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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하 Sep 06. 2018

다녀오겠습니다 [2018버닝맨편]
#4-3 셋째날

코리안 백수 청년의 무모한 버닝맨 탐방기

2018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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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0AM
점점 자연과 동화되어가는 나의 몸. 이제 좀 익숙해지는 것 같더니 지낼 날이 삼일 남짓밖에 안 남았다.
먼지에 싹 뒤덮인 텐트 내부. 충격이었다.

엄청 오래 잔 것 같아 눈을 떴는데 겨우 아침 7시다. 몇 달 만에 일찍자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을 되찾았다. 그런데 텐트내부가 모래먼지로 싹 뒤덮여있다. 이어플러그를 꼈는데도 잠결에 바람소리를 엄청 들리더라니... 그래도 그렇지 이 모래들은 다 어디서 굴러 들어온 걸까. 텐트의 내구성이 심각하게 의심된다. 닦을까 잠깐 생각도 했지만 곧 다시 더러워질 게 분명하니 그냥 같이 생활하기로 했다. 나 자신을 반쯤 내려놓았다. 안녕 모래 친구들.



08:00AM
과카몰리와 샌드위치의 조합.
화이트 아웃 속에서 찍은 사진.

어젯밤 나의 선택이 옳았다. 산드라가 텐트에서 나오더니 어젯밤내내 모래폭풍이 불어닥쳤다고 얘기한다. 모래먼지가 온 사막을 뒤덮여서 한치 앞을 볼 수가 없었다고, 그래서 계속 갇혀 있다가 새벽 네 시에 들어왔단다. 그래서인지 어젯밤 일찍 잠든 사람들로 캠프가 아침부터 시끌벅적하다. 우크라이나 친구들이 오믈렛이랑 그릴치즈샌드위치를 만들어줬는데 과카몰리에 찍어먹으니 미국에서 3개월동안 먹은 아침 중에 단연코 제일 맛있었다.  



11:00AM
화이트보드에다 메모를 남기시는 S.J의 사촌분.
소파뷰. 사람구경하기 딱좋다.

모래 바람이 여전히 심하게 분다. 손과 발에는 아예 가뭄이 일어났다. 어디 나가지도 못하겠고 그냥 소파에 앉아서 사람 구경이나 했다. 사실 버닝맨에서 제일 즐거운 시간이다. 간만에 손님이 찾아와서는 S.J의 사촌이라며 그녀를 찾으신다. 그녀가 여기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데 그녀는 나가고 없어서 화이트보드에다 메모를 남겨두신다. '이따 7시에 파티가 있으니깐 4:45E에 있는 우리 캠프로 찾아와.' 여기가 진짜 21세기가 맞나? 흡사 80년대를 연상케 하는 순간이었다.



02:00PM
뭔가 다를까 해서 가봤지만 특별히 더 끔찍했던 ipoop. 미국인들 정말 존경스럽다.
우리 캠프의 간이 샤워장. 없으면 안했겠지만 있으니까 하게 된다. 진짜 이런 걸 만들 줄이야.

두 가지 중대사에 도전을 한다. 첫 번째는 화장실, 두 번째는 샤워. 화장실은 정말 다시는 생각도 하기 싫다. 미국 이동식 화장실이 뭐 다 똑같지만 보통 이동식 화장실은 그래봤자 하루이틀짜리라 참을 만했는데 이건 일주일가량 배변들이 썩어난 화장실이라서 마스크를 끼고 갔는데도 냄새가 심각했다. 샤워를 할 때는 바람이 하도 불어서 흡사 스트립쇼를 방불케 하는 현장이었는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아서 나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도중에 물이 끊겨서 하반신 밖에 못씼었다. 이상태로 나가서 물을 채우기도 그렇고 다른 사람들을 불러다가 물좀 채워달라고 하기도 미안하다. 대충 마무리하고 나가서 베이비휩으로 상반신을 닦아냈더니 정확히 5분 뒤에 온 몸이 다시 먼지로 뒤덮였다. 이곳에서 샤워는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05:00PM
꿀맛이었던 이날 저녁.

저녁으로 부리또가 나왔다. 버닝맨에서 멕시칸 음식을 먹을 수 있다니 너무 행복하다. 소규모 캠프라 그런지 양이 적어 보이는데도 넉넉하게 먹을 수 있다. 배불리 먹고 또 열심히 페달을 밟아 딥플레야로 향한다. 오늘은 혹시 모르는 상황을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07:00PM
사막의 오케스트라 현장.
저 거대한 할아버지도 오케스트라 공연을 보고있다.

오두막을 지나려는데 사람들이 한가득 모인 것을 목격했다. 스탭에게 물어보니 몇 분 뒤에 오케스트라 공연이 있단다. 해질 무렵 사막에서의 오케스트라 공연이라니... 대단한 사람들. 뭔가 홀린 것 같은 기분으로 공연을 끝까지 봤다. 오늘은 밤늦게까지 놀기로 작정하고 돌아다니는데 우리캠프랑 정반대편 사막에서 사진을 찍으려고 했더니 휴대폰이 없다. 안돼 내 사진들... 엄청난 절망감이 몰려왔다. 휴대폰이 무의미한 사막이긴 하지만 그 안에 내 사진들이 얼마나 많이 담겨 있는데... 우선 헤드랜턴을 머리에 낀 채로 자전거를 타고 오케스트라 현장으로 되돌아갔다. 배고픈 개마냥 땅을 두리번거리면서 페달을 밟고 있는데 저만치에 뭔가 물체가 보인다. 내 폰이다!!! 이 드넓은 사막 한복판에서 그것도 깜깜한 한밤중에 폰을 잃어버리고 다시 찾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09:00PM
LACMA앞의 조명들을 떠올리게 하는  엄청난 규모의 설치작품이었다.

휴대폰도 찾았겠다 기분이 좋아져서 더 열심히 돌아다닌다. 낮에는 그냥 별볼일 없어보이던 작품들이 밤이 되어 찬란하게 빛을 내뿜으니 걸작으로 변한다. 대부분의 작품들은 우리가 만지거나, 올라서거나, 앉아 쉬거나, 들어가거나, 그네를 타기도 하고 매달려서 묘기를 부리기도 하고, 발로차든 뭘 하든 직접 관객과 소통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어 있다. 그 중 가장 인상 깊었던 건 헥사트론이라는 작품이었다. 정육각형 공간안에 1000개가 넘는 엘이디 봉이 꽂혀져 있는데 계속해서 다른 색을 내면서 춤을 춘다. 그 봉들 사이로 걸어다니기만 해도 황홀한데 옆에서 누가 3D 안경을 슬쩍 건넨다. 3D 안경을 끼고 본 헥사트론의 모습은 말로 설명할 수 없다. 위에 영상이 3D안경을 끼고 본 헥사트론 영상이다. 넋놓고 보다가 고맙다는 인사를 잊은거 같아 돌아보니 그 사람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역시나 기쁨은 나누어 배로 만드는 사막의 사람들이다.



10:00PM
사막의 휴식공간. 70년대 락음악이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빛나는 침대. 여기서 산드라를 만났다.

그것 외에도 수많은 조형물들을 구경했는데 너무 많아서 일일이 설명을 할 수가 없다. 최근 인기를 끄는 드론공연도 하고 사람의 행동을 인식하는 인공지능 작품도 넘쳐난다. 침대 주위로 수십 개의 봉이 밝은 빛을 내뿜었다가 사라졌다가 하는 작품이 있었는데 잠깐 앉아서 쉬려고 했더니 산드라랑 몇몇 다른 캠프사람들을 만났다. 이 넓은 사막에서 또 이런 우연이! 핸드폰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얘기하니깐 다들 믿지 않는 분위기다. 산드라 말로는 Lost&Found 서비스가 잘 돼있어서 며칠 후면 찾을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하는데 그래도 그동안 사진 못 찍었을 걸 생각하면 다시 한번 세상 감사하게 된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기껏 이베이에서 30불 주고 산 패딩을 무거워서 안 챙겨왔다. 나시 하나만 입고 밤새도록 돌아다닐 수는 없는 노릇. 극단적인 이놈의 사막기온는 자정이 되면 영하까지 떨어지니 더 추워지기 전에 슬슬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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