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는구나.' 싶을 때 있으신가요? 전 불과 얼마 전에 그런 일이 있었답니다. 홍콩에서 있었던 일인데요. 제가 좋아하는 국숫집이 하나 있어요. 코즈웨이 근처 틴하우 역 앞에 있는 노포인데요. 그곳에는 차돌양지 국수가 일품이죠. 런던에서 홍콩까지 긴 비행으로 지쳤을 때 이 국수 한 그릇 후루룩 먹고 나면 그렇게 힘이 날 수가 없어요. 그날도 회사 호텔에서 나와 MTR (홍콩 지하철)을 타고 틴하우로 향했습니다. 국수 먹을 생각에 긴 길을 가면서도 발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신이 났죠. 본격적인 저녁시간이 되기 전에 도착하려 서두르기도 했고요.
드디어 역에서 나와 시스터 와 (Sister Wah, 국숫집 이름이에요)에 도착했어요. 서둘렀는데도 이미 저녁 여섯 시가 다 되었습니다. 열 명정도 줄을 서 있었죠. 나쁘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고민을 하다가 차돌양지와 도가니가 함께 들어간 어벤져급의 국수를 먹기로 결정했습니다. 거기에 생선 껍질 튀김을 애피타이저를 추가하기로 했고요. 여간 배가 고픈 게 아니었거든요. 안에서 식사하는 분들은 무엇을 먹고 있나 구경하며 제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장소가 워낙에 협소하고, 사람들로 북적이는 통에 테이블 하나를 혼자 차지하는 일은 당연히 가능하지가 않은 곳입니다. 오늘은 어떤 사람과 한 자리에서 식사를 할까 두리번거리는데 안으로 들어가라며 안내를 해주십니다.
교복 차림의 소년이 혼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열심히 국수를 먹고 있더라고요. 눈인사를 살짝 나누고 앉아 주문을 하는데 종업원 분께서 음료를 잘 못 알아들으셨어요. 눈치 빠른 소년이 제 대신 광둥어로 주문을 해주더군요. 덕분에 문제없이 음식이 도착했습니다. 쫄깃한 도가니와 고소한 차돌양지에 칠리 오일을 살짝 곁들여 먹으니 매콤 고소한 게 언제나처럼 오길 잘했다 싶었습니다. 생선 껍질 튀김 역시 바삭한 게 입맛을 돋구더군요. 바닥이 보일 때까지 국수를 얼마나 정성스럽게 먹었는지 몰라요. 그러는 동안 제 앞의 소년은 식사를 깔끔하게 다 마치고 일어났고요. 잠시 앉아 남은 음료를 다 마시며, 훌륭했던 저녁 한 끼를 만족스럽게 여기며 일어나 계산을 하려던 참이었어요.
현금이 당연히 있을 거라 생각하고 지갑을 열었는데 세상에, 딱 20달러 밖에 없는 거예요! 아차 싶었죠. 그럼 옥토퍼스 카드 (홍콩 교통카드, 편의점을 비롯 거의 모든 상점에서 사용 가능)로 계산을 하려 하니 돈이 모자라는 거예요. 얼굴이 뜨거워지며 비자 카드를 꺼내니 카드는 알리페이 밖에 안된다는 거예요. 난감해서 현금 인출기에서 돈을 뽑아다 계산하겠다며 양해를 구하는데 영어를 잘 이해하지 못하셔서 말이 계속 길어졌어요. 칠 년간 홍콩을 다니며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무척 당황했답니다. 그렇게 잠시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불쑥 현금이 제 옆구리로 들어오는 거예요. "같이 계산해 주세요."
뒤를 돌아보니 삼십 대 정도 돼 보이는 여성분이 제 눈을 보며 "제가 같이 계산할게요, 걱정 마세요."라며 미소를 짓고 계셨어요. 고맙기도 하지만 미안하기도 하고 그러면 안 될 것 같기도 해서 처음에는 거절했어요. "아니에요, 저 앞에 현금 인출기 있으니 뽑아서 계산하면 되니 그 말만 광둥어로 전해주세요." 했더니 뭘 그러냐며 굳이 계산을 해주시더라고요.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만 듣던 일이 제게 일어나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군요. 노포를 나오자마자 그 여자분께 잠시 기다려 달라고, 현금을 인출해 드리겠다고 하니 "괜찮아요. 이것은 당신이 지은 복이에요. 편하게 생각하시면 돼요."라는 말과 함께 인사를 건네며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 역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시더군요.
이름과 연락처를 물어볼걸 그랬나? 이렇게 그냥 가도 되나 싶어 멀어지는 그분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봤어요. 생각지도 않게 얻어먹게 된 국수 한 그릇, 빚 진 듯한 마음에 여간 부담스러웠던 게 아닌데, 그분이 전해 준 그 말 한마디에 부담스러움이 따뜻한 온기로 순식간에 변해버리더라고요. "당신이 지은 복이에요." 호텔로 돌아오는 긴 길, 온몸을 감싸 안은 이 말을 되뇌었습니다. 아, 이런 게 행운이구나, 이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는구나. 기대하지 않은 선량함이라니! 익명이 나부끼는 도시에서 이런 선량함과 마주치는 일이 참 근사한 일이라는 걸 몸소 느끼며 호텔로 돌아왔습니다.
이 일이 있고 난 후 현금을 채워두는 일에 게으르지 않고요. 언젠가 누군가를 위해 선량함을 꼭 나누고 싶거든요. 이런 일이 언제 일어날지는 몰라도 만약 누군가를 위해 대신 계산할 일이 생기면, "당신이 지은 복이에요."라는 말도 꼭 함께 나누려 해요. 실례를 범하며 당혹감으로 마무리될 수 있었던 그 순간을 진정한 감사함으로 채워 준 선량한 말, 그 말을 건넬 줄 아는 선량한 그녀의 뒷모습, 오늘은 그녀의 뒷모습이 문득 생각났났습니다. 잊고 싶지 않아서, 선량한 모습을 기회가 된다면 나도 누군가에게 꼭 나누고 싶어서 이렇게 길게 이야기를 남겨둬요.
그 저녁만 생각하면 괜히 머쓱한 미소가 흘러넘쳐요.
런던은 토요일 밤 9시 30분이 지나가요.
이렇게 하루도 끝나갑니다.
슬슬 자러 가려고요.
그럼, 안녕.
또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