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선한 롤러코스터

2020.04.17

by 스미레

이번에는 연주가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다. 배웅을 할 때는 종종 공항까지 따라 나온 적이 있었지만 마중을 나와 준 것은 처음이다. 출국 전의 일로 짐작해보아 자발적으로 상훈을 반기러 나온 것은 아닐 것이다. 그의 부탁으로 마지못해 나온 것이다.


“요즘 자기를 보면 떠나는 사람 같지가 않아. 꼭 숨을 장소를 찾는 것처럼 보여.”


표정 없이 짐을 건네는 상훈을 보며 연주가 말했다. 연인을 수행비서처럼 대하는 태도에 그녀는 만남의 시작부터 불쾌함을 떠안는다. 최근 몇 개월 동안 상훈은 항상 자신의 감정적인 짐을 연주에게 차곡차곡 얹어놓았다. 다행히도 사랑의 지지로 인해 아직까지는 그 무게가 크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계속 빠르게 걷는다. 자신의 짐을 지고 있는 그녀가 자꾸 뒤처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돌아볼 여유도 없어 보인다.


“떠나는 게 맞아.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이지 않아?”


“적극적으로 숨는 거겠지.”


“무슨 말이야? 나 원고를 쓰기 위해 다녀왔잖아. 일 말이야. 놀다 온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적극적으로 숨으려고 연재 핑계를 대는 거지. 그게 아니라면 갑자기 왜 한 곳 하고만 일하고 있는 건데? 예전처럼 다양한 곳에 원고를 쓰면 더 많은 나라를 다닐 수 있을 텐데. 더 다양한 자극을 받으면서 경험을 흡수하고, 더 다채로운 글을 쓸 수 있을 거 아니야? 자기가 추구하는 삶은 그런 거 아니었어? 확실해. 내가 자기에게 느끼는 사랑에는 그런 독특함에 대한 존중이나 부러움도 섞여있거든.”


“독특함? 그래 넌 그런 걸 좋아했지. 나보고 자기가 살면서 본 몇 안 되는 천직을 찾은 사람이라고 했었으니까. 맞아, 네 말대로 이번 여행은 연재 때문이 아니었어. 그리고 일을 줄인 것도 다른 이유가 있어서야.”


“이제야 좀 솔직해지네.”


“그렇지만 이 이상 설명하긴 힘들어.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 네가 느낀 나의 독특함하고 관련이 있다는 것만은 확실해.”


“솔직해지려는 척이셨군.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할 문제야.’ 라니. 고고한 척, 그까짓꺼 좀 떠벌려보는 게 뭐 별거라고. 속에 있는 걸 내뱉는다고 주변 사람들이 득달같이 달려들까 봐? 몸을 바쳐 자기를 위해서 희생할까 봐? 그게 부담스러워?”


“왜 말을 그렇게까지 해?”


“난 돕고 싶을 뿐이고 어쨌든 자기도 인간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을 뿐이야. 가끔 자기는 본인이 80억 호모 사피엔스 중 하나의 개체일 뿐이라는 걸 잊는 것 같아서 말이야.”


“넌 내 생각엔 아직 화가 안 풀린 사람으로 밖에 안 보여. 대체 왜 계속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연인관계에 있어서 내가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입장인 건 알지? 그런데 말이야, 아니다 이제 와서 뭐 그런 건 상관없어. 딱히 자기가 나에게 강요한 것도 아니니까. 이해할 수 있어. 아직까지는. 하지만 중요한 건 이젠 나 조차도 자기의 안식처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고 ‘내’가 느끼고 있다는 거야. 이건 큰 문제야. 나뿐만이 아닐걸. 사랑도, 우정도, 심지어 여행도 똑같아. 난 자꾸 의문이 들어 모든 건 가만히 있는데 자기만 변하고 있는 것 같아. 숨는 건 괜찮은데 정말 숨어지는 건 맞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사람 같아. 아니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는 사람 같아.”


“내가? 무슨 근거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지금 누구보다도 안식처 같은 것들이 필요한 사람이 나라고.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어. 다만 내가 헤쳐 나가야 할 건 내가 하고 싶을 뿐이야. 단지 곁에서 날 도와줄 순 없어?”


“좀 이기적이네. 자신의 이름도 밝히지 않고 마을 사람들의 정보는 다 캐고 다니려는 이방인의 꼴이야. 정말 자신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스스로와 대화할 준비가 되어있냐는 거야.”


“내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지금 내 상황은 특수해. 이걸 나보다 쉽게 이해하고 도울 수 있는 건 없어. 대화? 지금 순간엔 그건 사치야. 탈선한 롤러코스터하고 무슨 대화를 해? 일단 사람부터 구하고 봐야 될 거 아니야.”


“어이가 없네. 그게 자기가 가진 문제야. 왜 항상 모든 것을 혼자 하려 들어?. 필요한 걸 줄 수 있는 대상은 항상 있어. 여유를 가지고 정중히 부탁해. 그리고 상황을 받아들여.”


“그게 대체 누군데?”


연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대체 누굴까. 어떻게 하면 만날 수 있을까.


“넌 나한테 뭘 해줄 수 있는데?”


상훈이 짜증 내며 말을 내뱉었다. 이 말은 하지 않았어야 했다.

연주는 그 말을 듣고 화도 내지 않았다. 다만 눈이 조금 빨개지며 이내 촉촉해졌을 뿐이다. 옆에 있던 공항 내 벤치에 들고 있던 그의 가방을 던지듯 내려놓고는 빠른 걸음으로 상훈에게서 멀어져 갔다. 철 고래가 한바탕 토하듯이 쏟아낸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간 공항에는 점점 작아지는 연주의 하이힐 소리만 울려 퍼졌다.

상훈은 ‘모든 게 다 그림자 때문이다. 오랑우탄 때문이다. 여행 때문이다. 그녀 때문이다. 나 때문이다.’ 하고 편하게 생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은 남의 삶에서 일어난 일이 아니었다. 상훈 자신이 살고 있는 시간 속에서 벌어진 일이다. 끝까지 그 위를 밟고 서있어야 하는 건 상훈뿐이다. 처음부터 그 위를 밟고 서있던 것도 상훈뿐이었다. 누구의 탓도 할 수가 없다. 심지어 자책과 반성 같은 것도 해결책은 아닐 것 같다는 사실은 그에게 혼란만을 가중시켰다.


‘그게 대체 누군데?, 그게 대체 누굴까?, 그게 대체 누군데?, 그게 대체 누굴까?’


정수리 위에서 오랑우탄이 펄쩍펄쩍 뛴다. 연신 상훈의 말을 따라 하며 놀려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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