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을순 수첩 뒤에서 나온 흑백 사진에 김보리는 눈이 동그래진다.
“와, 어머니! 다들 영화배우 같아요! 여긴 어디예요?”
인천 월미도 어디쯤일 거라 하신다. 다섯 미녀들이 민소매 원피스에 알 굵은 목걸이로 한껏 멋을 내고 저마다의 포즈와 미소로 싱그럽기만 하다. 구석에 계시면서도 주위 친구들을 조연으로 만들어버리는 화사한 매력을 발산 중인 숙녀 이을순. 어여쁘다. ‘나는 저렇게 해사한 적은 없었던 것 같은데’ 생각하며 김보리는 어머님과 친구들의 한창 때를 신기하게 바라본다. 돌아가신 친정엄마와 시어머니의 삶이 자주 대비된다. 이을순은 비교적 넉넉한 시절을 살았다. 그녀의 성정이 맑고 평온한 것은 거기서 기인할 테지.
사진 속 인물들은 알 만큼 안다. 몇몇은 돌아가셨고, 살아계신 분들도 이제는 한두 번 만나기도 어렵다고 말씀하신다. 중고등학교 친구들이 적당히 어우러진 모임이 하나 있긴 한데 이제는 다들 걷기도 힘들어 모이기가 어렵단다. 모임 이름은 ‘솔방울 회’. 소나무도 아니고 솔잎도 아니고 솔방울이라니. 피식 웃음 나는 이름이나 김보리가 보기에도 시어머니 이을순은 소나무보다는 솔방울에 가깝고, 어린 날 친구들의 모임이니 그게 더 어울리기도 하겠다.
어쩌다 친구 이름 하나를 올리게 되면 그에 맞는 옛날얘기가 술술이다. 그 와중에 그 많은 연애사가 쏟아지고, 또 어떤 이야기는 때마다 반복되기도 한다. 늘 처음 하듯이 깔깔깔 웃음보가 터지는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 부부 동반으로 갔던 울릉도 여행에서 친구 부부가 벌인 일은 웃음만 터지는 게 아니라 먹던 밥도 막 터져 나올 만큼 웃긴 일이다. 사적인 일인지라 여기에 다 적을 순 없지만, 밥알이 불꽃 터지듯 터져 나올 일은 아닌 것 같은데. 그게 열 번을 반복해도 그리 웃기니, 이을순 인생에 아마 그보다 더 웃긴 일은 없었으리라.
미스 경기 선발대회가 처음 있던 날, 누가 봐도 엄지 척인 미색의 친구가 대회에 나가게 됐고, 절친 이을순은 매니저가 되었다. 딛고 설 무대도 없어 사과 궤짝 위에 한껏 폼을 내며 올라섰단다. 퇴근 한 학교 선생님들이 심사위원이었다고. 제일 예쁜 건 을순의 친구였는데, 덜 친하고 덜 예쁜 친구의 언니가 선생님들께 밥 사겠다고 꼬드겨서 그 친구가 선발 되었다며 분해한다. 밥이 소중하던 시절이었으니까. 며느리 김보리에게도 생소한 얘기가 손녀 송승윤에겐 얼마나 재미질까. 반복해서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야기다. 미녀와 사과 궤짝.
솔방울 모임 활동상은 이따금 그녀의 카톡 창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자 기능까지는 적응했는데, 안타깝게도 카톡은 도저히 쉬이 적응되지 않는다. 그녀의 문자와 카톡들을 정리하느라 함께 들여다볼 일이 있는 김보리는 솔방울 회 톡 창에 가끔 부아가 치밀기도 한다. 공유하는 정치 관련 톡들이 기막히다. 눈멀고 귀먹게 느껴지지만, 그들이 볼 땐 또 내가 눈멀고 귀먹은 사람이겠지. 다행히 이을순은 항시 자식들의 의견에 귀 기울이고 별다른 이견 없이 잘 받아들인다.
“젊은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이잖아요. 저희 의견에 귀 기울여 주세요.”
아들 며느리의 청을 합리적으로 잘 수용한다. 그래서 김보리는 그녀를 ‘꼰대의 반대’라고 말하는 것이다.
솔방울 회 모임도 이제는 드문드문이다. 코로나가 기승이고 곧 팔십을 바라보는 지금, 걷기 힘든 이도 여럿이다. 모임 때마다 이을순은 도맡아 전화를 돌리곤 한다.
“으휴, 귀먹은 년이 다 연락을 해야 해…? 내가 이리 설쳐야 되냐. 머어? 천천히 또박또박 말해. 그럼 다 들려….”
그 역할이 싫다면서 싫지 않은 눈치다. 그때 그녀는 들떠 보인다. 빛나 보인다. 김보리 역시 노년이 되고 나면 그제야 깨달을 것이다. 남편보다 자식보다 더 편하고 좋은 게 친구임을. 만나기 수월치 않음이 그제야 아쉬울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