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뜻한 위로가 필요한 날, 어묵탕
우리 집에 익룡이 산다.
열 달을 배 아파 낳은 딸은 태어났을 때 분명 사람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데, 130일이 지난 지금 익룡으로 변해있었다.
아이는 백일 언저리로 슬슬 돌고래 소리를 내며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켰다.
덕분에 인터넷 검색창에는 4개월 짜증, 4개월 종일 짜증, 하루 종일 짜증 내는 아기, 돌고래(익룡) 소리, 소리 질러 목이 쉰 아기 등이 실시간으로 올라갔다.
기분이 좋을 때도 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아 짜증이 날 때도 꺄-
짜증이 나면 그 소리는 더욱 길어졌는데, 대부분의 원인은 뒤집기가 마음대로 되지 않아서였다.
아이는 엉덩이를 지그시 눌러주거나 옆으로 자극을 주면 뒤집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아직 스스로의 힘으로 뒤집기를 하지는 못했다.
뒤집기는 4-6개월 사이에 하는 것이 정석이라 자신만의 속도가 있는 법이지 싶어 기다리는 중이었으나, 130일이 넘은 지금은 불쑥불쑥 조바심이 난다.
교직생활을 하며 '다 자기만의 때가 있는 법이다'를 입에 가시가 돋칠 정도로 말하고 다녔는데 막상 ‘우리 이야기’가 되니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괜히 유튜브나 맘카페에 올라오는 아이들의 뒤집기 영상을 기웃거리고, 또래 아이들보다 늦는 것이 아닌가 싶어 발달 자료들을 뒤적였으니 말이다.
인간은 어찌 이리도 간사한지.
아이에게 미안하고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이는 "숙련된 조교의 시범이 있겠습니다!"를 외치며 뒤집기 자세를 선보이는 남편과 나의 모습을 멀뚱히 쳐다보다가 이따금 자기 차례가 오면 한쪽 다리를 버둥거렸다.
그 모습은 흡사 땅바닥에 떨어진 생선 같았다.
내 팔보다 작은 그 생선은 원하는 방향으로 뒤집지도 못하고, 힘은 있는 대로 빠져서 마지막에는 늘 짜증으로 뒤범벅이 된 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곤 했다.
짜증이 서러움으로 바뀌었는지 울다가 지쳐서 잠드는 날도 많아졌다.
그럴 때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이를 안고 달래주는 일뿐이었다.
"오늘 참 괜찮은 엄마였고, 아빠였다"
그 무렵, 새로 산 물티슈 뚜껑을 열었다가 스티커에 적힌 문구를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하나부터 열까지 괜찮은 것이 있을 리 만무했다.
아이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한정적이었으며,
며칠간 아이를 너무 많이 울린 것 같아 미안했고,
육아를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인지 내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날 저녁, 잘 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되냐는 남편의 말에 걷잡을 수 없이 또 눈물이 흘렀다.
발달 속도를 차치하고 나의 행동 하나하나에 아이의 삶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무서움이 앞섰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잘할 수 없다는 남편의 응원과 위로를 받으며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 우리는 자연스러운 흐름에 맡겨야 할지, 조금이라도 자극을 주면서 도움을 주어야 할지 고민을 하였다.
결과적으로 후자를 택했지만, 아이가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으므로 너무 많은 연습은 피하기로 하였다.
행동 수행도 중요하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가 스트레스를 과하게 받는다면 자칫 양육자에 대한 신뢰도 잃어버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저 조금씩 도움을 주며 아이의 행동과 울음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아이의 속도를 지켜봐 주는 수밖에.
을씨년스러운 날씨와 더불어 얼어붙은 마음을 달래줄 따뜻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얼마 전 냉장고에서 발견한 꽃게 육수 소스가 생각이 났다. 찐 꽃게는 들어가지 못했지만 꽃게 육수와 홍게 간장을 넣으면 해물 냄새 그윽한 어묵탕이 완성될 것 같았다.
거기에 보리새우 가루와 달근한 맛을 내는 가을 무, 쫀득한 식감의 표고버섯과 팽이버섯도 함께 넣었다.
약간의 매콤한 맛을 위해 청양고추도 1개 썰어 넣고 한소끔 끓이다가 어묵을 넣었다.
모락모락 김이 나는 국물 위로 둥둥 떠 다니는 어묵들이 입맛을 다시게 한다.
어묵탕은 첫 숟갈보다 두 번째, 세 번째 숟갈이 더 맛있다. 재료들이 익는데 시간이 걸리지만, 끓이면 끓일수록 안에 들어간 채소와 어묵이 조화를 이루어 진하고 깊은 국물 맛을 내기 때문이다.
좋은 맛을 내기 위해 시간이 필요한 어묵탕.
마치 지금의 우리 같다.
태아가 엄마 뱃속에 있었을 때는 양수에 둘러싸여 있으니 중력을 이겨낼 필요가 없다. 그저 흘러가는 대로, 이리저리 둥둥 떠다니면 될 일이었다.
때 되면 알아서 밥이 들어오고 애써 팔, 다리를 움직이며 에너지를 쓸 일도 없으니 얼마나 편한 삶이었을까.
이따금 생존신고로 발이나 굴리며 꿀이구나! 를 외쳤던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와 하루하루 중력을 이겨내는 삶을 살고 있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있던 아이는 세상과 충돌하며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 얼마나 더 힘을 내야 하는지 매 순간 체험하고 깨닫는다.
옆에서 우리가 도와준다고 해서 본질적인 문제가 해결될 일도 아니거니와, 설령 도와준다고 한들 완벽하게 해결될 수도 없다.
오롯 아이가 이고 지고 감당해야 할 것들이다.
이것들은 아이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시간이 걸리고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중력을 이겨내야 하는 경우는 점점 더 많아질 것이다.
그렇다면 부모인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에는 무엇이 있을까.
나는 아이의 삶이 조금 더 진하고 깊은 맛이 날 수 있도록 '다정한 관찰자'가 되기로 하였다.
중력을 이겨내는 삶에는 정공법이 답이다. msg를 넣어 빠르고 간단하게 맛을 낼 수도 있지만 때로는 천천히, 시간과 공을 들이는 법도 필요하다. (물론 뒤집기 영역에 msg가 어디있겠냐마는.)
아이가 고통을 마주하고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지만, 자신을 믿고 자신만의 속도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함께 지켜보고자 한다.
중요한 것은 삶의 무게에 짓눌려도 일어설 수 있는 힘이니까.
거기에 다정함 한 스푼이 추가된다면 광막한 세상 속에서 더 살맛 나겠지.
속 깊은 곳까지 따뜻하게 감싸주는 어묵탕 국물을 마시며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아이를 바라보기로 했다.
아이의 속도를 지켜보기로 했다.