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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하 Sep 06. 2018

다녀오겠습니다 [2018버닝맨편] #4-4 넷째날

코리안 백수 청년의 무모한 버닝맨 탐방기

2018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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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00AM
버번위스키와 샌드위치를 나눠줬던 캠프.
언제나 친절하게 도와줬던 슈퍼맨.

벌써 금요일이다. 눈을 뜨고 아침은 간단히 먹고 캠프 사람들과 옆블록에 시리얼과 커피를 나눠주는 곳에 가기러 했다. 가는 길에 만난 어떤 캠프에서는 아침부터 음료수 같은 걸 나눠준다.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마시길래 나도 한잔 들이켰는데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아서 보니깐 60도짜리 버번 위스키다. 굳이 아침부터 왜 이걸 마시나요... 아침부터 수천개의 캠프에서 파티가 열렸다. 플레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이벤트들로 가득하다. 책자를 살펴보니 요가 캠프가 백개는 넘길래 하루쯤 요가를 하고 싶었는데 어째 오늘따라 내 주변에는 요가캠프가 안 보인다. 사실 플레야가 너무 커서 정작 내가 둘러본 구간이 전체의 1/50 정도 될려나 모르겠다.



11:00AM
쉼터 캠프.
진짜 신나 보였던 아트카.

내친김에 오늘은 플레야 구경을 좀 하려 한다. 쉼터 캠프의 해먹에 누워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지나가는 아트카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모처럼 여유를 되찾은 아침이였다.



12:30PM
광란의 파티 현장.
논란의 내 인형. 펭귄이냐 돌고래냐, 여전히 모르겠다.

캠프에 도착하니 간만에 캠프 사람들 대부분이 모여있다. 소파에 앉아서 각자 경험얘기를 하는데, 아나는 노예캠프(무엇이든 해드립니다 컨셉)에 갔다 왔다고 하고, 샤론은 코리안 스파 캠프(한국식 목욕탕이 그렇게 유명한 줄은 몰랐다 사람들이 미국 각지의 코리안 스파에 대해 칭찬 일색이다), 이지는 masterbation캠프(이 캠프에서 일어난 일은 귀를 의심하게 될 정도로 충격적이었기에 차마 이곳에 적을 수가 없다), 슈퍼맨은 여장캠프(가발과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추는 캠프였던 것으로...) 등등 다들 재밌어 보여서 들렀던 캠프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한다. 사실 기존 세계에서는 ‘재밌어 보인다’는 문장 안에도 정말 많은 사회적 제약이 담겨 있는데, 이곳에서 재밌어 보이는 건 그냥 재밌어 보이는 거다. 슈퍼맨이 드레스를 입고 춤추는 것을 상상해봤는데, 왠지 재밌을 거 같다. 한국에서 그런 일을 벌였다가는 아마 미친 집단 취급을 받고 정신병동으로 내몰렸을지도 모르는 데... 나도 방금 다녀왔던 캠프 이야기를 꺼냈다. 길다란 봉에 인형(spirit animal이라고 불렀다)을 꽂아서 그걸 흔들면서 춤추고 파티하는 캠프, Camp Corny. 내 인형이 돌고래인지 펭귄인지를 놓고 캠프 사람들 사이에 한바탕 토론이 벌어졌는데, 나는 왠지 인형의 항문에다 몹쓸 짓을 한게 미안했다.



01:00PM
보기와는 다르게 맛있었던 인도음식.
슈퍼맨의 결혼식.

점심을 먹고나니 캠프가 왁자지껄하다. 불쌍한 싱글 슈퍼맨을 위해 바스가 옆 캠프에서 신부를 구해왔다. 랩터는 이 순간을 위해서 웨딩드레스까지 가져왔다. 신부의 얼굴이 예뻐서 그런지 슈퍼맨의 얼굴이 유난히 상기돼있다. 드레스 입히고 축가를 부르고 조촐하게 결혼식을 진행하는데 너무 웃겨서 캠프가 발칵 뒤집혔다. 5일동안 있으면서 제일 많이 웃었던 시간이다. 우리 캠프 사람들 하나같이 너무 웃기다.



01:30PM
내 팔뚝에 새긴 헤나+스티커타투
허벅지에 새긴 헤나.

드디어 우리캠프의 정체성을 알아냈다. 우리는 알고보니 ‘헤나’캠프였다. 마이크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불러다가 헤나를 해주는데 대학교 1학년 때 동성로 시내에서 받은 헤나 이후로 헤나는 오랜만에 본다. 도안을 보니 하고 싶은 헤나가 많았다. 뭐 어짜피 며칠 뒤면 지워질 거 아닌가. 닥치는 대로 내 몸에다가 셀프로 헤나를 발라대고 나니(한 10개정도 했다)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출국 전에 서울에서 거주할 때 타투를 받으려고 예약하고 입금까지 다해놓고 전날 펑크 낸 기억이 났다. 그때는 뭐가 그렇게 두려웠던 걸까. 아빠의 잔소리? 남들의 시선? 혹시나 취업? 나중에 질릴까봐? 모르겠다. 막상 헤나를 새겨놓고 나니 만족스럽다. 오히려 너무 마음에 들어서 안 지워졌으면 싶었다. 한국가면 당장 타투부터 받아야지.



02:00PM
제일 오래걸렸던 헤나.
명치에 새겨 달라고 해서 새겨줬는데, 혼자서 상상도 못했던 많은 의미들을 부여하길래 깜짝 놀랐다.

캠프는 뜻밖에도 헤나를 받기 위해 찾아온 손님들로 북적인다. 사람들이 헤나에 아주 열광을 한다. 그중 몇몇 손님이 나의 셀프 헤나에 관심을 갖더니 자기 헤나도 부탁하길래 몇 명을 맡아서 해줬다. 근데 반응이 생각보다 뜨거웠다. 터프하게 그려주던 바스나 슈퍼맨한테 헤나를 받은 사람들에 비해 꼼꼼한 에프터 서비스까지 받은 내 손님들은 만족도가 높았다. 그때부터 마이크를 잡고 있던 이지가 나를 사우스 코리아에서 온 헤나 아티스트라고 소개하기 시작했고 내 손님 줄이 맞은편 로스팅 캠프에까지 닿더니, 결국 로스팅 캠프 리더부부까지 찾아오기에 이르렀다. 꼬박 네 시간 동안 남들 몸에 헤나를 새겨주었다. 참 희한한 부위에 다양한 색깔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그동안 받은 것도 많도 해서 입맛대로 요구대로 다 들어줬다. 비록 일주일이면 지워질 헤나라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기뻐하며 나가는 모습을 보니 기분이 이상하다. 사실 이 캠프를 위해서도 버닝맨을 위해서도 나는 뭐하나 한거 없이 받기만 했다고 생각했는데, 뭔가 조금이라도 나누고 보탬이 된 것 같아 뿌듯했다. 온통 색소 범벅이 된 손이 은근 자랑스럽다.



06:00PM
딥플레야에서 만난 브라질 친구들. 지금까지 봤던 코스튬 중에서 이번 아이로봇 테마랑 가장 잘 어울리는 코스튬인 듯.
신전벽의 에니메이션

마지막 손님을 끝으로 딥플레야 구경을 나갔다. 버닝맨조형물을 밝을 때 보고 싶어서 우선 딥플레야의 중앙을 향했다. 조형물 아래의 신전 앞에서 신기한 복장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났다. 브라질에서 온 사람들이었는데 한국에 너무 가고 싶다며 나도 몰랐던 한국 칭찬을 듣게되서 반가웠다. 신전 내부로 들어가니 내벽을 둘러싼 대형 화면에서 신기한 컨셉의 애니메이션이 상영된다. 뭔가에 홀린 듯 쳐다보게 되는데 굉장히 심오한 내용으로 짐작된다. 이런 디테일 하나하나에도 수많은 창작자들이 모여 고민한 흔적이 엿보인다.



07:00PM
자칭 버닝맨 7대 장관이었던 템플의 일몰. 이 사람들은 저마다 어떤 이야기를 갖고 있을까.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가 너무 궁금했지만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템플 곳곳에 자리한 슬픈 사연들.

템플에 왔다. 버닝맨 답지 않게 엄숙한 분위기가 가득하다. 알고 보니 템플은 버너들에게 일종의 제사공간이다. 세상을 떠난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한 물건들을 곳곳에 놓아두고 일요일에 태워진다고 한다. Man-Burn행사만큼이나 버닝맨의 상징적인 행사라는데, 나는 모르고 있었다. 템플은 건축학적으로 간단한 구조였지만 신비로운 느낌이 물씬 풍긴다. 기둥 한켠 한켠에 적힌 수많은 사연들 때문인지 마음이 짠해지기도 한다. 템플내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위로하며 부둥켜안고 울고있다. 다들 이 순간의 감정에 충실해 보인다. 그러고 보면 버닝맨의 참가자들은 유달리 감정표현에 자유로운 것 같다. 앞에 앉아있던 커플이 하는 말을 엿들었다. "마음껏 울어. 슬픈 일은 있는 힘껏 슬퍼하고 털어내야 또 다른 감정이 들어올 수 있는 자리가 생기는 거니깐." 슬프긴 한 데 딱히 눈물이 나진 않는 걸 보면 나를 비롯한 한국 사람들은 각자의 감정을 억누르는데 이미 익숙해져버린 거겠지. 감정을 자유롭게 표출한다는 건 대단히 동화같은 일이라고 생각했다. 무감각하게 살아갈수록 상황의 무게가 가볍게 느껴지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감정을 숨기고 타협하며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외면당한 감정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날이 올지도 모르지. 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으로 가득한 공간이었기 때문이었나, 템플 속에서 마주한 일몰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웠다.



08:00PM
딥플레야에서 춤추고 있는 애기를 보는 데 온갖 생각이 다들었다.
카멜레온 모양의 아트카.

오늘도 밤은 플레야가 아닌 딥플레야에서 보낸다. 아직도 딥플레야에 못 본 작품들이 넘쳐나고(딥플레야의 작품들을 다 합치면 1000개는 넘을거다) 플레야의 밤은 파티, 술, 춤 그런 느낌이라 나는 딥플레야에 세워진 작품들을 보고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하는게 더 즐겁다. 내일은 Man-Burn행사를 보고 나면 늦어서 자야할테니 딥플레야의 밤을 구경하는 것도 벌써 오늘이 마지막이다. 불태우자.



09:00PM
조명이 예술이었던 광란의 아트카.
드디어 저 조형물의 정체를 알았다.

역시 버닝맨의 금요일도 불금이다. 랩터말로는 날이 갈수록 도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더 화려해질 거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았다. 금요일이 되니 아트카가 1000대도 넘는 것 같다. 티비에서만 보던 드론 공연도 하고 파이어 댄싱도 여러 군데서 진행된다. 오늘은 자전거를 팽개쳐두고 아트카도 몇 개 타봤다. 아. 왜 사람들이 아무도 시키지도 않고 돈 받는 것도 아닌데 생돈 들여서 아트카를 만들어다가 이 사막까지 끌고 오는지 얼핏 짐작이 갔다. 그리고 낮에 딥플레야를 가로지를 때면 항상 사막 한가운데에 웬 거대한 쇠공 하나가 있어서 저건 뭐하는 걸까 생각했는데, 오늘에서야 알았다. 밤이 되면 거대한 아트카 한 대가 와서 노래를 틀어놓고 그 공에다가 레이저를 쏘면 진짜 신기한 장면이 연출된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했을까 싶기도 하고 그걸 또 실천에 옮긴 것도 대단하다.



10:00PM
끊임없이 이어지던 아트카와 자전거들의 행렬.
열차가 폭발했다.

갑자기 수많은 자전거와 아트가들이 행렬을 이루어 일제히 어디론가 향해 간다. 저기서 또 뭔일이 벌어지나 보다 싶어서 나도 일단 뒤를 쫓았다.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니 멀리서 기차 두 대가 마주보고 있다. 곧 있으면 충돌하는 행사가 있을 거라고 한다. 기존에 없던 예외적인 (불금) 행사라고 하는데 Man-Burn행사의 전야제 정도로 보면 될려나. 엄청나게 많은 인파가 몰렸다. 그러고는 잠시 후에 쿵 하더니 열차 두 대가 충돌했다. 충돌음이 너무 작아서 사람들이 다들 응? 뭐야? 이게 끝이야? 벌써 끝난거야? 하면서 수근수근 거리는데 1차 폭발이 일어났다. 예상 못한 거대한 폭발소리에 다들 깜짝 놀라더니 곧이어 환호한다. 역시 그렇게 시시하게 끝날리가 없지. 다시 한번 2차 폭발음이 들려온다. 딥플레야의 진짜 밤이 시작된다.



11:00PM
기어코 망가진 신발.

무슨 자신감이었을까. 사막 한가운데에 자전거 묘기를 부리는 곳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아무렇지 않게 가길래 근거없는 자신감이 끓어올라 도전했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다. 문제는 슬리퍼의 줄이 끊겼다. 오늘도 이렇게 허무한 이유로 캠프로 돌아가야하다니. 맨발로 페달을 밟는데 발이 너무 아팠다. 사막에서의 4일동안 내 발이 진짜 고생 많았다.



12:00PM
봉으로 하던 파이어댄싱이 제일 멋있었다.
최고의 파이어댕싱 무대였다.

슬리퍼는 테이프로 응급처치를 했고 야식도 간단히 먹었겠다 그냥 자기 아쉬워서 패딩을 껴입고 근처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차 위에서 누가 파이어댄싱을 하고 있다. 가까이 갔더니 10명 가까이의 사람들이 번갈아가면서 파이어댄싱을 하는데 각자 다른 도구를 이용해서 춤을 춘다. 버닝맨 밖에서는 파이어댄싱 하는 걸 본 적도 없는데 여기서는 벌써 파이어댄서 수십명은 더 봤다. 전세계의 파이어댄서들이 다 모였나보다. 한 시간 가량 이어진 공연을 보고나니 박수를 안칠 수가 없었다. 찾아가서 잘 봤다고 인사도 하고 얘기도 나누다가 아쉽지만 너무 졸음이 쏟아져서 캠프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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