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순하다’ ‘을순스럽다’라는 말은 바로 이 소재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수납장이라 이름 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수납의 방식’으로 규정할 만하다. 그녀는 언제나 빠르다. 거침없고 무엇에도 개의치 않고 행동하며 사물을 처리한다. 그 연배 어르신들이 대개 그렇듯 아끼고 아끼며, 주변의 사물을 용도에 상관없이 자신의 의지대로 활용해버린다. 손거울이 뚜껑이 되기도 하고, 멀쩡한 컵이 또 다른 컵의 뚜껑이 되거나 과일이 종지의 덮개가 되기도 한다. 음식 봉지를 야물게 묶고 있는 것은 고무장갑 끄트머리 밴딩. 이를 두고 때로는 감탄하고 때로는 경악하던 며느리 김보리와 손녀 송승윤은 그것을 카메라에 담아두기 시작했다.
“와! 정말! 할머니 대단하다!”
“아이고, 어머니!”
하던 중 어느덧 그 장면에 중독되기 시작했고, 한 끼의 식사가 마무리되고 난 후에는 또 어떤 작품이 나올까 기다려졌다. ‘아, 정말 을순스럽다’는 느낌이 저절로 생겨났다. 그녀가 주로 활동하는 주방과 식탁, 베란다에서 수시로 발견되는 작품은 사물(대개는 그릇)의 용도나 크기의 순서 혹은 비례, 음식의 지속성에 대한 기대 등을 철저히 뒤집고 비틀며 그야말로 느닷없이 전시된다. 살림의 주체인 며느리 김보리는 이따금 뒷머리를 잡기도 하지만 속마음을 살피면 또 이해할 수도 있는 일이다.
“오, 너, 그 물 버리지 마, 내가 다 먹을 거야.”
“간장 남은 거 내일 밥 비벼 먹게 그냥 둬.”
“비니루 랩은 쓰기도 힘들고. 아까워어. 그냥 이걸로 덮어 놔.”
먹을 수 있으면서 버려도 되는 것은 그녀에게 없다. 뭐라도 아끼려는 마음에 잡히는 대로 덮어 버리고 되는대로 쌓아 버리는 그녀만의 수납을 시작으로 이을순은 차츰 손녀의 뮤즈가 되었다. 할머니의 사물, 말씀, 소일거리 등을 꼼꼼히 수집 기록하는 손녀의 일은 ‘이을순 수납장’에서 시작되었다. 찍을 만한 게 있었는데 놓쳤다고 김보리가 안타까워하면 승윤은 말한다.
“엄마, 걱정 마. 한 끼 먹으면 또 나와.”
언젠가 함께 오래 살게 되면 그때 김보리는 이을순식 수납에 약간의 수정을 요청할 지도 모른다. 그래도 아직까지는 그녀스러운 그녀의 수납장이 그저 웃음 나고 재미져서 좋을 뿐. 이 글과 사진 모음은 여기서 시작됐고, 아마도 이을순 수납 사진 컬렉션은 오래 오래 계속될 것이다. 실물을 보면 더 좋을 텐데. 웃기고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