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는 90이 다 되어가는 연세에도 늘씬한 몸매와 잘생긴 얼굴에 항상 정장 스타일로 흡사 퇴직한 대학교수같은 외모를 유지하셨다. 게다가 적당한 유머 감각까지 지닌 아버지를 사람들은 대부분 좋아했다. 아버지는 먹는걸 즐겨하셨으나 입맛은 까다로와서, 당신의 입맛에 맞는 음식만 그것도 소량만 드셨다. 그래서 아버지가 애정하는 식당은 언제나 맛집이었다.
집 근처의 많은 식당 중에서 아버지의 최애 단골 식당은 ㅇㅇ보리밥집이었다. 이 곳은 집에서 차로 5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고 가족들과도 함께 외식을 즐기곤 하는 집이었는데, 보리밥을 시키면 다양한 나물과 청국장, 비지찌개에 시원한 열무김치와 백김치까지 정갈하게 한 상이 나왔다. 좀 더 스페셜하게 먹으려면 쭈꾸미볶음이나 코다리구이를 추가할수도 있었고, 해물파전은 내가 먹어본 것들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맛있었다. 또한 여름엔 콩국수, 겨울엔 털레기수제비 등 계절 메뉴까지. 맛있는 메뉴가 착한 가격으로 제공되어 일년 열두달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이 식당의 가장 큰 장점은 친절함이었다. 꽤 많은 서빙 인력과 주방 인력이 체계적으로 움직여 적절한 서비스를 받을 수 있었으며, 밥이며 나물 등 추가 음식 인심도 후했다.
그 중에서도 아버지가 이 식당을 좋아한 중요한 이유는 바로 동동주였다. 이 식당에서는 양조장에서 받아오는 동동주를 반 항아리도 팔았고 1.000원에 한잔도 팔았다.혼자 가서 보리밥 1인분만 시켜놓고 동동주 한 두잔을 먹고 올 수 있으니 아버지에겐 맞춤 식당이었던 셈이다. 친구들과 같이 가기도 하였지만 약속이 없어 혼자 드셔야 하는 날에도, ㅇㅇ보리밥집은 거의 매일 아버지의 점심을 책임지는 곳이 되었다. 주말에 맛있는거 먹으러가자고 꼬셔도 아버지는 보리밥집을 고집하셨다. 혼자가면 보리밥 한개 밖에 시킬수가 없는데 둘셋이 가면 해물파전이나 쭈꾸미볶음이라도 더 시킬 수 있고, 동동주도 항아리로 시킬수 있으니 평일날 혼자 와서 아쉬웠던 마음을 보상받을수 있으신것 같았다.
00보리밥집 해물파전, 백김치, 열무김치 그리고 동동주
일단 보리밥집에 도착하면 동동주 두 잔을 먼저 시키고 식사 주문을 한다. 조금만 기다리면 살얼음이 둥둥 떠있는 동동주와 백김치가 나온다. (원래 그런것은 아닌데, 아버지가 밥이 나오기전 동동주를 워낙 맛있게 드시니까 식당에서 안주하시라고 김치를 준 것이다) 이 보리밥집의 백김치는 항상 적당히 익어 새콤하고 시원했다. 백김치와 동동주. 이 소박한 조화의 완벽함이라니... 생각만해도 침이 고인다.
어느날, 아버지가 그 보리밥집에서 '동동주 할아버지'라고 불린다는 것을 알았다. 거의 매일 점심에 어김없이 출근하여 동동주 한잔을 맛있게 드시는 아버지에게 보리밥집 종업원들이 붙혀준 애칭이었다.
식당 사장의 아버지인 할아버지가 주차관리를 하셨는데, 아버지가 반갑게 인사를 하면 큰소리로 말하시곤 했다. "매일 좀 오지마!"퉁명스러운 그 말투에 처음엔 다소 당황했지만, 두 분만의 애정어린 인사법이라는 것을 알게되었다. 거의 매일같이 점심시간에 나타나는 아버지를 모르는 종업원들은 없었다. 특히 40대의 여사장은 티나지 않게 아버지를 챙겨드렸다. 우리는 사장님께 자식들의 전화번호를 드리고 혹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 했고, 돈을 안 가지고 가시면 외상을 부탁했다. 귀찮은 일이었을텐데 사장은 흔쾌히 그렇게 해주었다.
어느날 사장님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요즘 아버지가 음식을 너무 많이 시킨다는 것이다. 보리밥에 파전까지,...그러나 양이 적으시니 거의 그대로 남아서, 싸드린다고 해도 싫다고 하신다는 이야기였다. "어르신 혼자 오실때 보리밥과 해물파전 한 조각 동동주 한잔.. 이렇게 구성을 해서 9천원~만원에 드리면 어떨까요?" 이렇게 하여 메뉴에도 없는 아버지만의 특별메뉴가 탄생했다. 이름하여 '동동주 할아버지 정식'. 구성은 이러했다. 보리밥을 시키면 해물파전 1조각, 동동주 1잔, 이렇게 하여 9,000원. 동동주 2잔 시키면 10,000원. 여름에 콩국수를 주문하면 아주머니들이 보리밥까지 한그릇 썩썩 비벼 드리곤 했다. 때로는 현금이 없는 아버지에게 택시비도 드리고, 동동주에 불콰해진 아버지를 걱정하여 택시도 잡아주셨다. 그러니 아버지가 언제나 가고싶은 식당이 되었던 것이다.
십여년전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그렇게 씩씩하게 살아오셨다. 혼자 지내야 하는 하루는 시간이 너무도 길어 점심때 동동주 한 잔으로 위로받으셨던 것이다. 지난 여름 병석에 누우신 아버지는 가끔은 힘을 내어 내 손을 잡고 보리밥집에 가서 동동주 한 잔을 드시러 가곤 했다. 그러나 점점 죽 한 숫가락 삼키는 것도 힘들어지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운 엄마 곁으로 떠나셨다. 타임머신이 있어 하루를 돌릴 수 있다면, 아버지 모시고 보리밥집 가고싶다. 시원하게 동동주 한 잔 들이키고 싶다. "동동주 할아버지 정식" 그 메뉴는 영원히 아버지만을 위한 것이니 다시한번 그 메뉴를 주문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