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를 마치면 돌아오겠다던 약속을 잊지는 않았는데 조금 많이 늦었죠?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전 지금도 런던이고, 홍콩을 오고 가는 비행은 예전만큼 자주는 아니지만 여전히 하고 있죠. 회사에서 승진을 했고, 교육도 받으며, 글 쓰는 일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 백일 마감을 한 번 더 돌았고, 슬럼프에도 깊숙이 빠졌다 왔습니다. 써 놓은 모든 글을 찬찬히 읽어보기도 했어요. 지나간 토요일에 남긴 수다 글도 물론 읽었죠. 사사롭게 나눈 일상 속 문장 속 담긴 사유의 순간들을 돌아보는 즐거움이 있었습니다. 마음속 울림도 느껴졌죠. 제가 쓴 글을 읽으며 이렇게 느끼는 게 조금은 웃기기도 했지만 제 글의 첫 번째 독자는 저라고 여기기에 나오려던 웃음은 접어두었습니다.
어떻게 지내고 계셨을까요? 제가 그린 토요일을 기다린 독자분들도 계실까요? 오늘도 동네 스타벅스 구석에 앉았습니다. 글 쓰며 마신 커피 덕분에 왼쪽 눈꺼풀 떨림을 선물 받긴 했지만 이렇게 앉아 나누는 독자분들과 나누는 대화는 포기할 수 없네요. 요즘은 커피 대신 잉글리쉬 브랙퍼스트 티를 더 자주 주문해요. 우유와 설탕을 꼭 넣습니다. 달고 부드러워진 차 맛은 커피와 또 다른 매력이 있지요. 커피에서 느껴지는 진한 부드러움과 다른 은근한 맛 속에 담긴 조용한 멋스러움이 재밌어요.
초고를 다 쓴 건 올 초여름 경이예요. 막 초고를 마치고 열의에 찬 마음으로 출판사에 투고를 해보기도 했죠. 묵묵부답, 거절의 답신보다 무서운 무관심이 반복되니 모르는 사이 좌절감이 자리했던 것 같아요. 처음부터 잘 되는 일은 없다는데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처음부터 잘 될 거라는 기대감을 가졌는지... 긴 실망은 무기력을 데리고 오더군요.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사는 일이라지만 무기력한 마음이 길어지니 작게 남은 용기마저 자취를 감춰버렸어요. 다시 출판사 문을 두드릴 용기가 들지 않았어요. 고작 몇 번의 무관심에 쉽사리 무너지고 마는 한 사람의 마음이라니, 가소롭습니다.
승무원 일에도 무기력은 스며들었습니다. 이 일만 아니었다면 글 쓰는 일에 좀 더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그런 마음이 먼저 들더니 승진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배워야 할 것들로 가득한 몇 달을 보내는 게 고통이었죠. (오늘의 수다는 어쩔 수 없는 고백이 되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마음이 아프면 몸도 아픈 것인지도 몰라요. 아니 아프고 싶은 마음, 일에서 멀리 떠나고 싶은 바람이 몸을 아프게 한 걸지도 모르겠네요. 6개월 간 병가를 세 차례나 내고 말았어요.
그런 마음을 추슬러보려는 노력은 했죠. 부모님을 모시고 해남 대흥사를 걸으며 바라는 게 많은 제 마음을 돌아봤습니다. 글쓰기를 향한 열정을 간직한 마음만큼은 소중했죠. 열정을 가지고 사는 일은 무엇일까? 질문을 던져보기도 했죠. 스물이 넘어가고 서른이 되고 마흔이 다가올 때 쉽게 사라지기 쉬운 마음은 “무엇을 하고 싶다” 혹은 “무엇이 되고 싶다”와 같은 바람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의무로 가득한 날들이 자연스러워질 때 즈음 무엇인가를 향한 열정, 그것은 쉬이 잊히고 마는 아쉬운 것이 되고 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몇 주 전 서울에 다녀갈 때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키보드를 하나를 구입했어요. 칠 년째 문제없이 쓰던 노트북 키보드가 하나씩 빠지기 시작했거든요. 삼 년 전에 한 번 키보드만 교체를 했는데 작 년부터 E, D, R, F를 시작으로 하나 둘 빠져 스카치테이프로 고정해 두고 사용했죠. 그렇게 백일의 이야기를 쓰고 나니 고정해 둔 테이프마저 늘어나 타자를 칠 때 걸구적 거리더라고요. 컴퓨터와 키보드를 따로 들고 다니자니 또 다른 불편함이 있고, 새 컴퓨터를 사자니 지금 쓰는 것도 멀쩡한데 괜히 돈 쓰는 것 같고 뭐 그렇습니다. 버리자니 아깝고, 계속 가지고 있자니 어딘가 불편한 그런 관계가 되어버렸어요.
초고는 몇 달째 컴퓨터 속에서 잠을 자는 중이에요. 이게 세상에 나올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그렇다고 글쓰기를 향한 열정이 사그라든 건 또 아닙니다. 차라리 열정이 식어 일과 쉼 밖에 없는 고요한 일상으로 간단히 돌아오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은 다시 받아들입니다. 열정을 품은 일을 밀고 나가는 시간에는 책임이 들게 마련이니까요. 런던과 홍콩을 오고 가는 일에도 다시 힘을 기울이기로 했습니다.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제 이름을 봤을 때 오늘은 라희와 일하니 좋다!라는 마음을 이어갈 수 있도록 말이죠.
이 글이 끝나고 나면 초고를 다시 열어두려 해요. 읽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다시 열어보는 그 마음 하나만으로도 다시 시작은 가능할 것만 같으니까요. 돌아오는 시간이 꽤나 길었습니다. 그렇게 시작하는 마음속에 더 깊어진 모습을 한 열정이 잘 자리 잡겠죠? 약속은 쉽사리 하는 게 아니라던 아빠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토요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마음이 묵직했으니까요.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모르는 시간 속 간직한 열정은 설렘이 됩니다. 미지의 시간을 작은 움직임으로 사부작사부작 내가 상상한 곳으로 데려가는 일, 쉽지 않은 일이지만 매력적이지 않나요?
돌아오는 시간이 길었어요.
기다리게 해서 미안해요.
잘 지내고 계셨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