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어 샌드위치

2020.06.13

by 스미레

여보세요?”


“뭐하고 계셨어요?”


“점심 먹는 중이야.”


“혼자예요?”


“왜 이렇게 캐묻듯이 질문해? 꼭 우리 부인 같네.”


“부인은 무슨. 몇 년째 연락도 잘 안 하면서.”


“하여간,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다.”


수화기 너머로 스테인리스 식기를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테이블은 유리로 돼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접시 위에 내려놓았거나.

담당자는 자신에게 날아오는 무례한 대화예절은 차치하고 상훈이 말하는 것이 전부 사실이라는 점을 더 거슬려하는 듯했다.


“뭘 드시길래 주변이 그렇게 시끄러워요?”


“샌드위치. 이름은 몰라. 연어랑 리코타 치즈, 토마토가 들어가고 소스는 발사믹이야. 요즘은 식당들은 메뉴판 보기가 무서워. ‘네가 이 메뉴판을 이해할 수 있어? 그럼 어디 주문해봐.’ 하는 태도라니까. 어려움을 감수하고 잘 시키고 나면 뿌듯하기까지 하다고. 왜 고작 식사 주문하는데 이렇게 고생을 시켜?”


담당자는 상훈에게 짜증을 쏟아냈다. 평소 쌓인 게 많은 듯했다.


“그런 식당들 많이 생기고 있는 덕에 좋아하시는 샌드위치 원 없이 먹잖아요. 몇 달 전까지 우리나라 샌드위치는 너무 획일적이고 어쩌고 하시던 분이. 근데 무슨 샌드위치를 칼로 잘라먹어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매연 마시면서 궁상떨지 말고 안에 좀 들어가서 먹어요. 여기 서울이에요.”


“요즘 전기차 많아서 괜찮아. 밖에 좀 다녀라. 너 전자파가 어쩌고 하면 내가 너 전화기부터 부숴버린다.”


상훈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놀리는 것이 재밌는지 키득거리며 웃었다. 기껏 받아치는 말이 전기차라니.


“저번에 저한테 팬이 있다고 했죠?”


“그랬지. 공식적으로 집계해 본건 아니지만 우리 쪽으로 관련 메일이 꽤나 많이 와. 그건 이곳저곳에서 네 글이나 너에 대한 잠재수요가 꽤 있다는 거지. 뭐 최근 여행이 유행처럼 퍼지고 있는 탓도 있지만. 시장이 커지면 나눠먹을게 많아지니 어차피 나쁠 건 없어. 그래도 독자들은 종종 손편지도 보낸다니까. 그러게 sns 같은 것 좀 하면 좀 좋아? 직접 나서서 대응하라고. 독자한테 그렇게 관심 없는 것도 일종의 기만이야 기만.”


“또 비약하시네. 작가는 글로 소통하면 되죠. 그리고 출판사가 왜 있어요?. 인쇄만 해주고 손 놓을 거예요? 인쇄소랑 다를게 뭐야.”


“말은 잘하네. 우리가 무슨 연예인 매니저냐? 그리고 말이야 냉정히 말해줄까? 스테디셀러를 몇 권씩 쌓아두고 있는 작가도 아니고 주에 한번 나오는 글을 쓰는 작가한테 이 정도 인기는 드물어. 더군다나 종이책 시장은 하향세인데 말이야. 찾아왔다 사라지는 게 인기인 거 몰라? 너만 잘한다고 찾아오는 게 아니라고 때가 있어 때가. 혼자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나 하고 있다고 너. 밥줄 걱정도 안 되냐?”


“알아요. 절 믿고 찾는 쪽보다는 가능성을 보고 찔러보는 곳들이 더 많다는 거.”


“알면 왜 그렇게 노출을 꺼려해? 이때다 하고 나서도 시원찮을 판에. 맨날 내 자리에 앉아 있다 보면 주변에서 너에 대한 시기 질투가 심심치 않게 들려와. 업계에서 그거 칭찬인 거 몰라?”


“아 그래서 한번 해보려고 전화한 거예요. 노출.”


“뭐야, 불안하게 왜 먼저 제안 같은걸 하고 그래? 문득문득 떠오르는 바보 같은 짓은 여행 속에서나 해줘. 단지 그걸 주에 한 번씩 글로 잘 옮겨주기만 하면 돼.”


“역시 괜히 업계에서 유명한 게 아니라니까.”


“너 설마 책 쓰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지?”


상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돼. 몇 번 이야기했잖아?”


“알아요. 주간 연재로 유명해진 작가들이 낸 책들 전부 실패했다면서요. 아무리 분량이 적은 책이라 한들 주 1회 간격의 글과는 호흡 자체가 다르다고.”


“단순히 다른 걸로 끝나지 않아. 너 정도면 처음엔 이슈를 좀 타겠지. 그렇지만 그 호흡을 꾸준히 유지시켜야 한단 말이야. 아예 네 라이프스타일 자체가 바뀌게 되는 일이야. 이건 어떤 게 더 고차원적이고 예술적인 글이냐에 대한 문제가 아니야. 그래, 그냥 직업이 다른 거야.”


“왜요. 회사원들도 이직 많이 하잖아요.”


“보통 같은 업종 내에서 하거든? 이건 겉으론 같은 업종인 것처럼 보여도 속을 들춰보면 아예 다르다고.”


“더 큰일이네. 누구도 안 읽어줄 것 같은 책인데.”


“뭐에 대해 쓰고 싶은지 들어나보자.”


“제 여행이요.”


“이런.”


“거기다 소설이에요.”


“최악이네.”


수화기 너머로 짙은 한숨소리가 들렸다.


“그런 건 한 5년쯤 지나고 좀 더 유명해진 다음에, 글이든 여행이든 네 경력들이 더 단단히 쌓이고 굳어지면 시작하지 않을래? 유럽 아무 나라나 골라. 내 재량으로 시골 한구석 통나무집에 박혀서 한 두 달 정도 있다 오게 해 줄게. 그 정도 권한은 있어. 쉬면서 일기 쓰듯. 그렇게 쓰면 좋지 않겠어?”


담당자는 당황스러움을 한껏 숨기고 상훈을 타이르듯 장황하게 떠들어댔다.


“베른트 하인리히라는 사람 알아요?”


“그건 또 누구야.”


“통나무집이라니. 글은 뭘로 쓰라고요. 전기는 들어와요?”


“아무튼, 네 여행을 소설화한다는 기행에 대해서는 자세히 듣고 싶지도 않아. 내 눈 아래에 있는 샌드위치나 얼른 해치우고 싶어. 지금 흐름 좋잖아. 아직 쌓여있는 여행도 많고. 그거 다 풀어내야지.”


“연재는 그만두지 않을 거예요. 조정도 안 해요. 주 1회 유지할 거예요.”


“잡지에 연재도 하면서 소설 원고도 쓰겠다고? 거기다 여행도 다니면서?”


“네.”


“말하는 걸 보면 단편 같은 거 하나 툭 던져놓고 끝낼 거 같지는 않은데 어쩌려고 그래?”


“담당자님이 저의 막스 브로트가 되어줄 수도 있죠.”


“멋대로 인용하면서 말 돌리지 마. 게다가 너는 프란츠 카프카를 하시겠다? 이봐, 나는 한낱 회사원일 뿐이야. 출판사 사장이 아니라고. 오직 쓰여지는 것만이 목적인 데다가 불태워야 할지도 모르는 글을 기다려줄 재량까지는 없어. 그리고 나보다 먼저 죽을 것도 아니면서 무슨 그런 비유를 들어?.”


“연재에는 지장 없게 한다니까요. 그리고 왜 담당자님이 한낱 회사원이에요? 엄연히 책도 낸 작가님이신데. 그 책도 회사 다니면서 출간하신 거면서.”


“그 얘기까진 꺼내지 마.”


“저번에 한 대화가 머릿속에 자꾸 맴돌아서 그래요. 좋아하는 작가의 그런 글은 다시 읽고 싶지 않을 것 같다고 했잖아요. 그리고 싫어지는 게 아니라 걱정될 것 같다고. 그거 진심이었잖아요. 소설을 쓰지 않으면 계속해서 독자들에게 걱정을 끼칠 것만 같아요. 그러다가 곧 잊혀지겠죠. 그 독자들에는 담당자님도 포함되어 있고요.”


상훈이 조금은 진지한 말투로 돌아와 이야기했다.


“너, 무슨 일 있어?”


“뭔가 매듭지을게 생겼어요. 자세히는 설명 못해요. 나는 글로 말하는 게 더 익숙한 사람이라. 입으로 말하면 항상 오해만 산단 말이에요. 날 사랑해주는 연인한테조차 제대로 설명 못하고 있어요. 그렇지만 소설의 출간 가능 여부와는 상관없이 그게 완성되면 알게 될 거예요. 아마 제 글이 지금보다 발전할 지도요. 그럼 회사원인 담당자님한테도 좋잖아요? 어떤 방식으로든 제 이미지를 소유하고 싶어지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거.”


“출간 가능 여부랑 상관없이 쓰겠다니. 그게 담당자한테 할 소리냐. 연재에도 문제없다고 했지? 그럼 나랑 상관없는 일이잖아. 혼자 조용히 쓰고 만족한 후에 어디 처박아두면 되지 왜 내 식사시간까지 방해하는 거야 대체.”


담당자는 그렇게 퉁명스럽게 쏘아붙이고는 전화를 끊어버렸다. 상훈은 거실 소파에 앉은 채 끊어진 전화를 옆에 툭 던져놓고 건너편 벽으로 시선을 옮겼다.

담당자의 말이 맞다. 그런 글이라면 혼자 만족할 때까지 맘껏 쓰고 어딘가 박아두면 된다. 글로써 자신이 충분히 충만해지기만 하면 된다. 아깝지만 다 써놓고 과감히 삭제시키는 일도 작가로서 멋진 퍼포먼스라고 쳐줄 수 있다. 대부분 은 그냥 기행이라고 하겠지만.

누구도 모르고 지나갈 것이고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피해도 이득도 주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가능하다면 출간을 하고 싶었다. 잡지 속의 스타도 좋지만 자신이 가진 언어의 독립적인 묶음을 세상에 존재하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낮은 확률 속에서나마 누군가가 그것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받는 것을 바라고 있었다.

상훈은 결국에는 그 글을 앞에 두고 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딘가 박아두고 삭제시킨다면 무언가를 나눌 수 있는 기회조차 사라지니까. 옆에 던져두었던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어 담당자에게 문자를 한통 보냈다.


‘조용히 쓰다가 다 완성되면, 스스로 충분히 만족한 후에 담당자님 서랍에 처박아 둘게요.’


처음부터 너무 제멋대로 굴어버린 나머지 돌아올 답장의 내용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 들었으나 다행히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멋대로 구는 건 나한테 뿐만은 아니었구나?. 좀 위안이 되네. 적어도 오랜 연애 끝 찾아오는 권태감 같은 건 아니었다는 거니까. 오케이. 나도 자기를 좀 더 이해하게 됐어.”


따뜻한 홍차를 마시며 줄곧 식탁에 앉아 상훈을 지켜보고 있던 연주는 통화가 끝난 것을 보고 비꼬듯 말했다. 두 번째 발렌시아 여행이 끝나고 돌아온 공항에서 연주에게 상처 준 후에 화해하기까지는 -그녀가 화해하기로 해주기까지는- 노력이 꽤나 필요했다.

얼마 전 상훈이 삼사일에 한번 꼴로 보낸 음성메시지에 대한 답장이 왔었다.


‘자기 삶에서 무슨 격변이 일어나고 있나 본데 단지 내가 연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해결이나 위로를 해주겠답시고 멋대로 그 속에 들어가 헤집어 놓을 수는 없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걸 빌미로 주변 사람에게 모질게 굴거나, 배은망덕한 자세로 나오는 건 나로선 그 어떤 관점으로 이해하려 해도 용서할 수가 없어. 지금까지 순수하게 혼자만의 힘으로 목숨이 붙어있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 그런 사람은 아니, 그럴 수 있는 생명은 이 세상에 없으니까.’


마지막 말이 좀 섬뜩하긴 했으나 이제까지 상훈이 범했던 무례함과 무심함에 비하면 얼마나 사려 깊고 자비롭게 돌려준 대답인가. 그는 재빨리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다만 연주는 격변에 대한 자신의 인내에 조건을 몇 가지 내걸었다.

첫 번째, 지금 겪고 있는 것에 대해 당장은 말하지 않아도 되나 언젠가는 꼭 상세히 이해시켜줄 것. 그리고 그런 상황이 꼭 올 수 있도록 무던히 노력해줄 것.

두 번째, 뭔가 나아지고 있던 정체되고 있던 종종 상황의 진척도에 대해서만이라도 공유해줄 것.

세 번째, 그 격변에 대해 말로써 설명하지 않아도 되나 그로 인해 발생하는 후차적인 감정들에 대해서만은 입 밖으로 꺼내어 솔직해질 것.

‘이게 앞으로 우리 관계를 건강히 이어나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이고 유일한 것들이야.’

상훈은 당연히 모든 것을 수락했고 수첩에 받아 적어 놓기까지 했다.


“사랑이 무르익으면 익을수록 미안함의 열매가 커진다더니 맞는 말 같아.”


“나는 여기서 더 사랑하다가는 화병이 나고 말 거야. 개똥철학 같은 거 인용하면서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책에 대해서나 좀 더 자세히 말해줘.”


연주는 못 말리겠다는 듯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대며 답답해했다.


“지금 내 안에는 날 꽉 쥐고 잡아 흔드는 존재가 있어. 날 무기력하게 만들고 결단하지 못하게 해. 아마도 그걸 처음 자각한 건 발렌시아에서였을 거야. 그러나 그건 단지 그때 자각했을 뿐이었던 거지. 계속 내 안에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그때부터 더 사람이 방어적이 되었던 거야? 그런 건 누구나 있어. 사람이라면. 슬럼프라고 하는 거야 그런 걸. 원래 인생은 좋아졌다 나빠졌다해.”


“힘들겠지만 조금만 인내심을 가지고 들어줘. 그 말도 맞아. 그렇지만 모두에게 전부 다른 형태로 나타나는 게 분명해. 그러니까 누구에게나 존재하는 현상임에도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해결책 같은 건 없는 거지. 자주 심장이 답답하고 호흡이 가빠져. 흡사 장기가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마치 새끼 오랑우탄이 내 장기를 잡고 매달려 흔들고 있는 것처럼.”


“좀 있으면 지쳐서 놔주지 않을까? 아니면 무화과 같은 거라도 주면서 유인해보든지.”


“흥미롭네. 왠지 너도 그런 식으로 말할 것 같았어. 과일을 주는 건 좋은 방법이지만 결국 어딘가로 유인해가야 돼. 어디로 가야 할까?”


“병원?”


“날 병원에 보내고 싶어?”


“응”


“오랑우탄이 어미와 새끼의 유대가 엄청 강한 거 알아? 이 길 잃고 가엾은 새끼 오랑우탄은 어미에게 가야 돼. 아니, 날 어미로 느낄 수 있게끔 친해져야 하는지도 모르지. ”


“알겠어. 잠자코 들을게. 근데 일단 손을 놓게 해야 할거 아니야. 유인원들 악력 엄청 강한 거 몰라? 그리고 손을 놓게 해야 자기도 돌봐줄 여유도 생길 거고”


“사실 쉬워. 이렇게 매달려 있는 게 날 아프게 하고 있는 거라는 사실만 알려주면 돼.


“그걸 어떻게 할 작정인데?”


“책에 대해 말해보라며. 이 새끼 오랑우탄과 친해질 방법을 찾은 것 같아.”


상훈은 낯설음의 존재를 인식했을 때부터, 그것의 호소 속에 들어있던 단어들의 의미를 곱씹는 과정에서 직감했다. 그림자가 말한 총체적인 나라는 존재의 비중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여행에 대해 낱낱이 써야 한다고.

낯설음의 분리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 직면을 지옥의 케르베로스가 필사적으로 막았다는 사실이 역설적으로 상훈이 낯설음의 말에 귀 기울여 뭔가를 결단해야 함을 의미했다. 이제는 그림자가 말한 회의가 개최되는 것만을 기다릴 입장이 아니었다. 애초에 상훈은 자신에 대한 최고 결정권자가 아닌가. 그림자는 우리 개념적인 존재들이 모두 어차피 하나라는 것을 유념하고 있으라고 당부했었다.


“왜 하필 글로 쓰는 거야?”


“내가 제일 나에게 솔직해질 수 있는 순간이 글을 쓰는 순간이야. 이건 사람마다 다르겠지. 인간은 도구를 사용할 줄 아니까.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걸 빌려서 원하는 걸 하면 되는 거야. 대화에서 솔직함은 서로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고 신뢰를 쌓는 기반이지. 친밀해지는 건 덤이고. 여기서 상대는 나 자신인 거야.”


“나 자신에게 대해 아는 게 무슨 가치가 있어? 그리고 어떤 자신을 말하는 거야? 나 이외에 앞에 사람이 한 명만 더 있어도 그 ‘나 자신’이라는 건 최소 두 가지 성질로 존재하게 되는 거잖아. 기존의 나와 상대의 눈을 한번 거친 나로서 말이야. 살면서 얼마나 많은 관계를 맺고 사는데 그런 걸 언제 다 파악하고 친해져?.”


“네가 아까 삶은 순환한다고 했지?. 좋아졌다가 나빠졌다가를 반복하면서. 나도 그것에 대해 많이 생각을 해봤어. 순환 속에서 찾아오는 불확실성과 어려움, 두려움, 불편함 같은 걸 외면하면 편하지 않을까. 오랑우탄 손아귀의 힘이 빠질 때까지 그냥 내팽개쳐놔도 되지 않을까. 원래 삶은 우리를 가만 놔두지 않으니까. 개인의 내면 문제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자본주의는 잘만 돌아가잖아. 왜 구태여 약간의 불편함을 수반하며 끄집어내어 문제를 직면해야 할까?. 왜 거기에 시간과 품을 들여야 할까? 반대로 왜 그것을 끄집어내지 않으면 고통이 찾아오는 것일까?”


“문제를 알아야 문제를 푼다. 외면하면 풀리지 않는 문제는 사라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쌓인다. 뭐 그런 건가? 그래서 여러 자신 중 어느 자신과 친해져야 하는데?.”


“넌 역시 통찰력이 있어. 그렇지만 어떤 자신이 진짜인지는 중요하지 않아. 모두가 다 진짜니까. 가짜 자신은 없지. 잠깐 생겼다가 사라지는 모습이라고 해서 가짜인 것이 아니야. 핵심은 뭔가가 쌓이기 시작하는 순간이야. 쌓인다는 건 해소되지 못하고 있다는 거니까. 내가 지금까지 알아낸 것은 한번 생겨난 문제는 그것을 바라보지 않으면 굳어져버려서 쌓여. 오랑우탄은 그런 걸 좋아하지 않아. 쌓이면 쌓일수록 사이가 나빠지고 더 조여오지. 오랑우탄도 언젠간 떨어지겠지만 하룻밤만 자고 나면 근육이 회복돼서 언제 다시 내 장기를 나뭇가지나 로프 삼아 신나게 옮겨 다닐지 몰라.”


“메커니즘이 메두사와 정확히 반대네. 그쪽은 마주하면 굳어지잖아.”


“그러니까 저주인 거지. 평생 자신의 모습을 정확히 바라볼 수 없잖아. 남들도 그 신세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하고.”


“자기가 발렌시아를 다녀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어. 처음 다녀온 후로는 두 달이 지났고.”


“그러네.”


“그 책은, 아니 그 글은 세상에 나올 수도 아닐 수도 있는 거네.”


“그렇지. 세상이 알아봐 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나’라는 세계 속에서는 꼭 일어나야 하는 일인 거지.”


“지금까지 나에게 너무 말해준 게 없어서 이 정도 대화로도 너무 속이 시원할 지경이야. 맞아, 미안해하라고 하는 말이야. 그렇다고 여태 말한 게 다 이해되는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하면 자기 건강이 걱정돼.”


“이건 마치 통신 주파수를 맞추는 일 같은 거야.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거슬려도 레버를 돌릴 수 있으면 돌려야 하는 거야. 미세하고 섬세하게 말이야. 들어야 하는 방송이 잡히고 소리가 선명해질 때까지.”


상훈은 그 뒤로 몇 개월에 걸쳐서 정말 여행과 연재, 소설을 모두 균형감 있게 해내기 시작했다. 옆에서 보는 연주가 다소 무서워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체력의 한계를 달리며 막대한 스트레스를 짊어지기는 했지만 그 ‘쓰여야 하는 글’을 한 자 한 자 써가면서 고통 역시 종이에 함께 덜어지는 듯했다. 그러나 여전히 연주가 상훈을 배려하고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그 균형감은 어디까지나 연주를 제외한 균형감이었다. 상훈의 24시간 중에 여행과 연재, 소설, 수면을 제외하면 남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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