 다 옛말. 잠옷 바지를 자꾸 사니 며느리가 말린다. 다 쓸모가 있다 하신다.

철마다 입고, 딸도 주고, 사돈도 주고. 다 쓸 데가 있어어.

갈 적마다 며느리도 뭐든 하나라도 사주고 싶은데 절대 안 산다. 요 며칠 전엔 갔더니 옷이 별로 없다며 ‘이제 문 닫으려나 보네’ 말씀 하시는데, 아마도 세일 끝난 후라 물건이 없었나 보다. 이을순 단골 옷가게 유니클로. 그녀를 위해선 흥해야 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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