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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게 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Nucleus 2025 #3

by 혜성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고 최선을 다해 기뻐했으며 최선을 다해 좌절하는 삶이었다. 그저 나에게 주어진 감정에 충실하게 살았다. 큰 욕심을 부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느슨하게 산 것도 아니었다. 지긋지긋하던 우울증과도 어느 정도 멀어진 듯 보였다. 이런 컨디션이면 뭘 하든 잘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오랜만에 내 삶에 햇빛이 스미는 듯했다.

먹던 약을 바꾸기 전까지는.


여느 때처럼 정신과 진료가 있는 날이었다. 의사 선생님은 감정 기복을 잡기 위해 먹던 약을 새로 나온 약으로 교체해 보자고 말씀하셨다. 지금 먹는 약의 용량이 높기도 하고 먹던 약의 부작용이 심했기 때문에 바꿔보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셨다. 약이 픽스된 지 꽤나 되었지만 사실 처음 복용하던 당시에 부작용으로 고생했던 약이 있었다. 땀이 너무 많이 나고 기억력 감퇴, 졸음 등등의 부작용이 심해서 다른 약을 먹어보기도 했지만 당시 내 상태가 많이 안 좋아서 부작용을 감수하고 먹자고 하셨었는데 이제 많이 안정되기도 했고 부작용이 적은 약이 나왔으니 시도해 보자고 하셨다. 별생각 없이 알겠다고 했다. 약을 조금 바꾸고 일주일이 지난 시점까지는 큰 문제가 없는 듯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도 뭔가 느낌이 이상하긴 했던 것 같지만... 이후에 약 용량을 또 한 번 바꿨을 때,, 내 일상은 무너져 내렸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던 일상이 뭐든 할 수 없을 것 같은 지옥으로 변했다. 얼굴에는 웃음보다 눈물이 머무는 시간이 길었고 참기 힘든 충동성과 계속해서 잠을 자고 싶은 과수면 증상이 나타났다. 속수무책이었다. 하던 일을 도저히 이어나갈 수 없었고 덕분에 매일 여기저기 죄송하다는 말을 하기 바빴다. 지금의 나를 도저히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인정할 수 없었다. 하루아침에 바뀐 내 일상은 나를 괴롭히기에 충분했다. 꽤나 긴 시간 동안 하지 않았던 자해를 했다. 그런 나를 또다시 혐오했다.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모른 채 시간이 지나고 다채롭게 보이던 세상은 흑백으로 보이는 것 같았다. 급하게 진료를 다시 보고 약을 원상복구했다. 하지만 그런다고 바로 나아질 리 없었다. 점점 생명력을 잃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을 보며 이유 모를 공허함과 답답함을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여기까지인가.'


병원에서는 다시 입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심장이 아팠다. 일상과 더 멀어진 채 입원해서 또 얼마나 고생해야 하는지, 또 얼마나 많은 주사를 맞고 눈물 흘려야 나올 수 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의사 선생님의 "혜성 씨, 아무래도 다시 입원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하는 말을 듣는 순간 몸도 두려운 건지,, 지난 입원 때 50번 넘게 주사를 맞았던 팔뚝이 욱신거렸다.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펑펑 울며 입원하기 싫다고 말하고 황급히 나왔다. 흥분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고 흥분은 곧 화가 되었다. 갈 곳을 잃은 화는 어김없이 나를 향했고 혼자 병원 건물 화장실에서 자해를 했다. 자해를 한 후 변기 위에 앉아 숨을 고를 때의 기분은 정말이지,, 내가 참 쓸모없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너덜너덜한 기분이었다.


며칠이 지났는지, 아침인지 밤인지 분간도 잘 안되던 어느 날, 친구한테서 카톡이 왔다. 여행 갔다 왔는데 선물을 사 왔다고, 시간 되면 잠깐 카페에서 만나서 수다 떨자고,,, 씻고 먹고 대화하는 기본적인 것들도 버거운 나였지만 홀린 듯 시간 약속을 잡았다. 잠들어서 약속에 못 나갈까 봐 앉아서 유튜브를 계속 봤다. 약속 시간이 다가올수록 '나가기 힘든데 괜히 만나자고 했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고민하는 사이 약속 시간이 되었고 대충 옷을 입고 나갔다. 오랜만에 나가서인지 날씨에 안 맞는 옷을 입어서 너무 추웠다. 시간이 빠듯해서 자전거를 탔는데 손이 얼어붙는 것 같은 추위에 저절로 몸이 웅크려졌다. 분명 손은 너무 시리고 아픈데 왜인지 마음 한편은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얼른 카페에 가서 친구와 인사한 후 빵과 음료를 시켰다. 밥도 제대로 못 먹는 마당에 빵은 안 먹고 음료만 먹으려 했는데 오랜만에 친구를 봐서인지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진 덕분인지 빵도 먹고 싶어져서 내키는 대로 빵도 이것저것 골라봤다. 친구와 근황 이야기도 하고 친구 여행 이야기도 하고 옛날이야기를 하다 보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친구가 노래방에 가고 싶어 해서 2차로 노래방까지 갔다. 땀을 뻘뻘 흘릴 정도로 열심히 소리 지르며 같이 노래를 불렀다. 이제 밖으로 나와 헤어지려 하는데 친구가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혜성아, 너가 너무 힘들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언제든 연락해. 기다릴게." 마음속 따뜻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살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찾던 나에게 살아야 하는 이유를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작별 인사 후 멀어져 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며 생각했다.
'삶의 이유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 죽어가던 나를 살게 하는 것은 사실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 시간 되면 만나서 수다 떨자는 친구의 카톡 단 하나가 나를 삶 안으로 끌어당겼다. 친구와 같이 있던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그 기억으로 나는 아직까지 살아가고 있다.

사람들은 살아가야 할 거창한 이유를 찾고자 허우적거리지만 결국 나를 살게 한 것은 친구의 연락 한 통이었던 것처럼 삶의 이유는 생각보다 소소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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