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들은 때때로 화장품 구매 대행 용병이 된다
나두 옛날엔 고급 화장품만 썼어. 부러 그랬다기보다는 이따금 자식들이 사주는 게 외제도 있고, 국산도 비싼 거로만 사주니. 아, 이게 비싸니까 좋구나 한 거지. 그러다 외손주가 군대를 가서 사다 준 화장품이 아주, 그만이야 그만. 돈 만 원두 안하나븐데 십만 원짜리 저리 가라야. 딸네 동네에 ‘충성마트’가 있어서, 화장품 떨어지면 사러 가고 그랬어. 외손주는 작년에 제대했는데, 제대 전에 몇 개 쟁여놨지. 그게 이제 다 떨어져 가네. 걱정 없어. 친손주가 올 1월에 군대 갔거든. 지금은 훈련병이라 못 사지만 휴가 때 사오겄지. 비싼 거나 똑같애. 좋다니까.
아이고, 영감들 따라올까 걱정이라니까.
어매. 웬일이야. 모냥 안 내는 며느리가 얼굴에 뭘 척 붙였네. 나두 해보래서 첨엔 싫다 그랬어. 구찮게 뭘. 이 나이에. 근데 자꾸만 들이미니 한번 해보까 싶더라고. 며느리가 척 붙여 주는데, 어우, 차가워, 얼음장이여. 근데 이게 붙이고 있으니 그냥 시원하고, 나중에 띠고 보니까 세상에. 땡땡해. 주름이 펴졌어. 신기허지? 한 번에 확 좋아지더라니까. 며느리한테 아이고 영감들이 줄줄 따라올까봐 걱정이라 그랬어. 띠낸 걸로 목도 치대고 몸에도 치대. 응, 치대, 더 치대 더. 아꾸워.
처음에 안 한다고 극구 사양하시더니 나중엔 이틀거리로 같이 팩을 하고, 친구 집 놀러 갈 때도 넉넉히 싸 가고 딸집에 내려갈 때 가져갈 수 있나 은근 궁금해 하신다. 돈 주고라도 더 사고 싶은 눈치. 노인도 예뻐지고 싶다. 숨기고 있을 뿐. 자아를 의식하며 생기기 시작한 그 욕구는 자아를 잃기 전까지 놓기 힘들다. 숨기고 있는 것을 꺼낼 수 있도록 이따금 판을 깔아드리자.
이거 좋아, 바다로션인가 뭔가. 아가도 사주까?
친구 따님이 다단계 마케팅회사에 다니고 있고, 그 회사에서 나온 바디로션을 친구가 선물로 주신 모양이다. 혹시나 쓰다가 그 용도를 잊을까 싶어 늘 그렇듯 진한 유성펜으로 적어두신다. ‘바다’로션이라 명명하시는데 그래도 적을 땐 바디로션. 좋은 걸 쓰면 자식도 쓰게 해주고 싶어 안달이다. 처음 써본 며칠간은 볼 때마다 채근이다.
“이거 두 갠데, 아가 하나 줄게, 엄청 부드러….”
“아범도 이런 거 있어? 주까?”
우리도 우리에게 맞는 걸 잘 쓰고 있는데, 다른 취향이나 개성 등을 고려하는 게 쉽지 않다. 내게 좋으니 자식에게도 좋은 걸 텐데, 왜 안 쓰나, 아쉽기만 할 뿐.
목욕탕에 샴푸, 린스가 없어서 비누로 머리 감았다고 하시던데. 좋은 걸로 종류별로 다 있는데 죄다 영어로 쓰여 구분이 어려웠나 보다. 우리도 어머니를 위해 검고 굵은 매직으로 진하게 써놓을 일이다.
[샴푸] [린스] [바디워시] [바디로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