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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라희 Jul 21. 2024

한 여름의 소나기

공감 에세이

"천둥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예상됩니다." 요즘 퍼붓는 비에 불편함이 많으시죠? 전 지난주 내내 홍콩에 있었어요. 승무원 안전 교육 때문에 시험도 보고, 소리치며 비상 대피 훈련도 하고, 응급 처치를 위한 심폐소생술 훈련도 했답니다. 그러는 동안 홍콩에도 하늘에 구멍이 난 듯 그야말로 퍼붓는 비에 정신이 없었네요. 갑자기 해가 반짝 뜨더니 무지개도 살짝 보여주고 그러다 다시 비가 퍼붓고 여간 변덕스러운 날씨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런던으로 돌아오는 비행은 갑작스러운 뇌우로 이륙이 한 시간 정도 지연되기도 했고요. 천둥과 번개가 내리치며 퍼붓는 비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하죠. 


어릴 적 이런 밤이면 베개를 들고 여지없이 엄마 아빠가 주무시는 침대 틈을 파고 들었죠. 그 틈에서 그제야 안심이 되어 잠들곤 했습니다. 비가 거세게 내리는 날 학교라도 가야 하면 우비에 장화를 신고 튼튼한 우산에 기대 등하교를 했거든요. 그런 날은 어린 맘에도 집에서 비 내리는 거 구경하며 쉬면 딱 좋겠다 싶었는데 출석에 진심이신 엄마는 웬만한 일로는 결석을 허락하지 않으셨죠.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면 우산이 뒤집힐까 싶어 조마조마하며 등하교하던 날도 기억나요. 다시 홍콩으로 돌아와서 까만 밤 커다란 호텔 창을 내리치는 빗소리와 우르르 쾅쾅 천둥소리와 찌르르 내리쬐는 번개를 바라보면 왜인지 모르는 안도감 같은 게 들어요, 이제는. 무섭다기보다 무언가 보호받고 있는 편안함과 평온함이 느껴지죠. 


그건 가만히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머물러도 괜찮다는 안심이라고 하면 맞을까요? 가만히 있는 시간이 괜한 불안으로 느껴지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저도 자주 그런 느낌으로 살아가거든요. 책이라도 읽고, 뭐라도 생산적인 걸 해야 할 것 같은 조용하고 고요한 시간들 말이에요. 그럴 때 우르르 쾅쾅쾅 뇌우가 내리친다면 그걸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일을 멈추는 게 괜찮다는 충분한 이유를 얻은 듯해요. 마치 안전한 무언가에 휩싸여 가만히 있는 그 시간을 보호받고 있는 듯하죠. 이런 기분이 느껴진 후로는 뇌우가 내리는 날, 실내에 머무른다면 행복해지곤 합니다. 우르르 쾅쾅, 하나, 둘, 셋, 넷, 하나, 둘, 셋, 넷. 숫자를 세며 천둥 구름이 가깝게 오고 있는지, 멀리 가고 있는지 그 움직임을 알아채 보려 합니다. 움직임은 멈춘 채. 


멈춤이 힘든 세상, 끊임없이 움직여야 살아남을 것 같은 불안감, 하루라도 쉬면 도태될 것 같은 경쟁심. 이런 기분에 쌓인 일상이 이제는 당연해진 듯합니다. 런던에 살면서 이런 불안감이 잦아든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끊임없이 나아가려는 지금의 삶을 감내하며 살아 낼 수 밖에 없죠. 여름 소나기가 주는 안락함이 그래서 전 좋아요. 뜨거운 햇살에 몸을 지지며 일상을 다 태워버리는 뜨거운 열정도 좋지만 한 걸음 멈춤의 여백이 있는 시끄럽고 요란한 고요함이 존재하는 한 여름을 사랑합니다. 런던에도 요즘은 간혹 이런 소나기가 내리곤 해요. 하지만 한국이나 홍콩만큼 자주는 아니죠. 어제 런던은 33도가 넘었어요. 이례적인 날씨였죠. 이렇게며 칠 뜨겁다가 소나기 한 번 진탕 내렸으면 좋겠다 했는데 오늘은 다시 기온이 내려가고 흐립니다. 계시는 곳에 비가 온다면, 아주 많이 온다면, 잠시만 비 구경하며 안락함을 느껴보실 수 있으셨으면 좋겠네요. 여름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전 그런 날들을 그리워합니다. 



오늘은 여기까지에요.

잠시 쉬는 일, 

무어라도 핑계가 있어야 맘 편하게 할 수 있는,

그렇게 되어버린 일상,

그래도 무어라도 찾아 틈틈이 쉽니다.


전 다음 주 토요일에 다시 올게요.

그럼 안녕,

아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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