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 계란의 성공적인 데뷔전

: 계란 선수, 영광의 시대는 지금입니다!

by 채움



<본 1년 6개월 여아 계란알레르기&아토피 습진으로 진료 중이었으며, 최근 캡검사 수치 호전되어 잘 익힌 계란 집에서 시도 예정입니다.>


요양급여회송서에 적힌 문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호전.. 호전이라니..!

호전됐다는 이 짧은 두 글자가 이토록 사람 마음을 울릴 줄이야. 의사 선생님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곁에 있던 남편은 코를 훌쩍이기 시작했다. 나 역시 벅차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참으며 선생님의 설명을 놓칠세라 귀를 쫑긋 세웠다.


- 많이 좋아졌네요. 아토피 증상도 호전됐고, 계란 알레르기 수치도 거의 정상 범위 내에 들어왔어요. 이제는 집 근처 병원에서 관리하시고, 심해질 경우에만 내원하세요. 회송서 써 드릴게요.






#1.

진료를 마치고 병원문을 나서는 길, 나는 '호전'이라는 단어를 입 안에서 조심스레 굴려보았다.

호전(好轉). 나아질 호, 굴러갈 전. 상황이 좋은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병의 증세가 나아졌다는 뜻을 넘어, 지난 1년간 우리 가족을 짓누르던 불안과 자책으로부터 해방됨을 의미했다. 병원 가기 전날만 되면 가슴이 턱 막힐 정도로 마음을 졸이던 날들도 이제는 안녕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그간의 시간을 곱씹으며 서로를 다독였다.

동전 모양의 작은 습진으로 시작해 온몸을 덮어버린 아토피 탓에 낮밤으로 아이를 붙잡고 로션을 발라주던 날들. '10분'이라는 시간을 정해두고 칼같이 끝내야 했던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범벅이 된 물놀이(하필 또 물을 좋아하는 수속성 아이였다).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를 붙잡고 억지로 피를 뽑아야 했던 처치실의 차가운 공기까지. 그것이 무엇이든 매번 마음을 굳게 먹지 않으면 안 되었다.

(참고1_#29. 일요일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

참고2_ #43. 김치볶음밥을 꼭꼭 씹어먹는 날.)


계란 알레르기는 또 어떤가. 흰자를 먹지 못해 이유식 시절부터 17개월까지는 주구장창 노른자로만 음식을 만들어야 했던 날들이 스쳐 지나갔다. 간식으로 삶은 계란 한 알을 툭 까주면 그만인 평범한 일상이, 우리에게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하지만 이제 '호전'이라는 마법이 일어난 것이다. 온전히 계란 하나를 다 먹을 수 있다는 것. 예전에는 알지 못했던 당연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이제야 깨닫는다.


그렇다면 이 감사한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무엇을 만들어 먹어야 맛있다고 소문이 날라나.

그동안 성분표 뒤에 숨겨진 계란의 흔적을 찾느라 애썼던 시간을 뒤로하고, 제약 없이 마음껏 재료를 고를 수 있다는 사실이 나를 부엌으로 이끌었다.

무엇보다 아이에게 이 기적 같은 소식을 기념할 수 있는 특별한 요리를 만들어 주고 싶었다.


아이에게 줄 첫 계란 요리로 무엇을 해줄까 고민하다가 소고기를 듬뿍 넣은 '계란 또띠아 와퍼'를 만들기로 결정했다. 다진 소고기가 왕창 들어가고, 녹진한 치즈와 고소한 계란이 어우러진 와퍼 하나를 아이가 입안 가득 욱여넣는 모습을 상상하니, 장을 보는 손길마저 자진모리를 칠 만큼 신이 났다.




#2.


다음날 아침, 주방에 서서 널찍한 또띠아 위에 다진 소고기를 꾹꾹 눌러 펴고 달궈진 팬 위에 올렸다.


고기가 치익- 소리를 내며 익어갈 무렵, 그 옆으로 주인공인 계란을 톡 깨트려 넣었다. 투명했던 흰자가 팬의 열기로 순식간에 하얗게 피어올랐다. 지글지글 끓는 소리가 그간의 무거운 정적을 깨뜨리는 것 같았다.

핏기가 사라진 고기 위로 치즈를 깔자 잔열에 치즈가 녹아내리며 고기와 계란 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었다.

그래 이거지, 이거지!


따로 놀던 재료들이 한데 엉겨 붙어 노르스름한 빛깔을 내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군침이 돌았다.

이번 아침은 아이용과 어른용을 따로 만드느라 시간이 배로 걸렸지만, 마음만은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물론 요리 중간중간마다 욕망의 항아리가 불쑥 튀어나오는 바람에 양 조절에 안간힘을 썼지만, 그마저도 유쾌한 과정이었다.


결과 또한 합격. 남편 입에서 팔아도 될 정도로 맛있다는 이야기와 함께, 제 손바닥만 한 또띠아 하나를 야무지게 다 먹어 치운 아이의 모습까지 눈앞에 펼쳐졌다.

계란 선수, 이 정도면 꽤나 성공적인 데뷔전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아이 입가에 묻은 치즈와 계란 조각을 닦아주며 그제야 한숨 돌려본다. 매번 병원 문을 들어설 때마다 숨을 조여오던 긴장감이, 갓 구워낸 또띠아의 고소한 향기 속으로 사라지는 것 같다.


한때 우리 가족에게 계란은 '완전식품'이 아니었다.

오히려 아이의 입 주위와 몸 전체를 붉게 물들이던 '금기' 같은 것이었다. 조리 과정에서 물줄기에 씻겨 내려가는 흰자를 볼 때마다, 아이의 일상도 딱 그만큼 채워지지 못한 채 흘러내리는 것은 아닌지 늘 마음 한구석이 답답했다.


그랬던 내가 지금은 계란 한 알을 통째로 깨서 팬 위에 올리고 있다. 그리고 계란을 야무지게 베어 무는 아이의 참새 같은 입술에서 나는 잠시 일상의 기적과 기쁨을 맛보았다. 아이의 세계도 비로소 '완전'해지기 위한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잠시 비워져 있던 불안의 자리에는 아이의 건강한 웃음소리가 채워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 가족의 시간 또한 구워낸 또띠아처럼 노릇하고 포근하게 익어갈 것이다. 이제 더 이상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는, 참으로 완벽한 아침식사였다.




*(참고)

#29. 일요일은 내가 짜파게티 요리사!-https://brunch.co.kr/@a-se06/47​​


#43. 김치볶음밥을 꼭꼭 씹어먹는 날.-https://brunch.co.kr/@a-se0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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