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하 Sep 06. 2018

다녀오겠습니다 [2018버닝맨편] #4-1 첫째날

코리안 백수 청년의 무모한 버닝맨 탐방기

20180828

-

-

-



Before

텐트만 오면 모든 출발준비가 끝나던 차에 텐트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근데 문제는 사흘 전의 정신없던 내가 샌프란이 아니라 마이애미에다가 배송을 시켜버린 것! 진짜 내 뇌를 갖다 파내버리고 싶었지만 꿋꿋이 구글링을 한다. 여름이라 그런지 근처 월마트랑 타겟에는 소형텐트가 없다. 쥐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아마존 프라임 당일배송 주문을 찾아보는데 딱 하나 있다! 그거 마저도 한시간만 더 늦게 일어났으면 주문 못 할 뻔 했다. 원래 주문했던 건 팝업텐트에 20불이나 더 쌌는데 이건 직접 조립해야 한다. 지금 찬밥 더운밥 똥묻은밥 가릴 처지가 아니다. 하필 카모디자인만 당일 배송이 된다고 해서 눈물 삼켜가며 주문서를 넣었다. 여러모로 아마존 프라임 한달무료체험을 유용하게 쓴 것 같다.



08:00AM
짐이 나를 끄는 건지 내가 짐을 끄는 건지. 인당 두 개의 수하물이 허용된다 해서 캐리어에 텐트와 슬리핑백을 결합했다.
버스에 타기 전 받은 책자. 올해의 테마는 I Robot이다.

내 버스는 10시에 출발하는데, 안내사항에 보면 8시 반까지 오라고 되어있다. 7시에 일어나서 마지막으로 씻고 8시쯤 우버를 탔는데, 고속도로가 꽉 막혀있다. 샌프란시스코 출근시간의 교통체증까지는 미처 계산하지 않은 탓이다. 어제까지는 신나서 팔팔했는데 막상 출발하려니 좀 긴장된다. 더워서 쓰러지는 거 아닌가, 텐트를 못 치는 거 아닌가, 허리케인에 날려가는 내 모습부터해서 별에 별 걱정이 다 든다. 어쨋거나 8시45분쯤 도착했고 나는 부지런히 도착한 편으로 보인다. 코너에 조촐하게 차려진 티켓부스에서 현장발권을 받고 짐들을 버스에 실고 나니 드디어 마음이 좀 놓인다. 티켓 퀄리티가 상상 이상이다.



09:30AM
지도의 디자인이나 일러스트레이션 역시 자원봉사자에 의해 제작되었다.
"Black Rock gives us a chance to heal, to become ourselves." 구석구석에 숨겨진 디테일한 문구들이 너무 마음에 든다.

차에 타서 티켓부스에서 나눠준 캠프지도와 이벤트 스케줄북과 서바이벌가이드를 읽고 있다. 그 거대한 도시에서 일어날 모든 일들이 예측되어있다. 공용 화장실도 많이 생겨났고 심지어 가스 충전소도 있다. 그저 설립자들과 봉사자들만으로 이렇게 어엿한 도시의 모습을 갖추어낸 것이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생각했던 것 보다 너무 체계적이라 실망하기도 했다. 완벽한 축제화가 되어버린 느낌이랄까. 그러던 와중에 내 옆자리에는 뉴욕에서 온 Calolina가 탔다. 페이스북에서 근무한다고 하는데 서울에 출장을 다녀온 적이 있다고 해서 서로의 도시에 대해 잠깐 아는척을 나눴다. 버스에 충전기가 없을 줄 알고 배터리를 아낀다고 휴대폰 어플을 싹다 지워버렸는데, 막상 와보니 있다. 버스가 깨끗하고 좋네. 데이터가 없어서 이제 다운도 못받는데 8시간동안 뭐해야할지 모르겠다.



02:30PM
슬슬 사막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졸다가 서바이벌가이드 읽다가, 밀린 글도 좀 쓰고 간간히 Calolina와 얘기도 하니 이제 점점 블랙 록 시티(버닝맨 도시의 정식명칭-구글맵에 치면 나온다)에 다와가는 느낌이다. 사람들도 흥분이 되는지 소리지르고 한바탕 난리가 난다. 버스는 이미 축제분위기다. 사람들을 한명 한명 찬찬히 살펴보았다. 레오파드 무늬로 전신을 뒤덮은 사람, 얼굴에 수십개의 피어싱을 한 사람, 강철로봇 코스튬을 입은 사람, 전신에 타투를 한사람. 하지만 아무도 서로를 특별한 시선으로 쳐다보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서 ‘평범’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가 규정하는 예쁘고 멋진 옷을 입어보인 사람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옷, 내가 입고 싶은 옷, 나를 즐겁게 해주는 옷. 모두들 이미 진짜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변해 있는 느낌이다.



03:30PM
리노 근처의 작은 마을.

바깥을 보니 여기 버닝맨 근처의 한 마을에서는 버닝맨을 위한 바자회가 열렸다. 수십 여개의 천막아래서 사람들은 요란한 옷들을 팔면서 춤을 춘다. 참가여부에 상관없이, 이곳은 모두가 버닝맨을 축하하고, 즐기고 있다. 모두가 하나 되어 현실을 즐기는 세상. 남과 비교하거나 남을 평가하고 남을 깎아내리지 않는 세상. 어쩌면 버닝맨은 히피들이 꿈꾸었던 이상세계의 축소판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사회가 나아가야할 방향이기도 하고.



04:30PM
인터넷으로만 보던 블랙 록 시티의 모습이 나타난다. 가장 설렜던 순간.

생각보다 일찍 버스디포에 도착했다. 익스프레스 버스의 장점은 긴 대기줄을 피할 수 있다는 것. 이틀 전에는 폭풍우의 영향으로 게이트가 닫혀서 차들이 꼼짝없이 10시간 가량 줄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는데, 역시 사막의 날씨는 아무도 예측 할 수 없다. 나랑 RV타고 가기로 했던 그 아저씨도 그럼 한참 기다렸을라나, 문득 궁금했다. 7시간만에 내렸는데 다행히도 날씨가 예상보다는 선선하다. 그날 폭풍우의 영향으로 먼지도 덜하고 날씨도 덜 덥단다. 원래는 먼지 때문에 산이 안보일 정도라는데 오늘은 주변 산들이 다 보인다. 시작이 좋다.



05:00PM
모래바닥을 뒹구는 사람들.
종을 치고 있는 한 참가자.

버닝맨 첫 참가자들은 도착하면 두 가지 의식을 치른다. 모래에 몸을 뒹구는 것과 종을 치는 것. 일주일을 함께할 모래먼지와 미리 친해지자는 의미정도로 보면 될려나. 어짜피 묻을 거 미리 저렇게 애써가며 묻혀야 하나 했는데 그래도 하고나니 모래쯤은 아무렇지 않아졌다. 하라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두 가지 의식이 끝나고 드디어 캠프로 가는 셔틀을 탔다. 버스디포가 있는 곳은 정중앙 6시 방향이라 내 캠프가 있는 4시 방향으로 데려다주는 셔틀을 타야한다.



06:00PM
비쌌지만 그래도 치기 쉬웠던 텐트. 무늬는 여전히 마음에 안든다.

4시방향의 버스정류장에 내려서도 캠프를 찾기까지 꽤나 애를 먹었다. 다행히 캠프는 4시 10분 근처라 걸어서 겨우 2분 거리에 있었는데, 짐이 너무 많아서 낑낑거리며 가다보니 10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딱히 도와주는 사람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내가 알아서 해야지... 그렇게 캠프에 도착했다. 캠프 대장 랩터씨가 귀여운 마스코트 뱃지가 달린 목걸이를 목에 걸어주셨다. 우선 내 자리를 받아서 텐트를 쳤다. 캠프 사람들이 다같이 나서서 도와준 덕분에 금방 친 것 같다. 캠프까지 치고 나니 안도감이 몰려오다가도 모래에 뒤덮인 짐을 보면 다시 막막하다.



07:00PM
우리 캠프의 모습.
첫 끼!

옷을 갈아입고 캠프에 앉아서 남아있는 캠프 사람들과 인사를 나눴다. 이때 각자 실명이 아니라 가명을 말하는데 10명 가까이의 이름을 한 번에 외우려니 쉽지 않다. 슈퍼맨, S.J, 산드라, 랩터, 메이, 애나 등등. 멤버가 총 30명이라는데 이름 외울 일이 제일 막막하다. 나는 이름을 아직 못정했다고 하니깐 랩터씨가 그럼 그냥 ‘해피’로 하라고 했다. 외우기 쉽다며 사람들이 찬성해서 어떨 결에 내 이름은 해피가 됐다. 그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저녁이 완성됐다. 라면 끓여먹을 생각이었는데 바베큐 치킨을 대접해주시니 절대 마다하지 않았다. 기껏 뉴욕까지 가가지고 라면을 너무 많이 사왔나 싶다.



8:00PM
거미 같이 생긴 오두막. 캠프에서 가장 가까운 조형물이라 밤이면 캠프방향을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이 때 까지만 해도 이게 도대체 뭘까 너무 궁금했다.

자전거를 받아서 슬슬 플레야 구경을 나갔다. 일몰이 장관이다. 데스벨리의 일몰이 떠오른다. 환경이 열악할수록 일몰은 예술이구나. 여기가 지구라니. 해가 완전히 지고 나니깐 또 다른 이질적인 광경이 나타난다. 온 사막이 LED불빛으로 뒤덮였다. 밤에도 각자의 개성을 열심히 표현하는 버너들. 수만대의 자전거가 각자 다른 모양을 하고서는 불빛을 내뿜는다. 사막 한가운데서 사고가 일어나지 않으려면 밝은 LED는 기본이고 개성이 넘칠수록 나중에 주차해놓은 자전거를 찾기도 쉽다. 그거까진 미처 예상 못했던 나는 S.J가 준 LED하나 초라하게 달고 다녔더니 자전거 한번 찾는데만 항상 십분 넘게 걸렸다.



09:00PM
춤추는 굴렁쇠.
굴렁쇠 사이에 들어가면 기분이 몽롱해진다.

버닝맨조형물 근처에서 난리가 났다. 거대한 굴렁쇠 수십개가 각기 다른 색으로 빛나면서 요란하게 춤을 추고 있다. 가서 굴렁쇠들 틈에서 나도 같이 춤을 췄다. 술도 한모금 안먹었는데 뭔가에 취한 기분이다. 화성 어딘가에서 파티가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은 경치다. 이 정도면 전력 소모량이 라스베가스 못지 않겠는데 싶다.



10:00PM
다들 자전거를 참 개성있게도 꾸며놓았다.
드디어 마주한 버닝맨조형물. 멀리서 봤을 때는 큰지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엄청 크다.

캠프로 돌어가려는데 길을 못 찾겠다. 어두워지니 사막이 너무 크게 느껴진다. 직감을 믿고 페달을 밟았는데 [5시 I]에 도착. 방향감각을 잃어서 지나가는 사람들한테 방향을 묻고 다시 밟았는데 [7시 D]. 다시 물어서 밟았는데 [8시 E]. 아니...? 어떻게 갈수록 멀어질 수가 있지? 그제서야 포기하고 시계의 중앙 버닝맨조형물을 찾아가서 다시 방향을 잡고 직감대로 밟았더니 그제서야 우리 캠프인 [4시 D]에 도착했다. 진짜 1시간동안 길을 헤맨 것 같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3시간동안 탔더니 엉덩이가 깨질 것 같다.



11:00PM
소중한 나의 짐들.

무사히 세수도 하고 발도 씻었는데 텐트 안이 너무 더럽다. 소중한 짐들이 벌써 먼지로 범벅이 되었다. 일일이 닦을 생각을 하니 피곤해서 그냥 신경을 끄기로 했다. 무엇보다 잠이 온다. 아직은 내가 여기에 있는 게 실감이 안 난다. 많이 피곤했는지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

-

-

이전 07화 다녀오겠습니다 [2018버닝맨편] #3-2 출발전 여행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