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imme, gimme, gimme

2020.09.23

by 스미레

상훈은 연주가 남기고 간 설거지와 옷가지들을 정리하고 있다. 연주는 새벽 내내 상훈을 기다리며 여름밤을 견뎠다. 땀에 젖어 내던져진 그녀의 속옷과 잠옷을 빨래통에 가져다 넣었다. 달걀 껍데기를 물에 씻어 포개어 놓고 접시와 그릇에 묻은 기름과 음식물 때가 금방 눌어붙지 않도록 물에 적셔 놓았다.

상훈은 자신의 방으로 가서 똑같이 땀에 젖어 방바닥에 던져져 있는 자신의 옷과 속옷도 가져왔다. 연주의 것이 들어있는 세탁기에 자신의 것까지 던져 넣는다. 세탁기 안에는 흰옷과 검은 옷의 구분이 없다. 세제와 섬유유연제를 세탁기 속 쌓인 빨래에 우악스럽게 쏟아붓는다. 계량도 하지 않는다. 상훈은 그런 습관 때문에 종종 빨래를 망친다. 흰 빨래가 물들거나 까만 옷에 먼지가 덕지덕지 붙어버린 걸 본 후에야 마음을 다잡고 계량을 하고 옷을 구분하거나 세탁망을 찾는다.

세탁기의 헹굼 시간을 평소보다 더 오래 설정한다. 인터넷 어딘가에서 습득한 정보에 따르면 이 방법이 흰옷과 검은 옷을 같이 빨더라도 보풀이나 먼지가 들러붙는 것을 효과적으로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한다.

버튼을 필요 이상의 힘으로 꾹꾹 누르고는 세제 거품을 물며 물이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세탁기 앞에 서서 상훈은 뚜껑도 닫지 않은 채 그 소용돌이 속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시간이 다되어 열어보면 모든 것이 없어져있거나 분해되어 있기를 바랐다. 그리고는 주방이 있는 방향으로 슥하고 고개를 돌린다. 싱크대에 있는 것들도 전부 이곳에 쳐 넣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밀려온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뚜껑을 덮고 세탁실을 나간다. ‘또 이러는 군’ 하고 나지막이 내뱉는다. 자신 내면의 폭력성에 대한 경계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상훈은 마음을 가다듬으려 청소기를 돌리기로 한다. 방바닥보다는 그의 심연 밑바닥에 엉켜있는 머리카락들을 치우는 게 우선일 것 같다. 그래서인지 평소보다도 더 깨끗하고 정교하게 청소하려 노력한다. 연주가 어지르고 간 흔적들을 지운다. 오랜 기간 비워놓아 어질러지지 않은 방은 먼지만 닦고 끝낸다. 청소와 정리가 효과가 있었는지 상훈의 호흡이 조금 안정된다. 설거지를 마지막으로 자신의 집에 대한 두 번째 복귀인사를 마쳤다.


청소기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은 후 거실로 나가 소파에 앉았다. 소파는 상훈을 대신해서 긴 한숨 소리를 내며 푹 꺼진다. 앉은 지 몇십 초도 지나지 않아 그가 다시 일어나 주방으로 향한다. 싱크대 위 찬장을 차례차례 열어보면서 혼잣말을 내뱉는다


‘분명 여기에 두었던 것 같은데’


연주는 술을 찬장에 보관해놓는다. 마지막 차례를 기다리던 찬장의 문이 열리는 순간 스테인리스 쟁반 위에 놓인 호박빛 유리병이 보인다.

엎어져 있는 두 개의 작은 온 더 락 잔을 자식들처럼 거느린 채 상훈을 맞아준다. 술병의 라벨을 본 순간 그는 흠칫 놀란다. ‘라가불린?‘ 연주는 피트 향이 강한 위스키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직 뜯지 않은 것을 보니 귀국하는 상훈을 맞이하기 위해 사다 놓은 것 같다. 애초에 계획대로라면 이 위스키는 오늘 새벽이나 저녁에 개봉이 될 운명이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상훈이 새벽에 가까운 아침 얌전히 자신을 기다려준 연인에게 무례하게 굴지 않았다면 말이다.

술에 담긴 사연은 차치한 채 상훈은 뚜껑을 싸고 있는 씰을 거칠게 찢어발긴다. 이내 머나먼 타국에서 숙련된 디스틸러에 의해 정성스레 키워진 스피릿은 세탁기에 부어졌던 세제 따위의 취급을 받으며 잔으로 내팽개쳐진다. 계량도 없이.

상훈은 병에서 잔으로 옮겨진 위스키를 쳐다본다. 그리고는 나중에 또 따르기 귀찮다는 듯이 다시 한번 더 따른다. 이내 술잔의 표면이 찰랑거린다. 잔을 들어 이동하며 넘치지 않도록 ’ 후루룩‘하고 마신다. ’ 후루룩‘이라니. 볼품없는 꼴이다. 조예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상훈은 지금까지 음식에 과하게 매운맛을 첨가해 먹는 사람들을 향한 개인적인 비판을 숨기지 않았다. 매운 감각은 재료의 맛과 공들여 만들어진 레시피 속의 조화를 해친다는 것이 공식적인 입장이었지만 속으로는 땀을 흘리고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입안과 속을 망치는 이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세계의 위스키 애호가들에게 거센 비난을 받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한다. 그러면서도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내내 잔을 들고 연실 후루룩 거린다. 상훈은 방으로 들어와 책상에 앉고는 덮어놓았던 노트북을 다시 열었다. 빈 도화지 주제에 주인에게 뭔가를 요구하는 듯 보이는 워드프로세서는 치워버렸다.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부엌을 찾는다. 가만히 있는 것이 힘들다. 부엌과 세탁실을 잇는 뒷문을 열고 들어가 선반에 있는 과자들 앞에 선다. 잠시 고민하다가 원통형 케이스에든 감자칩을 한통 집어 들고는 다시 방으로 들어온다. 정신없이 바턴을 건네받은 계주 주자처럼 대충 휘어잡는다. 터벅터벅 걷는 것이 꼭 갓 구운 바게트를 들고 집으로 걸어가거나 차로 돌아가는 스페인 사람들의 아침 풍경을 연상시켰다. 남들에게 떠벌리고 다니고 싶은 경험이 있는가 하면 자신도 모르는 새 무의식적으로 학습되어 모방하고 있는 경험들도 있는 것이다. 사람을 잠식시키는 것은 대개 그런 것들이다.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바로 앉지 않고 구석구석을 서성 거린다. 누구에게 흔적을 남기려는 의도가 있는가 싶을 정도로 과자를 게걸스럽게 먹는다. 차곡차곡 쌓인 먼지 카펫 위에 과자 부스러기 우박이 내린다. 날카롭고 경도 높은 감자칩의 내장들이 먼 짓 속에 잔인하게 박힌다. 그것을 끄집어내려면 먼지 자체를 통째로 들어내야 한다. 먼지의 짙은 회색이 걷히고 이내 새햐안 부스러기 별이 뜬다. 밤하늘은 그렇게 별에게 잠식당한다.

상훈은 자신 내면의 밑바닥을 직면하고 싶어 하는 용기 부족한 갈망을 과자통 따위에 집어던져 버린다. 얇은 칩을 세 개씩, 네 개씩 집어 입에 욱여넣으며 바닥이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낸다. 앞니와 가까운 얇은 입천장은 작은 생채기에도 희생되고 촘촘히 박혀있는 작은 어금니와 큰 어금니 무리들은 자신들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반죽 무더기들을 점점 부담스러워한다. 그러나 아랑곳하지 않고 갈망 가득 저작질을 해댄다. 그 모습이 무모하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없다.


외면하고 싶다


상훈은 결국 선채로 과자 한통을 다 비웠다.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노트북 옆에 방치해버린 위스키를 바라본다. 방으로 들어오고 의자에 앉는 과정에서 몇 차례 더 후루룩 거린 탓에 이제야 고급 위스키로써 잔에 따라져 있기에 품위 있어 보일 만한 양이 남아있었다. 비워진 과자 통을 바닥 한 구석에 내려놓는다. 턱, 하고 딱딱한 바닥과 원통의 금속 바닥이 맞닿는 둔탁한 소리가 난다. 이윽고 고개를 들어 책상을 쳐다본다. 그리로 다시 가 앉으려는 것은 아니다. 책상 위에는 위스키와 노트북이 있다.

상훈의 머릿속에서는 위스키가 노트북 키보드에 촤악 하고 내리 꽃혀지는 일이 벌어진다. 호박색 액체가 검은색 키캡과 그를 감싸는 틀 사이에 난 미세한 공간 하나하나에 빠짐없이 스며들어 내려간다. 8년간 나무속에 품어져 있던 48도의 에탄올이 황금빛 눈사태를 일으킨다. 산 밑의 마을을 덮친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속수무책으로 당한다. 찰나의 스파크가 튄다. 키보드가 먹통이 된다. 스크린이 먹통이 된다. 내장 드라이브가 먹통이 된다. 노트북에 있던 모든 정보가 소멸된다. 그의 생각과 경험이 기록된 파일들도, 출판사에 보냈던 원고들도, 일기도, 사진도, 소설도. 상훈은 자신의 삶을 비중 있게 차지했던 것들을 쓸어냄으로써 자신 또한 사라지기를 바랐다. 그가 바라는 끝에는 아름다운 마무리나 세상의 보편적인 이치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남들이 따라 할 수 없고 상상하기 힘든 어쩔 수 없는 사고가 스스로에게 필연적으로 일어나길 바란다. 그런 생각은 상훈을 더욱더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킨다. 그저 불가사의한 ‘멸실로써 존재’하고 싶어 진다는 모순된 생각을 한다.

상훈의 이런 폭력적인 상상은 갖은 노력 속에서도 6개월 내내 지속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썩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라는 것은 그도 잘 알고 있다. 설령 기분 좋은 생각일지라도 이렇게 때와 장소 없이 불쑥불쑥 찾아와 주의를 끌어댄다면 곤란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받아들이게 된 것이 있다. 당장은 도움이 되지 않는 것으로 보이나 필연적으로 일어나야 하는 일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 스스로 발렌시아에서의 사건 이후 이질감의 정지에 대해 해방이라고 부르기로 했듯 불확실하며 간단히 돌파해버릴 수 없는 현상에 대해 이름 짓고 규정해버리는 습관을 들임으로써 때 없이 찾아오는 불청객들에게 암묵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공고히 하기로 하는 것이다.

상훈은 그렇게 선으로 존재하는 시간들의 끝자락 순간순간을 매듭지어 나가기로 했다. 적어도 현재로서는 ‘계획 같은 건 의미가 없다.’, ‘의미를 예상하거나 파악하고 행동할 겨를은 없다’ 하고 생각했다. 발렌시아 전과 후를 기점 해서 삶의 전략을 바꾸어야만 했던 것이다. 아니 이전까지는 전략이랄 것도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불확실하고 이질적인 것을 직면하려 용기 내는 동시에 자신을 파괴하고 싶은 욕망이 힐끔힐끔 기회를 엿보는 상태를 받아들여야만 한다. 현상에 대해 결단하는데 온 힘을 쏟아야 한다. 선택을 강요받을 때도 있고 방치를 강요받을 때도 있다. 하지만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관찰해야 한다. 그렇게 쌓인 결과물들과 부산물들을 비닐봉지에 차곡차곡 넣어 단단히 매듭짓는다. 그걸 밟고 일어서 담을 넘거나 끊어진 길에 징검다리를 놓는 것이다.


상훈은 창가로 가 커튼을 완전히 젖혔다. 벌써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낮까지는 해가 쨍쨍하더니 밤에는 구름이 많이 껴있었다. 구름 사이로 고층 건물의 항공장애등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상훈은 선명하지 못한 희뿌연 빨간빛이 점등과 소등을 반복하는 것을 보며 자신의 뇌 회로 속에도 원치 않는 생각에 부딪히지 않게 해 주도록 일종의 항공장애등 세포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내 그것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장애물을 피할 수 있게 해주는 것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바라보는 곳과 생각의 방향키가 회피를 향할 때마다 해방은 항상 그의 시선 반대편으로 도망갈 것이다.


생각의 길을 바로잡겠다는 듯 상훈은 몸을 획하고 돌려 창문 맞은편에 있는 자신의 방문을 쳐다본다. 시선을 잠시 문에 고정한 채 가만히 서있는다. 많은 양의 과자를 한 번에 다 먹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도수의 위스키를 생일날 아침 미역 국물 마시듯이 후루룩 댄 대가로 갑자기 무거운 취기가 찾아온다. ‘그렇다고 위스키를 숟가락으로 떠먹을 수는 없었잖아?’하며 말도 안 되는 억울함을 품어본다.

그는 술을 한번 마시면 자제력을 쉽게 잃는 탓에 집 밖에서는 술자리를 잘 가지지 않는다. 내면에 잠들었던 폭력성이 스스로를 향한다. 결국 황금빛 눈사태는 노트북이 아닌 그의 장기와 내장 그리고 혈액과 근육 사이사이를 뒤덮고 말았다. 이내 속이 울렁거리고 두통이 찾아온다. 다들 제 역할을 잃고 본체를 휘청거리게 만든다. 노트북의 전자기판과는 다르게 그에게는 다시 눈을 녹이고 마을을 재건할 만한 자연 해독능력이 있지만 그래도 능력 밖의 욕심을 부린 자신을 책망한다.

그러나 이제는 동시에 자각하려 한다. 그가 방에 들어와 한 일은 술을 마시고 과자를 한통 다 비우고 창밖을 한번 본 것뿐이다. 그냥 ‘단지 그것뿐이다’라고 상훈은 생각했다. ‘그것 자체엔 별다른 의미 같은 건 없다'고 나지막이 내뱉는다. 의미가 없다는 것은 무색하다는 것이 아니다. 부정적 물감으로 칠하지 말자는 다짐이다. 다음을 선택하자고 마음먹는다.


‘맴돌지 않고 앞을 향해 한 발을 딛는 거야’


상훈은 자신이 무너뜨린 마을을 좀 더 빨리 재건할 요량으로 물을 한잔 마시고는 집 근처를 좀 걷기로 마음먹는다. 책상에 반 정도 남아 있는 위스키를 싱크대에 부어버리고 과자 쓰레기를 분리수거한 후에 운동화를 챙겨신었다. 신발장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과 화장실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이내 현관을 벌컥 열어젖힌다.


상훈은 겨우 자기집문을 기세 있게 열고 나온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는 어느새 집으로부터 천천히 멀어지기 시작한다. 도시는 아직 밝다. 아니 이제 밝아질 차례다. 태양이 내려준 빛과 열기를 다시 돌려주려는 것 같다. 이제 우리 차례다 하는 기세로 발광한다. 밤은 모든 것을 정지시키고 잠들게 만드는 존재가 아니다. 현대의 사회는 그렇게 돌아가지 않는다. 아니, 그렇게 돌아가서는 안된다. 적어도 이제는 제동을 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누군가 잠이 들었을 때 어디선가는 깨어나는 이들이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꼭 핸드브레이크가 풀린 상태로 언덕길에 세워진 자동차처럼 보이기도 한다. 껍데기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속 안에서는 파킹 기어 혼자 굉장한 부담을 안고 있는 것이다. 서서히 부하를 받고 있다. 끝내 임계점을 넘어선다면 언덕 아래로 곤두박질치는 2톤가량의 바퀴 달린 금속 덩어리를 멈출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다.

태양 빛과 밤 도시의 네온사인은 마치 리튬이온 전지의 양극과 음극이 전해질을 주고받으며 충전되고, 전원을 공급하듯 위아래로 서로 간 빛을 운반함으로써 세상의 톱니바퀴를 움직인다. 낮의 달을 태양이라고 하지 않듯 밤의 태양은 달이 아니다. 달은 그저 어둠의 극단에 찍힌 한 점으로써 광활히 깔린 어둠의 양탄자가 더욱 돋보이도록 기능한다.

상훈은 자신이 집을 구한 이 도시를 좋아한다. 정확히는 자신의 집이 있는 동네를 좋아한다. 근처에 마음 놓고 걸을 수 있는 공원과 산책로, 멍하니 있을 수 있는 벤치들이 즐비하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집을 구할 때 제일 첫 번째 충족되어야 할 조건이었다.

상훈은 집을 자주 비우기 때문에 내부의 인테리어나 기타 가구들에는 그리 까다롭게 굴지 않았다. TV도 설치하지 않았다. 심지어 소파조차 연주를 위해 들여놓은 것이다. 유일하게 돈이나 품을 들여가며 공들여 갖추는 장소가 있다면 집으로 돌아와 원고를 쓰거나 맥주를 마시며 영화를 보고, 젖혀진 의자에 기대어 한없이 음악을 흥얼거릴 수 있는 책상이 있는 그곳 한 곳 정도이겠다. 그 외에는 구색만 갖추면 된다는 생각이다.

상훈은 집의 외부, 정확히는 집 주변의 환경을 좀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 머릿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서툰 그는 가볍게 걷거나, 쓰거나, 말하는 것이 자신에게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기에 -커리어를 유지하게 위해서라도- 환경적인 조건들을 갖추어 놓으려고 하는 편이다.


상훈은 자신이 몇 주 혹은 몇 달 간격으로 집으로 돌아올 때마다 항상 찾는 공원 입구로 들어선다. 아주 신경 써서 가꾸어진 산책로를 걷는다. 양옆의 녹음은 흙 위에 단단히 버티고 서서 생태의 기초를 조성하고 있다. 그리 폭넓진 않으나 존재감 있게 흐르는 개천가는 몇 킬로 미터에 이르는 공간에 걸쳐 쉴 새 없이 재잘거린다. 물살이 징검다리에 스치고 큰 돌에 부딪혀 산산조각 나고 파열되며 풀 사이를 흐르는 동안 발생되는 다채로운 소리는 매일 보면 지루해질 수 있는 풍경에 생기를 더해주고 있다.

자전거와 보행자가 어우러져 질서 있게 밟고 지나다니는 길은 아주 섬세하고 사명감 있는 기술자들의 작품임이 분명하다. 실제로 상훈은 개인적으로 그 길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다. 수천번의 기상변화를 통한 담금질에도 갈라짐이나 패임을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 그저 태양빛으로 인한 빛바램 정도만 있을 뿐이다. 수백 번의 고민과 노력을 기울인 끝에 인간의 손끝으로 정교하게 빚어낸 결과물이다. 그런 결과물을 직접 보고 경험하는 것은 자연이 줄 수 있는 경외감과 같은 높은 수준의 고양감을 준다고 생각한다. 상훈은 한결 안정되고 기분 좋은 마음으로 한발 한발 길을 밟는다.

취기가 사라지며 다시 서서히 몸의 통제권을 가져온다. 한 중년 남자가 자전거를 타고 스쳐 지나간다. 골반부터 발목까지의 모든 관절이 조화롭게 움직인다. 보기 좋은 리듬감이다. 아마도 그 리듬은 남자의 근육세포 곳곳에 정교하게 프로그래밍되어있을 것이다. 남자의 종아리 근육은 날이 어두움에도 불구하고 그 윤곽이 발하는 입체감이 가히 폭력적이었다. 적어도 몇 해에 걸친 훈련을 통해 단련시킨 것이 분명했다.

상훈은 공원 속 이 길도 그렇게 점점 단련되어 영원히 존재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퀴와 발에 밟히고 고온과 습기, 저온과 건조와 싸우며 무엇보다 단단하게 굳어져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투우장의 소와 케렌시아(Querencia)의 관계처럼 말이다. 상훈도 영원한 자신만의 ‘귀소(歸巢)’ 장소로써 그 길을 지키고 싶다.

유려한 곡선으로 디자인되어 대각선으로 뻗어있는 자전거의 카본 프레임 위 물병이 꽂혀있어야 할 자리에는 원통형 블루투스 스피커가 꽂혀있었다. 그곳에서는 큰 소리로 ABBA의 ‘gimme, gimme, gimme’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이라이트 부분의 리듬에 맞추어 페달질을 하기에 좋은 선곡이다.


그때 누군가 상훈의 이름을 외치며 불러 세웠다.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상훈과 비슷한 또래의 남녀 셋이 벤치에 앉아있다. 어두운 탓에 금세 얼굴을 알아채지 못하고 가만히 서서 우물쭈물거리자 가장자리에 앉아있던 남자가 손을 흔들며 다시 한번 큰 소리로 부른다.

들어본 적이 있는 목소리. 상훈과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동창이다. 이성호. 이름 두 글자의 초성이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관심사도, 성격도, 진로도 연결점이 없었던 탓에 많이 어울리지는 못했던 친구였다. 그러나 학창 시절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몇 번인가 긴 대화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신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라이프스타일을 가진 서로를 신기하게 생각했었다.


“반가워!”


상훈이 가까이 다가가자 성호는 진심으로 반가운 표정을 지으며 일어났다. 어색해하는 상훈을 제압하듯 악수를 하고 포옹을 했다. 남자 둘이 뜨거운 재회를 하는 동안 벤치에 앉은 두 여자들은 그 광경이 재밌는지 자기들끼리 키득키득거렸다. 아마 상훈의 반응이 우스운 것이리라.


“그래, 오랜만이다. 5년 정도 되었나?”


상훈은 적극적인 스킨십에 당황해하며 대답했다.


“어색해하기는. 5년? 벌써 그렇게 되었나. 뭐 졸업하고는 쭉 보지 못했으니 그 정도는 되었겠구나. 재밌다. 그래 넌 역시 변한 게 하나 없구나?”


성호는 상훈을 놀리듯 대답하면서도 뒤에 있는 여자들을 힐끔거렸다.


“그런가, 시간이 빨리 지나갔다는 것에는 동감해. 그나저나 여기 여자분들은 누구셔?”


상훈은 성호와 자신 사이에 흐르는 어색한 기류가 압력이 높아져 터져 버리기 전에 벤치의 여자들 쪽으로 슬쩍 흘려보내기로 했다.


“아 여기는 신경 쓸 것 없어. 우리와 동창도 아니고 동갑도 아니고 동료도 아니고 고향 친구도 아니고 동네 친구도 아니야. 나도 만난 지 몇 시간밖에 안되었어.”


성호는 두 여자 들을 마치 미처 치우지 못한 어질러진 방 따위로 취급했다.


“그래도 이름 정도는 소개해줘야지 바보야.” 하고 두 여자 중 한 명이 말했다. 말하는 것을 보아하니 술을 마신 상태인 것 같았다. 이제 보니 동창에게서도 술냄새가 풍겼다.


“이런, 오랜만에 만났는데 부끄러운 모습이라 난감하네. 근처 자주 가는 싸구려 바에 가서 한잔하는데 거기서 우연히 대화가 잘 트이는 바람에 아직도 같이 있게 되었지 뭐야. 학교에 다닐 때는 항상 옆에 여자 친구가 있는 것에 우쭐하며 다니는 게 낙이었는데 말이야. 뭐 지금은 껍데기만 남자고 속은 전부 여자로 교체된 느낌이야. 누나들 다섯 사이에서 자란 게 저주인지 축복인지 이제는 헷갈려.”


성호는 자신의 모습이 어찌 보일지 뒤늦게 자각했는지 다소 횡설수설하며 말했다. 그런 상태로 오랜 친구를 불러 세운 것을 약간은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상훈이 기억하기로 성호의 누나들은 그에게 입혀보고 싶은 것을 입히고 데려가고 싶은 곳을 데려가고 먹여주고 싶은 것을 먹이면서 키웠다. 흡사 집에 한 마리쯤 있는 애완동물을 다루듯 무조건적인 귀여움으로 그를 대했다.

제각기 성격이 다른 다섯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20년 가까이 생활하는 것에 대해 성호는 항상 꽤나 고역인 듯 말했었다. 그러나 그를 키워낸 가정환경은 이성을 대할 때의 자세에 한해서만큼은 그 시절 보통의 십 대 남자아이들이 가져야 할 서툴음과 쑥스러움 대신에 자연스러움과 능숙함을 채워넣어준 것은 분명했다.


“변한 게 없다는 말은 다시 돌려줄게.”


상훈은 성호의 말을 되갚아주듯 놀려주었다.


“하, 일단 여기 좀 앉아.”


성호는 멋쩍은 듯 웃음과 동시에 탄식했다. 그리고는 술에 취한 두 여자를 짐짝 떠밀듯 벤치의 가장자리로 밀어놓고 둘이 앉을자리를 마련했다. 자리에 앉고 슬쩍 보니 여자들은 어느새 잠이 들었는지 서로의 어깨와 머리를 베고 죽은 듯 앉아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후에 동창이 먼저 말을 건넸다.


“그래, 어떻게 지냈어? 지금은 어떤 일을 하고 있나? 아니다 아무래도 나는 맥주를 더 마셔야겠어. 이 여자들 오늘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하소연에 물고 가 트여서는 자기들끼리 흥이 났다가 한탄하다가를 반복했다니까. 그러면서 마음대로 취해버리고 그 뒤로는 날 전혀 배려하지 않아 줬다고. 나는 잘생기고 매력 있지만 이상하게 침대로 데려가고 싶지는 않다는 거야. 나 참 내가 데려가 달라고 했냐고. 아무리 술에 취해도 그렇지 원래 이런 말을 원래 서슴없이 하는 게 맞는 거야?. 아무튼 시간이 괜찮다면 여기 잠깐 앉아서 기다려 내가 금방 편의점이라도 다녀오지. 넌 아직도 그것만 마시나? 오랜만에 같이 한 캔 하자고.”


성호가 들이쉬는 숨에만 알코올이 있는 것인지 그는 말을 하면 할수록 더 술에 취해가는 것만 같았다.


“그래. 그러자”


상훈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호는 가까운 편의점이 있는 방향을 향해 전력으로 달려갔다. 상훈은 그 뒷모습을 보며 ‘올 때는 걸어와 주었으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한다. 뛰어올 것이라면 성호에게 맥주만 흔들리지 않게 하는 일종의 다관절 짐벌 같은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성호는 다행히도 빠르게 걸어서 돌아왔다. 그 뒤로 둘은 벤치에 앉아 한 시간 정도 서로가 살아온 5년 간의 시간을 간접적으로 공유했다. 성호는 꽤나 진지하게 그러나 덤덤하게 졸업 후 자신의 5년을 거의 남김없이 이야기했다. 그에 반해 상훈은 여러 곳에 기고를 하며 작가 활동을 하고 있다는 것 외에 최근 6개월간의 일에 대해서만은 일부러 침묵했다.

상훈이 주로 대화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잘하지 않는 편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실제로 말을 꺼내려고 생각하니 ‘그림자’ 라던지 ‘오랑우탄’ 이라던지, 너무 터무니없게만 느껴질 것 같았다. 거기에다가 그 터무니없는 것들 때문에 일상이 무너진 지 6개월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오히려 대화의 진정성을 떨어뜨릴 것 같았다.

이런 것을 우려할 정도로 성호는 자신의 5년을 꽤나 다각도에서 바라보며 이야기를 해주었다. 상훈이 예상했던 것에 비해서는 성호는 무난한 삶을 살고 있었다. 상훈의 기억 속 성호는 옷을 좋아했다. 항상 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꿈이라고 했었다. 언젠가 어렸을 때 성호가 한밤중 몰래 집에 있는 부모님의 술을 훔쳐 나와 상훈을 불러낸 적이 있었다. 그때 인적 드문 골목의 계단에 걸터앉아 이렇게 이야기했었다.


“나는 옷이 좋아. 아직까지는 고작 십 대의 마지막을 보내고 있는 어린애의 지나가는 관심사로 보이겠지. ‘그 나이에 자신의 겉치장에 신경 쓰지 않는 애들이 몇이나 있다고.’라고 생각하며 비웃어도 좋아. 그렇지만 나는 꽤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 인간의 몸에 걸쳐져 있을 때 옷이란 건 한 개인의 라이프스타일부터 성격, 의도, 기분, 습관까지 대변해주지. 더 나아가 한 집단의 철학까지도 여실히 보여줄 수 있는 창작물이야. 또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꺼지기 전까지 멈추지 않을 무한한 변모 속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부산물이라고 생각해. 나는 그것들이 탄생하는 현장에 직접 몸을 담고 싶은 거야.”


이런 이유로 상훈은 당연히 성호가 옷과 디자인에 파묻혀 화려한 삶을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성호는 의상디자인 관련과를 졸업한 후 소프트웨어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직원 규모가 7명 남짓한 작지만 탄탄한 회사야.”


성호는 상훈이 묻기도 전에 미리 선수를 쳐 대답해주었다.

그곳의 대표가 국내 굴지의 대기업 출신이라 제법 굵직한 곳들에 연줄이 많다고 했다. 업계에서 큰 두각을 나타내거나 선두주자가 되지는 않으나 끝까지 자기 자리는 보전하는 회사. 자신은 ‘그런 곳’에 다니고 있다고 했다. 때문에 직원들도, 대표도 업무나 경영에 대한 압박감을 상대적으로 덜 가지고 있다고. 성호는 약간은 자랑스럽게 말하는 듯 보였다. 자연스러운 소속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술꾼, 주변에 항상 여자가 끊이지를 않는다는 이미지만이 상훈의 기억 속 성호와 일치했다. 여전히 술을 좋아하고 여자들과 어울리는 것을 ‘잘하고’ 즐거워했지만 방탕해지지는 않은 것 같았다. 성실히 저축도 하며 집이나 결혼 같은 미래를 대비하는 자세 같은 것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술과 여자를 놓지 못하는 또래 남자들에 대한 회의감 내지 일말의 경멸 같은 것이 대화 속에서 풍겨 나왔다. 그런 생각을 통해 약간의 자존감을 충전하는 듯 보이기도 했다. 자신은 그들과는 다르다는 말만 계속해서 강조했기 때문이다. 상훈은 대체 무엇이 다른 것인지를 묻고 싶었으나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성호는 맡은 업무 안에서도 꽤나 재능이 있는지 회사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다고 했다. ‘실로 모범적인 삶이다’ 하고 상훈은 생각했다. 성호의 삶은 실제로도 누군가는 굉장히 선망할 수 있는 삶이다. 성호는 자신이 옷을 계속 붙잡고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고 가끔씩 상상하곤 한다고 했다. 개인적인 갈망에 대한 노력의 과정, 길을 스스로 닦아가는 것, 그 속의 수많은 도전과 실패에 당면할 때 찾아오는 희열이 그리워질 때가 있다고 했다.


'그럴 때 술과 여자가 필요해'


라고 성호는 말했다.

상훈은 성호가 이성으로써의 여자가 아닌 사랑을 줄 수 있는 대상으로써의 여자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만날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성호도 그것을 원하는지의 여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아직 그를 키워낸 환경이 성호를 완벽히 놓아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포근함이나 핑곗거리 같은 것이 널려있는 상황이 아직 필요한 듯 도 했다. 성호는 지금 5년 전 스스로가 생각했던 것과 다른 방향을 걷고 있지만 그렇다고 현재 하고 있는 일을 딱히 싫어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재능이 없는 것도 아니다.


“나름 나쁘지 않은 삶이라고 기본적으로는 생각해. 그리고 무엇보다 꿈을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삶이 주는 피로도를 감내할 만큼 나는 강하지 못해. 그건. 재능이나 의지와는 무관하다는 걸 배웠어.”


상훈은 성호의 마지막 말에서 왠지 씁쓸함을 찾아야 할 것 같아 노력해보았지만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상훈이 가진 라이프스타일이 만든 선입견일지도 모른다. 상훈의 삶은 다름, 개성, 특별함 같은 것들을 항상 추구하고 지니고 있어야만 했기 때문이다. 누가 시킨 것은 아니나 스스로 그래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러니 성호처럼 리스크를 조금 내려놓고 안정적인 것을 찾아 차곡차곡 살아나가는 것은 다소 무의미하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성호가 말했듯 라이프스타일에는 정답은 없다. 모두가 자신에 맞는 옷을 입고 자신의 삶이 선사하는 경험의 자국대로 주름이 잡힌다. 그렇게 매무새가 고쳐지는 법인 것이다. 살아가며 잡히는 주름의 위치나 생김새에 대해 예상하거나 짐작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지나온 것에 대해 떠올리는 것만큼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건 없는 것 같아. 이야기하다 보니 밤이 늦기는 했지만 술기운도 다시 오르고 좀 출출한데 뭐라도 좀 먹으러 가지 않겠나? 내가 새벽에 종종 찾는 식당이 있어. 걷기엔 좀 멀지만 택시를 타면 금방이니. 어때?. 차비는 내가 내지.”


성호는 약간은 간지러워진 분위기를 깨고 싶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옛날부터 그는 자신이 만든 분위기에 견디지 못해 뭘 먹으러 가자거나 갑자기 운동을 하러 가자는 등의 맥락 없는 제안을 종종 하곤 했다.


“그럴까? 생각해보니 나도 하루 종일 제대로 챙겨 먹은 것이 없군. 그리고 맥주를 마셨더니 기름진 게 먹고 싶어 졌어.”


“마침 잘됐네. 그럼 분명히 마음에 들어 할 거야.”


성호는 앉아 있는 여자 둘을 흔들어 깨웠다. 잠깐의 수면으로는 깨지 않을 취기였는지 그녀들은 여전히 비틀거렸고 여전히 상훈의 존재에 대해서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쓸 겨를이 없어 보였다. 상훈과 성호는 여자들을 한 명씩 맡아 부축하고는 낑낑대며 대로변으로 나가 지나가는 택시를 잡았다. 남자 두 명이 술에 취한 여자 둘을 짐짝처럼 던져놓아도 택시기사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앞만 응시하고 있었다.


“아, 연주를 좀 불러도 될까? 아직 자고 있지 않을 거고 아마 저녁도 먹지 않았을 거야. 상황은 대충 문자로 보내 놨으니 신경 쓸 것 없어.”


목적지로 가는 택시 안에서 놓친 게 생각났다는 듯 상훈이 말을 꺼냈다. 연주의 존재에 대해서는 벤치의 대화에서 말을 해놓은 상태였다.


“또 한 명의 숙녀분이 늘어나는 군.”


성호는 조수석에 앉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지막이 말했다.


택시를 타고 가면 금방이라던 성호의 말은 조금 과장되었던 게 분명했다. 창문 밖으로는 상훈이 살고 있는 동네를 지나가는 지하철 3호선의 마지막 역이 보였다. 도시의 외곽까지 와버린 것이다. 성호는 스스로가 포기한 것에 대한 미련에 사무칠 때면 이렇게 먼 거리를 고민도 없이 훌쩍훌쩍 떠나는 것일까.

벤치의 대화에서 상훈은 성호에게 스스로 개척해나가는 삶은 대체 불가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주 지친다고. 상훈은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그렇게 말했는지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6개월째 자석과 가까워진 나침반 바늘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주제에 무슨 ‘개척자’고 ‘대체 불가’란 말인가. 아무도 볼 수 없는 상훈의 내면에서는 자신의 삶을 성호가 선망하기를 바랐다. 자신을 보고 자극을 얻어 다시 옷에 대한 열망이 불타기를 바랐다. 그래서 불안정한 현재를 가리고 자신을 포장했다. 그러면서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는 한참 자격미달이라고, 아직도 제자리를 걷고 있다고 겸손까지 떨어 버린 자신의 모습에서 상훈은 경멸을 느꼈다.


택시는 끝내 고속도로로 나가는 진출입로 직전에 있는 마지막 편의점을 지나서야 멈추어 섰다. 이상하게도 편의점은 불이 꺼져있었다. 그런 곳에 있는 편의점 치고 이렇게 일찍 닫는 곳은 드물다. 택시가 멈춘 곳에는 영어로 drive-in이라고 적힌 대형 간판이 세워져 있었다. 바로 옆에는 적벽돌로 지어진 식당 건물이 보였다. 긴 직사각형 형태의 건물에 둥근 지붕이 얹어져 있었다. 직사각형의 긴 쪽에는 문으로 사용해도 될 만큼의 큰 창문 5개가 나있다. 빛이 많이 바래 있는 창틀과는 대조되는 투명한 유리가 인상 깊다. 창틀을 그대로 두고 유리만 주기적으로 교체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주인의 취향인지 식당 주차장의 라인은 창문과 같은 숫자로 5칸이 그려져 있다. 창가 자리에 앉는 다면 주차된 자신의 차를 옆에 두고 시간을 보낼 수 있다. 주차장에는 쥐색 랜드로버가 한대 세워져 있었다. 연주의 차다. 혹시나 해서 번호판을 확인해봤지만 역시 그녀의 차가 맞았다. 2016년식 디스커버리다. 연주는 크고 각진 투박한 차량을 좋아한다. V6 엔진이 기름을 태우며 내는 운동에너지를 좋아한다. 6기 통 엔진의 소리와 진동을 좋아한다.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을 일부러 즐기듯이. 그녀는 발끝으로 맹수를 길들이는 것을 좋아한다.

불현듯 상훈은 성호를 향해 어필하고 싶어졌다. 자동차 역시 옷 못지않게 한 인간에게 비중 있는 기능을 할 수 있는 것 같다고. 네가 포기한 것은 단지 옷 하나뿐이라고.

택시에서 내려 식당으로 들어가야 할 즈음에 여자 둘은 술이 조금 깼는지 저들끼리 작은 소리로 숙덕거리고 있었다. 자신들이 정신이 들 때마다 계속 장소가 바뀌고 웬 처음 보는 남자가 일행에 껴있어도 여자들은 경계하거나 이상하게 생각지 않는다. 자주 겪는 일이 아니라면 나올 수가 없는 반응들이다.

아무튼 그들이 계속 몸을 가누지 못해 또 한 번 부축이 필요했다면 다소 난처했을 것이다. 연인으로써 그런 곤란한 모습으로 식당에 들어서는 꼴을 연주가 테이블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게 할 수는 없다. 그 모습을 본 그녀의 표정을 상상해본다. 우선 실소를 터뜨린다. 이어서 상훈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린 후에 ’네 행동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만, 나를 충분히 납득시킬 수 있어야 할 거야.’ 하고 귓속말로 작은 협박을 할 것이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전체적인 분위기에 다시 스며들어 어울린다.

연주는 상당히 질투심이 많다. 질투심이 많을수록 상훈이 사전에 일부러 염두해야 할 것들도 많아진다. 상훈을 이것이 약간의 스트레스라고는 생각 하나 싫지만은 않다. 연주도 분명 그에게 느끼는 그런 염두 거리 하나쯤은 있을 것이라는 신뢰가 있다.

출출하다고 떼쓰듯 오랜 동창을 여기까지 데려온 성호는 연주를 보고는 그저 통성명 정도만 재빨리 끝내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함께 온 여자 둘과 뒤엉켜 잠이 들어버렸다. 상훈이 좋아할 거라는 메뉴에 대해서는 설명도 해주지 않은 채로.

상훈은 여자 둘은 그냥 그렇게 두고 성호라도 흔들어 깨울까 했으나 그만두기로 했다. 왠지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움직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일부러 그를 속이고 말을 하지 않았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훈은 오랜만에 본 고등학교 동창의 이기적인 행동에 다소 당황스러웠다. 그런 감정을 느낀 것은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체 뭐야? 정말 자기 친구 맞아?”


상훈의 앞에 앉아 있는 연주는 어이없어하며 말했다. 동시에 이 상황이 나름 흥미롭기도 한 듯 자고 있는 세명의 남녀를 연실 힐끗거린다. 자신의 연인은 쉽게 보여주지 않는 무책임하고, 다소 무례한 모습을 신기해한다. 여린 마음에서 나오는 무책임함 그리고 무방비함. 상훈은 그런 모습을 연주 앞에서 보이기를 꺼려하지만 그녀는 상훈에게서 그런 틈새를 포착하는 순간을 좋아한다. 연주는 그럴 때면 마치 자신의 차를 정성스레 정비하듯 상훈의 신체와 정신의 구석구석을 시간을 들여 보살펴 주려한다.

상훈은 그렇지 않아도 오늘 새벽 그녀를 마주하자마자 짜증을 부린 일에 대해 계속 마음에 걸려하고 있었다. 연주와 둘만의 시간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나 개인적으로 그럴 여유가 없었던 하루에 대해 난감해하고 있었다. 상황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사실 이런 상황이 최근 6개월간 꽤나 빈번했기 때문에 그녀 쪽에서도 쌓인 것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연주는 한 번도 먼저 감정적인 언쟁을 시작한 적은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문제에 대해 상훈 쪽에서 혼자 끙끙 앓다가 예민해진 나머지 터져버리기 직전의 폭탄을 연주에게 집어던져도 화 한번 낸 적이 없다. 항상 안타까운 표정으로 상훈을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러다가 가끔 연주 자신도 견디기 힘들 때는 상훈과 한 공간에 있는 것을 미루어두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하곤 했다.

그러니까 알 수 없는 이질감으로 인해 인내하고 있는 것은 비단 상훈뿐만이 아니다. 그러나 상훈은 그 사실에 대해 고마워해야 하는 것인지는 헷갈린다. 아니 명백하게 고마워해야 할 일이지만 정확히는 고마워만 하고 안심할 일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다. 언쟁이 없었던 만큼 동시에 쌓인 것을 해소할 시간도, 서로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었던 계기도 사라졌던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 새벽에는 쌓인 것이 수면 위로 조금은 드러났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평소와는 다르게 연주가 그를 향해 비꼬는 말을 남기고 금세 침대에서 일어나 나가버린 것을 보면 말이다. 상훈은 차라리 연주가 일방적으로 화가 나 있기를 바랐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을 멈추어 주었으면 하고 바라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겠으니 그 이기적인 행동을 당장 멈추라고 화를 냈으면 했다. 그러나 연주는 그러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자기. 이제야 낯빛이 좀 사람다워 보이네.”


연주가 상훈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아침의 끔찍한 실수에 대해 반성중이었거든.”


“일부러 그렇게 말하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돼.”


상훈의 진심 섞인 아부에 연주는 걱정스러운 듯 대답했다. 상훈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살핀다.


“아니야, 진심으로 그렇게 느끼고 있어.”


확신을 주듯 연주의 눈을 쳐다보며 망설임 없이 말한다. 그녀의 눈동자를 이렇게 오래 쳐다본 게 얼마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 6개월쯤 되었을 것이다.


“음… 일단 뭐라도 좀 사 올래? 나, 집에 있는 연어 샌드위치를 포기하고 막 도착한 참이거든.”


연주는 연어라면 사족을 못쓴다.


“이런, 미안해. 나도 여긴 잘 모르는데 주문을 맡겨도 괜찮겠어?”


상훈은 카운터를 한번 슬쩍 보며 주섬주섬 일어난다.


“괜찮아, 자기는 나에게 뭘 가져다줄 수 있는지 보자고.”


연주는 그렇게 말해놓고는 스마트폰을 꺼내 만지작 거리기 시작했다. 뒷일은 너에게 맡긴다는 듯이. 상훈은 약간 긴장한 채로 카운터로 걸어갔다. 연어 샌드위치를 잊게 할 만한 것을 가져가겠다고 자신감 있게 메뉴판을 바라보지만 그 어디를 찾아보아도 연주의 취향에 맞는 음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상훈은 질보다는 다양성으로 승부를 봐야겠다고 전략을 바꾸었다. 연주는 쟁반 위에 버거, 감자칩을 포함해 몇 가지 요리와 스낵을 복잡하게 쌓아온 그를 장난스러운 눈으로 잠시 째려보더니 감자칩 봉지를 잡아 뜯고는 안에서 하나를 집어 올려 여기저기 살핀다. 그리고 입에 넣는다. 씹는 소리가 들리고 이어서 삼키는 소리가 들린다. 연주는 그 이후로 한마디 말도 하지 않은 채 눈앞에 있는 감자칩을 모조리 먹어치웠다.


“5년이 걸릴 수도 있어.”


연주는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크기의 감자칩을 모조리 집어먹은 후에 봉지에 남은 부스러기를 입 안에 털어 넣고 씹으면서 말했다.


“5년?”


갑자기 튀어나온 알 수 없는 말에 상훈이 되물었다.


“자기 저 친구를 5년 만에 봤다고 했지?”


“그렇지.”


“저 친구, 옷에 대한 열정이 엄청났다던 친구 아니야? 배울 점이 많은 친구였다면서. 직업적인 꿈에다가 계획까지 저렇게 뚜렷하게 세워놓은 또래는 그때 처음 봤다고 그랬잖아. 반면에 자기는 실패와 고생이라는 깊이의 수영장에 계속 다이빙하는 아니, 할 수밖에 없다고 했나? 아무튼 그런 운명의 수영선수 같은 삶이 펼쳐져 있는 십 대일 거라고 했지.”


“내가 그랬었나?”


“가끔 우리가 산책할 때 맥주를 마시게 되면 자기가 이야기를 꺼냈었어.”


보통은 상훈이 조금 더 세심하고 신중한 편이지만 반대로 스스로 관심 없고 사소하다고 판단한 일들에 대해서는 깨끗이 잊어버리곤 한다. 신기하게도 연주는 그런 일들에 대한 기억력이 좋다.


“그런데 뭐가 5년이 걸린다는 거야? 그리고 그게 저 친구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거야?”


상훈이 참지 못하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연주는 항상 앞에 이야기를 쌓아두고 본론을 꺼내는 타입이라 종종 이렇게 상대에게 답답함을 느끼게끔 한다.


“자기가 아까 문자로 이야기했던 거 기억나? 저 친구 예상했던 것과 달리 평범한 회사원이 됐다고.”


“그랬지. 문자메시지로 잘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했는데 갑자기 불러내는 와중에 상황 설명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하다 보니 좀 길어져서 거기까지 말했던 것 같아.”


상훈이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아무튼, 운전석에 앉아 신호대기를 하면서 문자를 보자마자 자기는 그 친구를 안타깝게만 볼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 꿈에 대한 열정이 누구보다 뛰어나고 나름의 디테일한 목표나 철학까지 있던 친구가 ‘일개’ 평범한 회사원이 되어버렸으니까. 마치 인생이란 관직에서 유배를 간 거나 마찬가지라고 느꼈을 테지. 자기는 뱀의 머리를 자처하는 스타일이니까.”


연주는 이 말이 분명히 상훈을 자극할 것을 알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거침없이 내뱉었다.


“잠깐만, 일개라고 까지는 생각하지 않는다고. 그렇지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건 사실이야. 처음 그 사실을 직접 듣고 나서는 뭔가 고지를 앞에 두고 돌아내려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어. 충분히 해보지 못하고 포기한 것 같아서 내가 다 김이 새는 느낌이었단 말이야.”


상훈이 발끈하며 연주의 말을 되받아쳤다.


“진정해. 자기를 화나게 하려는 게 아니야. 나는 분명 저 친구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에 스스로의 능력껏 수 없는 시도해 보았을 거라 생각해. 그게 남들 눈에 띄지 않았다고 해도, 남들 성에 차지 않았다고 해도 한 건 한 거야.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 일련의 시도들이 쌓여 도달한 결론에 대한 거야. 자신과 동일시 여겼던 옷을 갈림길에 놓아두고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거기서 오는 회의감이나 두려움, 까마득함은 얼마나 깊었을까? 저 친구가 겪은 일만을 미화할 생각은 없어. 저런 일들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야. 돈 때문에, 주변의 시선 때문에, 스스로의 한계를 인식해서 꿈꿔온 것들을 포기하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아?”


연주는 잠시 호흡을 고르고 말을 다시 이어나갔다.


“저 친구, 아마 옷을 포기하고 회사원으로 생활하는 5년 동안 많이 힘들었을 거야. 자신을 잃은 것 같았을 거야. 아마 깜깜한 방에서 자려고 눈을 감을 때마다 아침이 되면 스스로가 없어져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어. 실제로 물리적이진 않지만 큰 부분이 떨어져 나가 버린 것이니까. 타협했다고 하지만 현실은 개인의 마음을 기다려주지 않아.”


“현실은 개인의 마음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상훈은 연주의 마지막 말을 나지막이 따라 했다.


“그렇지만 저 친구는 버틴 거야. 끝없는 회의감과 열등감으로 무장해 스스로를 파괴하다가도 따뜻함으로 안아주고, 모순적이고 위선적인 모습을 반복해 보이는 자신이 혼란스럽고 그에 대해 괴로워하다가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주었을 거야. 자신의 낯선 모습과 마주해보려고 일부러 다가가려 노력하면서 말이야. 그렇게 친해지고 화해했을 거야. 그렇게 스스로를 다시 재건해나갔을 거야. 자신과 대화하면서 말이야.”


“꼭 길고양이와 친해지는 방법 같네.”


“지금도 뭔가 해결되지 않는 과제 때문에 힘들어 할 수도 있겠지. 그래서 저렇게 늘 새로운 여자를 만나고 술을 마시는 걸로 위안을 삼는 것일 수도 있어. 그렇지만 5년간 쌓아온 스스로와의 친분은 저렇게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휘둘림만으로는 쉽게 무너지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 저건 그냥 산들바람 같은 거야. 오히려 육체와 정신이 본능적으로 균형을 잡는 방법을 깨우친 걸지도 몰라. 저 친구를 기능하게 하는 톱니바퀴에 정기적으로 기름칠을 해주는 일일 수도 있지. 아무튼 그렇게 되기까지 저 친구에게는 5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거야.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포기한 꿈에 대한 회상과 현재의 삶에 대해 덤덤하게 털어놓은 것은 그것이 상대를 믿음직스럽다고 느껴서이거나 저 친구가 단지 옛 추억에 젖었던 것 때문 일 수도 있지만 스스로가 이제는 자신감이 생겨서 일지도 몰라. 이제 저 친구의 삶에는 옷이라는 것 말고도 비중을 차지하는 것들이 꽤나 생겼을 거라고 믿어. 이 모든 게 내 짐작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상훈은 불현듯 자신이 우산도 우비도 없이 드넓은 평야에 낙오된 사람 같다고 느꼈다. 무방비하게도. 비가 내리는 날이 귀한 몽골의 한 평야에 서있는 그는 난데없이 쏟아지는 폭우를 느낄 틈이 없었다. 멍하니, 속수무책으로 연주가 쏟아내는 말에 이미 완전히 젖고 있었다. 애초에 그에게는 젖어야 할 이유도 젖어서는 안 될 이유도 없었다. 폭우가 쏟아지는 것에 대해 생각할 단계는 지났다. 폭우는 그의 생각 따위 고려하지 않는다. 아니, 고려하지 않아야 한다. 세상에는 왜라고 질문을 던지기에 앞서 일단 그대로를 느껴야 하는 현상도 있는 법이다.

연주는 자신이 쏟아낸 말에 대해 괴로워하는 듯 보였다. 마치 이빨에 달라붙는 껌을 뱉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마침내 상훈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을 찾았다. 상훈이 성호에 대해 한 이야기에서 뭔가가 촉발되어 나와 그녀를 자극한 것이다. 장장 6개월이라는 기간 동안 상훈에게 캐묻거나 들춰내려 노력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던 이유는 적절한 말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행동과 기다림 사이에서 찾아오는 끝없는 딜레마에 연인으로써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상훈은 사실 책을 쓰는 내내 이질감을 버티지 못해 그림자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러 떠났던 그 여행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낯설음을 분리시켜 눈앞에 소환시켜버리면 마침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상훈은 보아야 할 것을 보고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돌아보며 스스로를 칭찬하기도 했다. 조금은 뿌듯해하는 것쯤은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효과는 충분했다. 여러 가지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이해했다. 또 용서했다. 친해지기도 했다. 그러는 동시에 상훈의 안에 매달려있던 오랑우탄의 악력도 서서히 약해졌다. 그러나 그 사이클이 한 바퀴 돌고 어느 정도 안심을 했을 때쯤 오랑우탄은 다시 장난을 걸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는 또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 과정은 책을 쓰는 기간 내내 반복되었다.

상훈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글을 쓰는 행위 자체에 과한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기대는 일정 수준 이상의 노력을 가능케도 하지만 집착이라는 친구도 함께 데리고 올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책을 쓰며 오롯이 자신의 고통에만 집중했다. 일단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도 맞다. 그러나 그는 지금 자신의 고통을 우려하는 이의 마음은 살필 여유도 없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연주는 상훈의 머릿속에 폭우를 내려줌으로써 또다시 좁아진 시야 속 무력해진 그의 정신을 화들짝 놀라게 했다. 결국 절대적인 자신만의 결과물이라는 건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연주의 이해와 암묵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상훈은 진작에 소설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쓰여지기 위한 글이라고 번듯하게 명패를 내걸고서는 노력했던 것이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상훈은 느꼈다. 사실 글을 쓰는 것이나 그림자를 만나는 것은 삶에 있는 수많은 점들 중 하나에 불과한 것이라고. 여기서 중요한 것은 유난히 도달하기 힘들었던 점에 한번 도달했다고 해서 그 뒤의 점들이 저절로 연결되는 일 따위 절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며 인간에게 미래를 생각하는 것의 필요성이 대두되는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하고.

그리고 상훈은 자신이 명명했던 것 중 하나를 꺼내 재조정하기로 했다. 해방에 대해서 말이다. 이질감을 정지시키는 것이 조건이었던였던 그의 해방은 이질감을 돌볼 수 있는 역량을 갖추는 것으로 바뀌었다.


문득 오른쪽 옆구리가 허전해진다. 옆을 보니 방금 전 먹을 것을 잔뜩 사 올 때까지만 해도 뭉쳐져 자고 있었던 그의 동창과 여자 둘이 사라졌다. 마치 자신을 누구에게 내어준지는 꽤나 오래되었다고 말하는 것처럼 그들이 앉았던 폭신한 쿠션 의자는 눌린 자국 하나 없이 팽팽했다. 연실 또각 거리며 서빙을 하고 청소를 하던 여자 종업원과 눈이 마주친다. 상훈의 표정을 보고는 좀 불안하다는 듯 시선을 피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표정이 어떤지 감지할 수 없다. 무언가가 찾아와 그의 시각과 청각, 공간감 같은 것에 침투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것은 다른 감각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평소 잠자고 있던 숨겨진 하나의 감각을 깨우는 일이었다.


“날 보낸 사람을 찾아.”


그것은 다름 아닌 상훈 자신이었다. 오랑우탄을 보낸 이는 그 누구도 아니었다. 오랑우탄은 사람이 가진 마음이자 정신이다. 곧 자기 자신이다. 우리 모두는 그것을 잘 돌보고 관리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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