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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보리 Jul 21. 2024

서울 사람이 되었다

서울 사람이 되었다. 어디 사냐는 질문에 “서울, 마포 살아요.”라고 말할 때 우뇌 모퉁이에 10여 초 미세하게 경련이 이는 켕김이 있었는데, 이제 그 감정에서 해방되었다. 주소를 옮긴 것이다. 수원에 이어 용인에 적을 둔 지 25년, 주소를 바꾸며 40여 년 만에 서울 시민이 되었다. 용인과 서울을 오가며 두 집살이를 이어온지 근 2년, 요즘은 대부분의 시간을 서울에서 보내고 있다. 주소를 옮기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다른 거 없다. 원활한 도서관 이용과 자유로운 책 대출을 위해. 그렇게 행정적으로 법적으로, 마포구 성산동 주민이 되었다. 마포중앙도서관에서 보란 듯이 LP를 대여해 음악감상석에 앉아 ‘맹원식과 그의 째즈 오케스트라’를 들었다. 마포 구민이니까, 서울 시민이니까.


“엄마 나랑 살자. 엄마도 서울에 살아보고 싶잖아.”

연남동 방 한 칸짜리에서 방 두 칸 성산동 집으로 옮기며 딸이 말했다. ‘엄마도 서울에 살아보고 싶을 거’라는 말에는 많은 게 내포돼 있다. 딸은 알고 있다. 용인과 서울을 오가며, 엄마가 얼마나 애쓰고 살았는지. 하나라도 더 보기 위해 또 배우기 위해, 두 시간도 마다치 않고 오갔더랬다. 그 갸륵함을 딸은 안다. 뭐라도 붙잡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고 살아온 고단하고 뿌듯한 내 일상을.

     

원래는 서울 사람이었다. 수원으로 전학을 가기 전 열두 살 까지는 서울에 살았다. 열 살까지 살던 행당동 집 주소는 180-40, 지금은 두산 위브 아파트가 들어섰다. 그 시절, 드라마 ‘달동네’가 인기를 끌며 우리 동네가 달동네라는 걸 알게 됐다. ‘달이 제일 먼저 뜨는 동네’라고 누군가 말해주어 말도 못 할 자부심을 느꼈지만, 재빠르게 현실을 파악하며 오래지 않아 감흥은 박살 났다. 어린 것이, 달 좋은 건 알아서. 또, 눈치는 빨라서.


마당 가운데 수도를 둘러 싼 방 여러 개에 이름을 붙여 불렀다. 끝에 방, 옆에 방, 가운데 방, 건넌 방, 안에 방. 가운데 방에는 주인집 식구가 살고 있었다. 옆에 방엔 방직 공장 다니는 언니들이(언니들과 박찬숙, 박양계가 나오는 농구 경기를 함께 본 기억이 선명하다), 건넌방에는 실업자 오빠 둘과 고모라 불리던 아주머니, 안에 방에는 노부부가 어울려 살았다. 우리 일곱 식구는 다닥다닥 방 하나를 가득 채우고 살았다. 문간엔 곤로가 있었고, 낮은 찬장이 있었다. 엄마는 웅크리고 밥을 지었다. 마당 가운데에서 찬물로 칠 인분의 빨래를 했다. 모두의 막내인 나는 모든 어른의 무릎 위에서 놀았다. 드라마의 ‘똑순이’처럼, 똑순이라 불렸다(그때는 나름 똑똑했다우). 어느 날 옆에 방 언니들이 이사를 나가고, 그 방을 얻어 방 두 칸 부자가 되었다. 두 살 터울 오빠와 나는, 하루 종일 두 방을 오가며 호사를 누렸다. 달동네 플렉스.

     

금호동 독채 전세로 옮겨 이 년을 살았다. 그 때는 또 ‘독채전세’ 사자성어가, ‘부자’의 다른 말 같았다. 방 네 칸 집이었다. 방 하나를 지나야 들어갈 수 있는 구석진 방은 아버지 차지였다. 작은 서랍이 빼곡히 이백 칸쯤 될 것 같은 한약 장이 있었고, 낡은 신문이 두텁게 깔린 아버지의 서예 책상이 있었다. 아버지는 달필이었다. 남기신 글은 없지만 그 힘찬 필체는 마음에 오롯이 남아있다. 곰삭은 한약 냄새가 여기저기 배어 있는 집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옷에 코를 묻고 킁킁대며, 자주 냄새를 맡았다. 그 냄새도 그립다. 아버지의 냄새다.

      

이후 아버지는 수원에 집을 샀다. 내 집, 우리 집을 갖기 위해 수원으로 이사를 했다. 내 인생 제1의 쇼크, 전학. 언니 셋과 오빠까지, 네 남매가 졸업한 국민학교에서(게다가 모두 손에 꼽는 모범생이자 우등생이었음), 나는 나름 귀족 계급이었다. 무슨 짓을 해도 예쁨을 받았다(나 역시 우등생 겸 모범생에, 소년미 뽐내는 바가지 머리 귀욤이었다오). 엄마도 아버지도 언니 오빠도, 전학에 관해 누구도 별다른 예고를 하지 않았다. 졸지에 나는 낯선 곳, 낯선 사람들 사이에 내던져질 예정이었다. 예민해지고, 날카로워졌다. 내가 전학을 가는데, 내게 묻지 않았다고? 그런 충격 속에 나는, 조금 이르게 사춘기에 접어들었다.

     

약간의 반항을 부려보았다. 가을 운동회까지는 마치고 가겠노라, 떼를 썼다. 그때에도 지금도, 고집이라곤 없는 편인데, 거의 처음 부린 고집을 부모님은 받아 주셨다. 중학생 오빠는 전학을 했지만, 무학여고 3학년, 숭의여고 2학년에 재학 중인 두 언니는 수원에서 서울까지 통학했다. 고 3 언니를 따라 2주간 서울을 오갔다. 언니의 등교 시간이 대략 7시 반으로 예정돼 있으니 다섯 시 반쯤엔 집을 나서야 했다. 9월이었지만 지하수에 머리를 감을 땐 해골이 얼었다. 돌아올 땐, 제기동 아버지의 한약방에서 시간을 보내다 돌아왔다. 그 보름의 시간이 얼마나 결연했던지. 장렬하게 운동회를 마치고, 교문 밖까지 배웅하는 친구들의 눈물 바람에 영혼을 적시며 학교를 떠나왔다. 그리곤 수원 사람이 되었고, 결혼 후 오래도록 용인 사람이다가 도서관을 핑계로, 다시 서울 사람이 되었다.


     

둘째가 기숙 고등학교에 다니며 생활에 여유가 생겼고, 그 후 읽고 쓰고 배운다는 핑계로 무지하게 서울을 쏘다녔다. 모든 게 다 그렇겠지만, 특히나 배울 것은 서울에 많다. 불교학교에 가려다 순식간에 여행작가학교로 방향을 바꾼 게 시작이었을까(모집일 하루 전, 우연찮게 공고를 보게 되었다). 명절을 쇠고 마침 돈이 없기에, 아이들의 세뱃돈을 조공 받았다. 공평하게 각출 당할 수 있도록 남편도 배려했다. 십오만 원씩 네 몫을 모아 등록에 성공했다. 그 라인에 줄 잘 서서 여적 생을 살찌우며 살아오고 있다.

      

그 외에도, 말도 마라. 캘리 그라프도 배우고, 번역 기초 과정도 듣고, 인디자인도 배우고, 편집 수업도 듣고, 수시로 북토크도 쫓아다니고, 독립영화를 보러 다니고, 전통주 소믈리에 과정도 수료하고(자격증 있음), 바리스타 자격증도 따고, 내 책 출간하기 과정도 다니고, 제주 문화 학교도 다니고, 목공도 배우러 다니고, 다니고 다니고 또 다니고, 숨이 찰 지경이다. 그래서 뭐가 되었느냐 물으면? 아무 것도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나’로 남을 수는 있었다. 나쁜 것이 나에게 들어오지 않게 나를 지키고 살 수는 있었다. 게다가 나는, 배워야 안 아프더라. 배워야 사는 것 같더라. 살림도 못 하고, 돈도 못 벌고 불릴 줄도 모르고, 주식도 모르고, 부동산도 모르니, 배우기라도 해야, 덜 창피하더라.

    

이제야 제대로 서울 사람이 되었다. 극성맞게 동네 책방을 찾아다녔는데, 마포구에만 동네 서점이 오십 개 이상이 밀집해 있다. 삼십 분 반경 안에 예술 영화를 상영하는 독립극장이 네 개쯤 있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 말과 활 아카데미가 지척이니, 배울 게 천지다. 그런데 어느새, 내가 늙었더라. ‘서울에 살고 싶던 엄마’가 서울에 살게 되니 예전만 한 에너지가 없다. ‘왜 요즘 영화를 안보냐’고 아들은 걱정 아닌 걱정을 한다. 배워서 남 주지도, 날 위해서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도서관에나 기대 살기로 했다. 도서관에 가려, 책을 빌리려 주소를 바꿨다. 서울 사람이 되었다. 운전면허증 뒤에 서울 주소가 박혀 있으니, 서울 산다고 말할 때 우뇌 주름이 쫙 펴진다. 서울은. 좋은 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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