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백수 청년의 무모한 버닝맨 탐방기
2018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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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00
일찍부터 바깥이 소란스러워서 깼는데 캠프 사람들이 아침을 준비하고 있다. 여느 평화로운 캠핑장의 아침 풍경... 내 꼬라지를 보기 전까지는 여기가 사막 한가운데라는 게 실감이 안날 정도로 평화롭다. 사람들은 시끄러워서 잠도 잘 못잤다는데 나는 이어플러그 덕에 안 깨고 잘만 잤다. 맨바닥에 침낭 깔고 자서 허리가 좀 쑤신거 말고는 말짱하다. 캠프사람들이 해준 팬케익을 먹고 모자라서 가져온 컵밥도 먹었다.
09:00
맞은 편 캠프가 바리스타 스무명이서 운영하는 로스팅 캠프라고 해서 구경을 갔는데 아침 일찍부터 사람들이 커피를 로스팅하고 있다. 사진찍고 구경하고 있으니 커피도 맛보라고 주시길래 얼른 받아들었다. 맞은 편 캠프에서 왔다고 하니 뭐하는 캠프냐고 물어보시는데, 나도 그게 너무 궁금해요... 라고 대답했다. 진심이었다. 더워지기 전에 걸어서 근처 산책이나 좀 하다가 캠프로 돌아가야겠다.
10:00PM
유일하게 아는 한국인 버너를 찾아 20분동안 자전거 페달을 열심히 밟아서 카르마 캠프에 왔다. 이 캠프는 규모가 엄청 큰 것이 100명도 넘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듯 보인다. 그분은 요가를 하고 계셔서 기다리는 동안 그 캠프사람들과 대화를 나눴다. 도중에 한 친구가 요가가 끝나고 차크라 수업이 있는데 재밌다고 같이 듣자고 한다. 기, 바디에너지 같은 이야기를 하는 걸로 보아 인도 쪽의 민간요법 같은데 버닝맨에 있는 이상 할 수 있는 건 다 참여해보자 싶어서 일단은 알겠다고 했다.
11:00AM
차크라 강사님이 열심히 바디에너지 설명을 해주시다가 각자 몸에서 나는 기를 봐주신단다. 시키는 대로 나름 눈을 감고 이것저것 떠올려봤는데, 나한테서는 아무 색이 보이지 않는다고 좀 더 표현하라는 말을 하셨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지 말고, 마음속에 있는 것을 표현하라신다. 끄덕끄덕. 아침에는 요가와 명상, 밤에는 파티... 다소 극단적인 경향이 돋보이지만 그래도 집 떠난지 6개월 동안 쌓인 심신의 피로가 치유되는 기분이다.
01:00PM
캠프로 돌아왔다. 간단히 점심을 해결하고 텐트에 들어갔는데 내부가 그냥 찜통이다. 캠프사람들한테 도움을 청해서 다 같이 내 텐트 위로 그늘 막을 쳤더니 좀 살 것 같다. 고마워서 뭐라도 대접하고 싶은데 가진 게 햇반 말고는 딱히 없다. 우크라이나 친구들이 후까 만들어서 하는 것도 구경하고 해먹에 누워서 가져온 책도 읽다보니 벌써 저녁때가 되어간다. 샤워를 할까 고민하다가 너무 이른 것 같아서 그냥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았다. 한결 행복하다.
05:00PM
어젯밤 길 잃고 헤맨 썰을 산드라한테 전했더니 self-reliance 모르나며 내 잘못이란다. 흑. 센터 캠프로 가면 와이파이를 잡을 수 있으니 iburn앱을 다운받으라고 한다. 그날그날 스케쥴도 다 나오고 오프라인 위치서비스도 된다며 버너들의 필수 앱이란라고 해서 부랴부랴 센터 캠프에 갔다. 아니나 다를까 입구에서부터 와이파이 없다고 묻지 말라고 써붙여져 있다. 그래도 이왕 온김에 공연과 사진전도 보고 뽑기도 했다. 사람들의 기부로 채워지는 뽑기머신인데 각종 쓸모없는 (그러나 의미 있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기다리는 사람이 없길래 한동안 집중해서 뱃지 한 개랑 스티커 두 개를 뽑았다. 성취감보다도 허리가 아프다.
07:00PM
시간가는 줄 모르고 뽑기를 했는지 벌써 석양이 진다. 내친김에 딥플레야 구경이나 하고 가자며 사막 한가운데로 들어섰는데 오늘따라 석양이 더 장관이다. 그 사이로 패러글라이딩 하는 사람들이 보이는데 세상에서 제일 부러웠다. 사진찍고 돌아다니다 보니 수십명의 사람들을 만나서 대화한 것 같다. 사막은 커뮤니케이션의 장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근방에서 제일 높은 조형물인 지네 전망대에 올라가서 딥플레야 구경을 하려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모래폭풍이 덮쳤다. 얼굴을 무장한 채로 잠시 표류하다가 바람이 옅어졌을 때 얼른 캠프로 돌아갔다. 화이트아웃을 잘못 만나면 하루 종일 사막 한가운데 갇히는 수도 있는데 운이 좋았다.
10:00PM
뒤늦게 저녁을 먹고는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아까 전에 모래폭풍을 만난 뒤로 그냥 움직이기가 싫어졌다. 그리고 그것보다 눈이 너무 따가워서 눈을 뜨기도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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