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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번여사 May 20. 2023

고치시의 여러 인상들

반전의 반전을! 고치시의 묘한 인상들

고치에 도착해서 터미널을 나오는데 예상했던 오래된 도시의 전형적인 낡고 늙음의 느낌이 아니다. 기차역은 은하철도 999에 나올법한 미래도시의 건물 같은 느낌이라 되려 더 현대적으로 느껴졌다. 쭉쭉 뻗은 도로도 시원스럽게 보인다. 호빵맨(일본에서는 앙팡맨)의 도시답게 터미널 안에도 밖에도 귀여운 호빵맨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계단에도 호빵맨 가게에도 휴지통에도. 나중에 만나게 되는 호빵맨 기차와 전차는 단연 압권이었다. 반갑고 귀여워 사진을 많이 찍었다.


고치역과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호텔을 잡았기 때문에 걸어가기로 했다. 호텔을 찾아 걷고 있는데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강가의 커다란 야자수들이다. 야자수들이 쭉쭉 시원하게 하늘을 향해 뻗어 있는 모습이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라 더욱 근사하다. 큰 도로 쪽으로 나오니 심지어 가로수가 아름드리 야자수들로 되어 있다. 이런 이국적이고 낭만적인 분위기가 다 있나! 나의 기분은 한껏 고조되었다. 이렇게 고치시의 첫인상은 아주 만족스러웠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좀 쉬다 동네 탐방을 하러 나왔다. 누군가 어느 빵집이 맛있다는 리뷰를 본 적이 있어서 그 빵집을 찾아갈 겸 신나게 걷기로 했다. 그러나 큰 도로를 벗어나 작은 도로들을 끼고 걷기 시작하는데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된다. 큰 도로가와는 이렇게 확연히 다른 풍경을 보일 수가 있나? 싶을 만큼 낙후된 동네가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가 지금 2023년이 맞나 싶을 만큼 오래되고 낡은 도시의 풍경. 나는 놀랐다. 걸어 들어갈수록 마치 영화 속의 오래된 도시, 심하게 말한다면 1920년대, 30년대의 근대 일본 영화 속을 거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어떤 곳은 폐허에 가깝게 느껴지는 도시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고치시에 도착해서 현대적이고 이국적인 분위기라고 말했던 것이 짐짓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작은 골목들을 벗어나 다른 큰길 쪽을 걸어봐도 마찬가지였다. 거대한 야자수가 푸른 하늘아래 우뚝 솟아 하늘하늘 흔들리던 강렬했던 첫인상과는 달리 일본의 큰 장점인 깨끗함에 오점이라도 당당히 남기듯 도시 곳곳이 지저분했다. 드러내 놓고 오래된 도시라는 느낌을 주고 싶어 안달하는 것처럼 당당하게 낡은 건물들, 상점들이 즐비했다.


도로가에 버려져 쌓여 있는 쓰레기를 보고 걷자니 남들에게 불쾌하게 보일 만한 것은 눈곱만큼도 허용하지 않겠다고 단호히 말하는 것 같았던 마쓰야마시와는 확연히 다르다. 고치시는 그냥 내 맘대로 할 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인상이다. 도시도 낡고 삶들도 오래되어 총체적으로 늙은 느낌, 아니 고치시 왜 이러나?


여유와 낭만이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도시의 빈곤함과 빡빡함으로 다가오는 고치시. 여기서 나는 노래할 수 있을까? 고민되었다. 불안한 동네, 심상찮은 분위기, 밤 7시가 되어서야 문을 여는 가게들이 즐비하고 밤새 흥청망청 먹고 노는 도시, 애주가들이 널렸다는 술의 도시, 고치시! 여기서 나는 버스킹 여행이라고 할 만한 여행을 하고 돌아갈 수 있을까?


그런데 희한하게도 한편으론 열정과 젊음의 열기도 느껴졌다. 묘한 분위기다. 바닷가라 그런지 바람이 심했다. 모처럼 뜨거운 햇살아래 이국적인 도시를 상상하고 왔기 때문에 챙이 큰 모자를 사서 쓰고 왔다. 바람에 얼마나 거센지 자꾸 바람에 날아 가려한다. 싸구려라 묶는 끈도 없다. 한 손으로 모자를 자꾸 눌러 잡아야 되니 손 하나를 잃어버린 셈이라 좋지 않다. 그렇게 고치시에 도착한 첫날의 인상은 반전에 반전을 주며 끝이 났다.


그렇게 각인된 고치시의 첫날의 인상은 며칠 뒤 호텔에서 자전거를 빌려 타고 다니면서부터 여지없이 깨졌다. 자전거로 더 많은 곳을 돌아다녀보니 걸으면서 일부분만 보고 내린 나의 고치시에 대한 평가가 그것만은 아니었구나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동네는 너무나 예쁘고 고급스러웠다. 깨끗한 곳도 많았다. 이러니 내가 본 단면을 가지고 전체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위험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고치시와 마쓰야마시, 둘 다 아주 오래된 알본의 소도시이지만 고치시는 정제되고 단아한 멋의 마쓰야마시와는 확연히 다르게 자유분방하고 활기찬 느낌이었다. 불과 며칠뒤면 처음 만나던 심란함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모두 사라지고 나는 고치의 매력에 푹 빠져 버리게 된다. 그리고는 당당히 말한다. 시코쿠를 여행한 세 개의 현 중 내게 가장 좋았던 여행지는 고치시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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