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보리 May 25. 2024

잠과의 전쟁

세 개의 꿈을 꾸고 다섯 개로 분절된 잠을 자고 일어난 후의 아침은 상쾌할 리 없다. 버스 정류장에 가려면 계단을 열두어 개 올라야 하는데 오늘따라 오른쪽 무릎뼈는 유난히 딱딱거린다. 한 이틀 비에 씻긴 대기는 햇살로 샤워 중. 며칠 전 여행지에 선글라스를 흘리고 온 탓에 정면으로 해를 맞는다. 울고 싶어 우는지 눈이 시어 우는지 눈물이 찔끔 난다. 오늘따라 눈꼴신 세상, 맑은 날 울고 싶은 지는 오래됐다. 비 궂은날이 아늑해진 지도 그만치 오래. 날씨 변태, 감성 변태라는 말을 곧잘 듣는데 그도 싫지 않다. 그렇게 생겨먹은 것을. 그 덕에 가끔이나마 내가 나를 짠하게 여길 수 있는 것을.      


조각 난 잠을 엮는 밤은 괴롭다. 꿈도 세 개뿐이었을 리 없다. 선명하게 기억나는 꿈이 세 개일뿐, 분절된 잠의 수만큼, 혹은 그 이상의 산란한 꿈을 꾸었을 것이다. 곤히 잠든 시간보다 잠과 잠을 꿰는 시간이 더 길고, 견디려니 곤혹스럽다. 일어나서 책이라도 보면 좋으련만 혼곤한 정신으론 그조차 쉽지 않다. 영상을 보는 일은 잠을 더욱 쫓을 뿐이다. 꿈에 쫓기다 깼을 땐 쉬이 벗어나지 못해 일어나 앉기도 곤란하니, 베개를 꼭 끌어안고 벽을 향해 돌아 누어 몸을 웅크린 채 잠을 기다릴밖에. 붓 도, 붓 도. 절에서 배운 명상 어를 꼭꼭 씹어 뱉고 그로도 부족하면 빗소리 ASMR을 틀자.   

   

꿈의 기록은 차곡차곡 모여 있다. 이걸 다 엮어 책으로 내 잠 많이 자다 일 망친 사람들에게 벌로 읽히고 싶다. ‘아, 잠 잘 자는 게 복이구나, 복.’ 생각하며 더 잘 잘 것 같아 괜스레 얄밉기도 하다. 붓 도, 붓 도. 빗소리 촤아. 그래도 잠이 오지 않아 며칠 전 SNS를 통해 보게 된 정신 건강 공익 광고를 떠올린다. 6일 동안 오천만 명이 봤다지. 영상보다는 댓글을 보고 조금 울었다. 몇몇 댓글이 꼭 나를 지목하는 것만 같아서.

     



예순쯤 됐을까. 축구장을 찾은 두 친구. 장면은 여러 번 바뀌며 함께 축구 경기를 보는 여러 날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종일관 명랑한 태도로 친구에게 말을 거는 A, 시무룩한 채 말을 아끼며 경기도 보는 둥 마는 둥 하는 B. 편의상 A는 ‘명랑’이라 하고, B는 ‘무룩’이라 부르자.     

“어떻게 지냈나, 친구?

....

“신나지 않아?

....

“한 주 동안 어떻게 보냈어?”

....

“괜찮았어?”

....

“그래?”

....

명랑이가 매번 묻는다. 굼뜬 손짓으로 답을 대신하곤 침울한 표정으로 무룩이는 경기를 지켜볼 뿐이다. 말을 건네는 와중에도 명랑이는 손뼉을 치거나 기립하며 경기에 환호한다. 무룩이는 그저 시무룩하다. 명랑이의 눈빛은 늘 생기 있고, 무룩이는 마음을 알 수 없는 눈빛이거나 때로는 선글라스를 끼고 있다.  


“축구 밖의 상황은 더 좋았으면 좋겠다.”

다정한 말을 건네며 명랑이는 친구를 살피나, 무룩이는 고개를 저을 뿐이다. 무룩이의 목에 걸려있는 응원 팀 머플러는 명랑이가 두르던 것이다. 돌려주려 하니 가지라고 말하며 명랑이는 무륵이의 어깨를 푸근히 감싸고 늘 그렇듯 다정히 웃는다.     

‘가끔은 힘든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사람이 분명하게 보이죠.’     


자막이 흐르고 다시 관중석. 명랑이는 어데 가고 무룩이만 들어선다. 명랑이의 머플러를 빈 좌석 등받이에 걸치고 자기 모자를 빈 의자에 얹으며 잠깐 상념 한다. 반전이다. 정신 건강 공익 광고임을 익히 알고 있기에 누구나 그 반대의 상황을 예측했을 것이다. 무룩이가 남았고, 명랑이가 사라졌다. 밝고, 배려 많고, 생기 넘치던 명랑이는 세상에 없다. 다시 자막이 흐른다.     

‘그러나 가끔은 그 징후가 분명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을 확인해 보세요.’     




찌르르. 심장 아래로 무언가 지나간다. 많은 댓글이 달려있다. 반전에 놀랐다는 사람들이 많고, 그럴 수도 있겠다는 공감의 글도 많이 보인다. 그중 나를 울린 댓글은 이런 글이다.     

‘장난기 많고 배려 잘하는 사람을 잘 지켜보세요.’     


나는 나를 지목한다.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을 때 미디어가 나를 알아봐 준다고 생각하니 문득 덜 외롭다. 여기 있어요, 그런 사람. 겉 다르고 속 다른 사람. 문 열고 나가면 명랑해지고 문 닫고 들어오면 굴 파는 사람. 배려가 습관이고 다정이 병이라 혼자 있을 때 가장 편안한 사람. 그러다 ‘소시오패스’냐는 말까지 들은 사람. 그리 말한 사람이 소시오패스에 가까움을 알면서도 가끔 그 말에 묶여 명치끝이 눌리는 사람. 슬픔 먹고사는 하마, 슬퍼하느라 열심히 살 틈이 없는 사람. 주변 사람들이 살펴주려 해도 어떻게든 그 배려의 망에 절대 걸려들지 않으려 하는 사람. 혼자 앓고 마는 사람.     


우울에는 이유가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유가 없이도 우울할 수 있다. 원인이 있어 아플 수도 있지만 허약한 체질을 타고 날 수도 있고, 아무 이유 없이도 갑자기 앓게 될 수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몸의 건강 상태를 1에서 100까지 나누어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마음에도 그런 건강함의 단계가 있을 뿐이라고 말할 수밖에. 아픈 사람에게 ‘왜 아프냐’고 따져 묻지 않는 것처럼 마음이 아픈 이에게도 ‘도대체 왜’냐고 묻지는 말자. 그 ‘도대체’를 수도 없이 자신에게 표창처럼 꽂고 있을 테니까. 몸이 아픈 것보다 훨씬 부끄러울 것이다. ‘배부른 소리 하고 있다’는 말로 수도 없이 자신을 탓하고 있을 것이다.     


‘내 우울엔 이유가 있다’고 우기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타고난 기질과 자라온 환경, 성장 과정에 주목한다. 나를 객관화해 지켜보기에는 그게 좀 더 편리하다. 가난한 대가족의 틀 안에 살며 언니 셋 오빠 하나의 영향으로 철없기보단 조숙한 막내로 자랐다. 늘 엄마가 애잔해 떼 한 번 써본 적이 없다. 감정을 감출 줄 알았다. 타인의 감정에 예민한 촉수를 가진 지라 잘 듣는 귀를 가졌다. 반에서 가장 어렵게 사는 친구가 늘 곁에 있었다. 귀 기울여 듣고 함께 아파했다. 책과 영화를 통해 공감을 연마했다. 똑똑해지려 읽는 게 아니라, 느끼려 읽었다. 재미있으려 보는 게 아니라 공감을 확장하려 영화를 봤다. 그럼직한 영화와 그럼직한 책만 골라서 보고 읽었다. 우울이 함께 자랐다. 책을 많이 읽어 우울한 거라는 남편의 시각도 아주 틀리진 않다. 친구들은 슬픈 노래를 듣지 말라고 한다. 책을 읽지 않고 애잔한 발라드를 듣지 않는다면, 그런 갬성이라면 글은 누가 쓰고, 소는 누가 키우나. 그렇게 나는 사회화된 내향인이자  사회화된 ‘우울러’ 어른이 되었다.        


아이들이 자라 내 품을 떠나니, 차츰 홀가분해지고 있다. 저절로 ‘나’로 살아졌다. 내향성을 드러내고 예민함을 소문내고 있다. 하도 기막혀 기록만 해놓던 꿈을 이제는 꿀 때마다 꺼내고 있다. 속속들이 내용을 다 적지는 않아도, 깨고 나서 넝마가 된 마음을 꼭꼭 눌러 적으며 느릿느릿 꿈에서 벗어난다. 나쁜 꿈은 예민함에서 온다. 우울한 사람은 불안도, 걱정도 많기 마련이다. 낮의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이 그날의 꿈으로 스캔된다. 근심은 공포로 둔갑한다. 꾸다 깨다, 꾸다 깨다 하다 보니 수면 사이클이 엉망이다. 잠이 어설픈데 사는 게 야무질 리 없다. 집중하기 어렵다. 책이 잘 읽힐 리 없고 글이 잘 써질 리 없다. 잠과의 전쟁. 정신을 다스려야 한다. 마음을 맑게 하는 수밖에.      


근 석 달간 족자카르타에 머무는 동안에는 신기하리만치 꿈이 없었다. 일상에서 멀어져 미리 정해 놓은 일만 따박따박하며 지내는 시간은 평화로웠다. 결정할 일이 없으니, 고민이 덜하고, 걱정이 덜했다. 만나는 사람이 없으니 나만 배려하면 되었다. 생각 대신 공부를 하면 되었다. 돌아오기 일주일 전부터 꿈이 시작되었고 돌아온 후에도 꿈은 이어지고 있다. 우울과 예민함과 나쁜 꿈, 그리고 다시 나쁜 일상의 사이클. 잠과의 전쟁. 마음을 맑게 하는 이상으로, 규칙적으로 매여 있을 일이 필요한 건 아닐까.      


슬픔이 원동력이 되어 연대하고 유대하며 살아낸 날들이 있었다. 오늘은 못된 꿈을 원동력으로 글을 쓴다. 다 나쁜 건 없다. 필터링하는 것도 내 몫이다. 이 글은 그저, 견디는 날의 독백일 뿐이다. 드러낼 수 있는 글인지 덮어야 할 글인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나를 알아가고 있는 과정이라 해두자. 세 걸음쯤 앞에 세워두고 지켜보며 ‘나’를 쓰다 보면 결국 글은 나를 치유해 줄 것이다. 나아지고 있다. 나아질 것이다. 더 좋은 ‘나’ 일 것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