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게모니

2020.05.15

by 스미레

상훈은 계속 일상을 살았다. 그것밖에 할 수 없고 그게 맞는 것 같아서였다.

한편 일상은 용기 내 다가가는 그에게 꽤나 냉정했다. 몸속에 오랑우탄을 매달고 연신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과 낯설음을 마주하려는 노력 같은 것은 우선순위에서 저 멀리 밀려났다. 정신과 육체에 줄 먹이를 구하는 것과 휴식을 제공할 안전한 공간을 지속적으로 제공해줄 책임이 가장 우선시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 책임은 여행을 하고 쓴 글을 파는 것으로 근근이 다 할 수 있었다. 여행은 상훈이라는 하나의 생명체가 보유한 개성을 생존에 활용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빨래, 설거지, 청소, 업무, 요리, 식사, 배변, 샤워 같은 과제들은 이질감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끊임없이 생성되었다. 인간으로서 그것들이 멈추기를 바라는 것은 해안가 모래사장에 써놓은 글씨가 영원히 남아있기를 바라는 것과 같다. 상훈은 이것들 앞에설 때 종종 어쩌면 자신이 갑자기 겪게 된 이질감이 꽤나 하찮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기본적인 생활이 안정궤도에 오르고 조금의 잉여시간과 잉여에너지를 취할 수 있는 현대의 생활인만이 걸리는 성인병 같은 것이 아닐까 하고. 일종의 ‘과다’에서 온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인 것이다.

그러면 과연 자신이 심각한 경제적 도태를 겪게 되어도 과연 이런 배부른 고민을 해결하려 해외까지 가는 노력을 할 수 있었을까? 상훈은 자신이 쉽게 아니다라고 답할 줄 알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대답이 선뜻 나오지는 않았다.

이 말은 즉 어떤 핑계를 대는 것으로는 이질감으로부터 빠져나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억울해도 혹은 귀찮아도 말이다. 그렇다면 이질감은 생활에 비해 하찮은 것이 아니라 생활 자체일지도 모른다. 청소, 설거지, 식사 같은 것과 동일 선상에 있는 것이다. 잘못해서 찾아오는 체벌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가난한 것도, 바쁜 것도, 돈이 많은 것도, 여유로운 것도 이질감의 존재를 지울 수는 없다.

파도는 계속 몰려오고 금방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모래사장의 글씨는 계속 쓰여야 하는 것이다. 조금은 힘 빠지는 결론이었다. 상훈의 머릿속에는 삶이란 고통 어린 증상이 순환되는 것이라고 밖에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잊고 사는 것이 만약 고통을 없애준다면 고통을 겪어내면서 얻게 되는 선순환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궁금했다. 연주는 꼭 숨는 것이 상훈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처럼 말했었다.


“요즘 자기를 보면 꼭 숨을 곳을 찾는 것처럼 보여.”


그림자는 ‘우리’가 총체적이고 복합적인 상황들의 집합체라고 했다.


‘날 보낸 사람을 찾아.’


찾는다는 것 역시 뭔가를 마주하게 되는 일이었다. 상훈은 일단 자신이 걷게 될 길에 들르게 될 마을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분리와 대화


그리고 이어서 낯설음의 말속에서 찾았던 주요 키워드들을 떠올린다.


외면과 오만


상훈은 자신이 떠밀려 가고 있는 방향에 대한 불확실성이 어디서 나오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너무나도 단순해서 의심스러을 정도였다. 불확실성의 원천은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길이라는 사실로부터 나왔다. 쉽게 말해 지금까지는 외면과 오만이 강한 관성을 띄고 있던 것이다. 분리시켜 직면하고 대화해본 적은 없었다는 말이다.

상훈이 느꼈던 고통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가드레일 같은 역할을 하고 있던 것일지도 모른다. 가드레일에 부딪히기 때문에 아픈 것이다. 동시에 부딪히는 것으로 끝나고 있기 때문에 추락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상훈은 이질감이 사라지는 현상을 해방이라고 정의하기로 했다. 찾아오는 이질감과 거기서 파생되는 고통에 대해 오랑우탄이라고 이름 붙였듯 불확실한 것에 대해 스스로 개념을 정의함으로써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대할 태세를 갖추는 것이다. 해방 말고는 그때의 느낌을 설명할 마땅한 단어도 없었다.

그러나 해방되려면 무엇인가로부터 구속되어 있어야 한다. 혹은 억압받고 있어야 한다. 다행히도 그 점에 대해서는 확실했다. 그림자를 만나기 직전부터 찾아와 6개월이 지난 현재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이질감이라는 감각에게 상훈은 구속당하고 억압받고 있다. 어쩌면 인간이 가진 육감에 하나를 더 추가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확실한 점은 사전적 의미의 헤게모니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자신을 제외한 외적인 상대로 부터 오는 구속이나 억압이 아니다. 6개월 전 상훈이 발렌시아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며 추측했듯 외적인 요소에 의한 피폭과는 다르다. 기본적으로 그의 내면이 보유하고 있는 이질감은 스스로의 주도권을 빼앗겼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아무리 밖으로 시야를 돌리고 주변을 걸어본들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아쉽게도 상훈은 상당히 많이 자각했으나 무지한 상태로 시간을 그저 잉여물로 밖에 흘려보낼 수 없었다. 그래도 이제 그는 오랑우탄이 6개월 전의 일만을 발단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만은 역력히 체감하고 있다. 오랑우탄은 상훈의 존재가 생겼을 때부터 같이 있었던 것이다.


자신의 그림자와 이야기했다는 허무맹랑해 보이는 현상보다 상훈을 괴롭히고 의문 짓게 하는 것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낯설음이었다. 그는 추측만을 근거로 행동을 할 수밖에 없었다. 계속해서 낯설음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는 이유는 그 멈추지 않는 지옥의 파열음을 뚫고 목소리를 내었을 때만큼은 자신 안에 있는 알 수 없는 시꺼먼 고래 같은 것이 잠시 숨을 쉬러 수면 위로 올라오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수면 위에서 쉬고 있을 때 상훈은 가장 주도면밀해질 수 있었다. 게다가 동시에 상대는 무방비 상태인 것이다. 고래인지 정어리 떼인 지 상어인지 알 수 없는 그것은 그렇게 마음의 수면 위에 떠있으면서 상훈에게 시각적인 불확실성을 조금이라도 줄여주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을 주었다. 패권을 잡혀버린 그 존재로부터의 해방에 대한 희망이 생길 것 같았다. 꾸준히, 규칙적으로,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면서. 의사가 비만환자에게 처방을 내리듯이. 누구나 알고 있지만 모두가 지키며 살지는 않는 그런 처방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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