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순 연애사

by 김보리

고등학교 때의 일이라고 우기지만 이따금 불쑥 튀어나오는 말씀으로 짐작건대 중학교 때부터인 것도 같고. 아마도 할머니 중학생, 할아버지 고등학생 시절에 시작된 일인 모양이다. 그때 그저 오빠 동생으로 알고 지내다 이을순이 고등학생 되고 난 후 비로소 사이가 무르익어 연애가 됐을 터. 이을순은 손자 손녀 앞에서 자주 그 시절 얘기를 꺼내고, 그때 잠시 눈이 밝고 웃음이 화사하다. 수원 서호 근처 딸기밭에 자주 갔고, 원천유원지(현재 광교호수공원)에서 보트를 탔으며 그때 할아버지는 “오빠만 믿어!” 물에 빠지면 오빠가 건져줄 터이니 걱정하지 말라며 겁 많은 할머니를 구슬렀다고.

해병대 136기 복무 말년, 포항에서 완행열차를 타고 이을순을 만나러 온 적이 있다는 할아버지. 휴가 끝 복귀 시점에 벌인 일이라 이을순은 그것을 ‘탈영’이라 부르나 그에 비해 처벌은 미미했다고 한다. 여럿이 어울리며 만나던 동갑 남학생을 처음 둘이 만나기로 약속한 것을 어쩌다 할아버지에게 말하게 되었고. 정식 연애가 시작되기 전의 일이었음에도 할아버지는 약속 장소인 수원역 앞에 홀연 나타나 두 살 어린 남학생의 아구창(이을순의 표현)을 날렸다고 한다. 그 학생은 순순히 맞고 있더냐고 김보리가 물으니 그 시절 해병대는 반 깡패였다고, 가만 안 있으면 어쨌을 것이냐고 되물으신다. 미래 연적의 아구창을 날리던 그 순간이 어쩌면 공식적인 연애 시작, ‘오늘부터 1일’ 아니었을까. 어느 밤엔가 할아버지는 “을순아, 나랑 도망갈래?” 하셨고 그러다 스물네 살, 날도 찬 일월에 식을 올렸다. 할아버지 성격이 곧고 거세 이을순 맘고생도 많았지만, 그래도 친구들 남편을 다 합해도 그중 최고의 남편이었다고 추켜세운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살아주어 고마웠소.”


광교호수공원에 가면 보트에 앉아 콧노래 흥흥 하던 젊은 날이 떠오르고, 먼 하늘에 새가 날면 저것이 그이인가 생각하며 가끔 높이 걸어둔 영감 사진을 보면 절로 말을 건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채로 부부가 됐던 엄마 아버지의 결혼을 생각하면 며느리 김보리는 그 연애사가 놀랍기만 하다. 손녀 송승윤에게도 그때 그들의 연애가 지금 또래의 연애와 크게 다르지도 않은 것 같아 신기하다. 이을순은 시대를 앞서간 연애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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